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문화유산

국보 제124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심봉사(심창섭) 2012. 12. 8. 16:09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 국보 124호

 

  한국 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데 비하여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조각 수법과 아울러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좀 더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듯한 얼굴과 몸은 풍요로우며, 조각수법 또한 원숙하고 정교하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과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인데, 이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으며 만든 시기는 고려 초인 10세기로 추정된다.

                         

 

"tip"

불상(佛像)은 부처의 형상이고, 보살상(菩薩像)은 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리살타의 준말이다. 모두 인간의 모습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석조보살좌상이란 돌로 만든 보살이 앉아있는 형상을 지칭한다. 불상과 보살상은 무언가 상반되는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차이는 보통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보살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는 목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중인 자를 말한다. 깨달음을 얻었는지의 여부가 부처와 보살을 구분하는 불교 교리적 기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대비되는 개념은 시각적으로도 부처와 보살을 다르게 보이도록 표현되었던 것이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500여년이 지나 사람들은 석가모니의 형상을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특별한 존재였기에 인간과는 다른 여러 가지 특징들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서 불상은 머리 꼭대기 정수리가 튀어나온 모습을 하게 되었고[육계], 머리카락은 돌돌 말린 소라껍질 모양으로 생겼으며[나발螺髮], 귀는 매우 길고, 팔은 무릎까지 내려오며, 목에는 3개의 줄[삼도三道]이 있는 것이다. 부처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기 때문

 

 

 

 

 

에, 세속적인 의미를 지니는 관(冠)이나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 들을 모두 벗어던졌다. 오직 최소한의 법의(法衣)만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반면 보살은 아직 세속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보관(寶冠), 장신구 등을 몸에 걸치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보살상은 가냘픈 몸매로 표현되어 여자로 알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보살은 여자는 아니다. 경전 상에서도 보살은 남자, 여자로 모두 나타나며, 보살이 여자와 같은 몸에 다양한 장식물을 걸치고 전체적으로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 이유는 보살이 일반적으로 자비심을 인격화한 모습이기에 아마도 어머니사랑(모성애)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라는 견해도 있다. 국보124호인 한송사(寒松寺) 석조보살좌상은 머리에 보관을, 몸에 장신구를 한껏 걸친 화려한 보살상이다. 한송사가 소재한 강릉은 통일신라 말 명주(溟州)라고 불리던 곳에 속해 있었다. 명주는 통일신라 말기에 왕도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곳이었다. 무열왕의 5대손인 김주원(金周元)이 명주군왕으로 봉해져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보현사, 한송사, 굴산사, 신복사 같은 사찰들의 창건을 적극 지원하여 독자적인 정치·종교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고려가 건국되면서 지방호족의 근거지를 없애는 폐찰정책이 시행되고 이들 사찰은 희생양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릉에는 뚜렷히 절터의 흔적은 있으나 사찰의 이름이나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폐사지가 다수 있다. 한송사는 그 중 하나로 전성기에는 200여칸에 이르는 큰 절이었다. 한송사는 고려시대 이곡(李穀 1289 ~1351)이 쓴『동유기(東遊記)』에 이곳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있었고, 절터 동쪽에는 4기의 비석과 귀부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한송사 터에서는 두 점의 귀중한 문화재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석조보살좌상(국보124호)이며, 또 하나는 강릉 오죽헌 시립박물관에 소장된 석불상(보물81호)이며, 이 보살상은 1912년 일본으로 밀반출된 것을 1965년 6월 한일협정에 따라 이듬해 돌려받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되돌아온 문화재로 ‘강원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물로

 

   첫째, 우리나라의 석조불상, 보살상들은 보통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석질이 매우 단단하여 조각하기에 만만치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돌이었기 때문에 석굴암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다. 이에 비해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은 특이하게 대리석을 소재로 하였다. 유리질이 섞인 대리석을 사용해 흰 색을 띄게 되었으며 보는 이에게 반짝반짝 빛나며 화려한 느낌을 준다. 

  둘째, 이 보살상은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평창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등과 매우 유사한 양식을 보여준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과 풍만한 얼굴이 그것이다. 이러한 얼굴의 인상은 고려 초 강원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고려시대에 지방색을 반영한 불상의 등장’이라는 한국불교미술사의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로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