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그런 거였다.
심 창 섭
* 능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고받는 뻐꾸기 소리가 아련한 초록아침이 싱싱하다.
방아다리 사이에서 고추가 다투어 식구를 늘이고 겨우 손가락 크기의 오이 끝 노란 꽃송이에 벌 몇 마리 붕붕대는 텃밭, 목긴 장화에 밀짚모자 눌러쓴 도시농부의 손길이 분주스럽다. 하룻밤사이 훌쩍 커버린 옥수숫대 사이로 바람 한 점이 자꾸 어깨를 비벼대며 칭얼거린다. 더 높이 오르고 싶어 허공에 헛손질을 해대는 호박넝쿨의 간절한 손짓이 민망하게 떠오른다.
어느 햇살 좋은 봄날 뿌려진 작은 씨앗들이 자라 다투어 열매를 맺는 계절, 검은 비닐에 덥혀 숨쉬기조차 힘든 이랑사이의 비좁음을 헤치고 올라오는 잡풀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우리는 경의를 표해야 한다. 이름조차 무시당한 채 밟히고 뽑히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남는 저 무수한 잡초들. 며칠 전 고라니가 몰래 시식한 이파리 없는 채소의 앙상한 줄기가 을씨년스럽다.
불쑥 꼬리를 잘리고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사라지던 도마뱀이 떠올랐다.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버린 엄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빈 언덕엔 언제나 찬바람이 불었다. 한참동안 꿈틀거리다 동작을 멈추던 꼬리의 침묵처럼, 울타리를 잃은 소년은 말을 잃었다. 눈물자국 꾀죄죄한 모습으로 그가 남긴 보따리를 풀었다. 잿빛슬픔, 진한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밑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그리움 한 덩어리는 가슴에 묻었다. 구우-구우- 구슬피 울어대는 산비둘기 애잔한 소리에 마음마저 허물어진다. 어둠속에서 소리죽여 흐느끼며 불러대던 엄니는 이미 지워진 단어였건만 아직 그리움 남았는가.
기댈 언덕이 없는 삶은 버겁고 참 많이도 서러웠다. 바람이 불때마다, 뼈마디 사이사이 에서 잡풀들이 돋아났다. 어렵사리 뿌리를 내린 잡초와 마주선다. 흐릿하지만 아픔의 흔적인 생채기 몇 개도 보인다. 잡초처럼 살아온 내 삶의 얼룩진 초라함이 거울 안쪽에서 고개를 내민다. 애증의 기억들. 무심한척 잡초를 뽑는다.
호미의 칼날 앞에서 버티어 보던 저 마다의 애증어린 사연들이 마지못해 끌려 나온다. 수북이 쌓이는 잡초. 뿌리 채 뽑힌 잡풀더미에서 아직 풋풋한 초록향기가 번져난다.
잡초가 잡초를 뽑아내는 계절. 산새들은 노래를 계속하며 목가적인 전원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삶은 그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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