수동리(壽洞里) 낙애지(樂厓地)
수동리, 수동골이라는 마을이름은 전국에 걸쳐 숱하다. 그러나 대부분 물 수(水)자에 골 동(洞)자를 써서 수동골이라 한다. 이는 물골이 길게 늘어져 있는 계곡의 형상을 따라 부르는 마을이름이다. 물길이 뻗어 내린 마을의 특성으로 인해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들 아련한 물길과 관련한 추억 하나는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자리한 고향의 추억일 수 있다. 그 때문에 수동골, 또는 수동리란 이름을 들으면 왠지 낯설지 않다.
그런데 춘천 남산면에는 목숨 수(壽)자에 골 동(洞)자를 쓰는 수동리가 있다. 벌써 그 이름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게다가 수동리에는 나가지 또는 낙애지라고 일컫는 자연마을명이 함께 쓰이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유래가 여럿 이야기 되고 있는데, 지난 해(2015) 필자는 그 유래를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며칠을 답사하고 여러 제보자를 만나면서 수면 아래에 잠겼던 수동리의 유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때는 조선조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이다. 이 마을에 당시에 94세까지 살았던 낙애(樂厓) 김환(金鍰, 1650(효종 1)~1744(영조 20))이란 사람이 낙향해 있었다. 무려 생전에 8명의 임금을 모셨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까지 올랐고, 89세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기로사(耆老社)에 들었다. 그리고 92세인 1942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때 영조로부터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았다. 영조의 총애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는데, 낙애를 모시고자 어시(御詩)를 내렸고, 후손들은 어시를 보존하기 위해서 어필각(御筆閣)을 짓고 어시를 대리석에 새겨 보존하였다. 그 어시는 이러하다.
我朝三百年來也 우리 조선조가 3백 년이 되었는데
今卿父子半乎哉 이제 경의 부자(父子) 나이가 반이나 되었구려
特命陞超有意在 특별히 명을 내리니 뜻이 있다면 관직에 오르시오
耆府宜謝朱門開 기부에서 마땅히 주문(朱門)을 열어 사례하리라
마을이름이 생긴 유래를 증명하는 어시이다. 부자(父子)의 나이를 합하여 150년이 넘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때에 그렇게 오래 살았으니, 가히 기념하고도 남는 일이다.
마을이름은 낙애의 호를 따서 낙애가 살던 땅이라 해서 낙애지(樂厓地)라 불렀고, 오래 산 사람이 살았던 골이라 해서 장수마을이란 뜻으로 목숨 수(壽)자를 쓰는 수동리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기러기가 앉는 연못이 있다고 해서 낙안지(樂雁池), 또는 기러기가 날아가다 떨어진 곳이라 해서 낙안지(落雁地),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낙안지(樂安地)라 하기도 하고, 낙안지가 변해서 나가지(羅加池)라 하기도 한다. 지명이 어떻게 생기고 바뀌는지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라 할 것이다.
낙애지 수동리의 유래를 보면서 우리는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낙애(樂厓) 김환(金鍰)의 호처럼 즐겁게 살면 오래 살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