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골목길의 사유(2010 춘천문학)

심봉사(심창섭) 2010. 12. 14. 22:52

(수 필)

골목길의 思惟

심창섭

 

 

* 닫혀진 대문.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골목길,

한 여름임에도 골목길엔 평상도, 돗자리도 보이지 않는다. 모깃불 놓고 둘러앉아 라디오 연속극을 듣던 정겨운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순해빠져 아무 길손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반기던 바둑이도 없었다. 전깃줄과 광고 전단은 어지러울 정도로 난무하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간혹 가시철망을 얹거나 깨진 유리파편을 박아놓은 담장 안에서 길손의 기척을 알아챈 영악한 개가 목이 쉬도록 짖어대는 골목길엔 가끔씩 도둑고양이가 쏜살같이 담장을 넘으며 정적을 깨우며 있다.

 

환경과 문화, 삶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것이 선진화로 가는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10여 년 전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변화하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처음으로 향리에 아파트가 단지를 이루며 섰을 때만 해도 삭막한 콘트리트 덩어리로 만든 인간 닭장이라며 경시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아파트들이 도시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르며 높고 낮음의 고저차를 만들어 놓았다. 서로 고만고만한 처마 선으로 기대며 낮은 담장너머로 마주하던 이웃과 골목길은 물론 텃밭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현관문만 닫으면 나만의 밀폐된 공간을 연출한다. 비설거지, 눈 설거지 걱정 없는 아파트의 편암 함에 중독되어 툇마루 양지 볕과 창호지를 통해 들려오던 바람소리의 속삭임도 잃어 버렸다. 어느 날 창밖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다 문득 사라지는 골목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났다. 내 고장의 옛 자료가 매우 미약한 것을 알고 있던 터라 현재의 모습이나마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좁고 굽은 골목에 대한 그리움을 사진으로 남겨보고자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골목길을 찾았다. 소위 달동네로 불리던 춘천시내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참으로 많이도 찾았다. 예전처럼 넉넉하지는 않지만 삶의 훈훈한 이야기와 인정이 넘쳐나던 그런 곳이라 생각했는데 예전의 골목길이 아니었다. 골목에서 마주친 몇몇 아주머니들의 물음은 하나같았다.

“ 사진은 왜 찍우?, 여기가 곧 개발된 댑디까??”

개발이 우선 시 되는 시대에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 아니 이런 비석이..........

어느 날 정말 생각지도 않은 후미진 골목길에서 비석 하나를 발견하였다. 아무도 눈길조차주지 않는 초라한 모습을 가진 작고 보잘 것 없이 세월의 때가 묻은 비석이었다. 비석 받침돌과 비신이 콘크리트로 붙어 한꺼번에 뿌리 채 뽑혀 나와 있는걸 보니 중장비로 푹 떠서 옮겨논 것 같았다. 예전 문화재분야에서 일하던 습관상 옛것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관심이 그를 만날 수 있게 하였다. 열린마당 구석이기는 하나 남의 담장 안에 있어 신경이 쓰였지만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비신의 높이라야 90cm, 폭이 약 30cm정도의 작은 화강석 비석이었지만 전면에 몇자되지 않는 비문을 읽는 순간 난 가슴으로 울컥 솟구치는 뜨거운 피가 머리위로 솟구침을 느낄 수 있었다.

「獸魂碑」(수혼비)라고 한자로 음각된 단 세 글자가 선명히 다가왔다. 좀 더 자세한 건립내용을 알고 싶어 뒷면을 살펴보았지만 나머지 삼면에는 이무런 글씨도 없었다. 호기심은 반감되었지만 그래도 비명을 추이해 볼만한 욕구가 발동되었다. 수혼비란 짐승의 혼을 달래고자 세운 비석이다. 이런 곳에 이런 비석이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부근에 도축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량한 업주가 이곳에서 도축된 가축의 혼을 위무하고자 위해 세웠던 비석이었다.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상술로 세워 졌었기에 도축장이 이전하면서 함께 떠나지 못하고 버림을 당했다. 뿌리 채 뽑혀 방치된 비석주변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저항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동물들의 영혼들이 맴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다가온다. 아우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 비석을 어찌할꼬.

 

인간을 위해 희생한 가축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세운 비석인데 이렇게 버려도 되는 것일까. 기름진 식탁과 술안주로 사라진 많은 영혼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았겠지, 인간의 부족한 영양을 메우고 잔칫날의 풍성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준 주인공이기도 했으니깐.

 

또 지난봄 한림대 교정에서 만났던 동물위령비도 떠올랐다. 동물 위령비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언론을 통해 들어보았다. 실험실에서 온갖 약물을 투여하며 사육하다 죽은 실험동물의 넋을 기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비석으로 매년 위령제를 지낸다고 했다. 또 동물원에서 사육하다 죽은 동물이나 육식동물의 먹이로 희생된 그들을 위해 즐겨먹던 사료와 과일 등으로 제물을 차리고 위령제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식용으로 한 가축들의 사연이 아닌 동물원이나 실험실 같은 특별한 곳에서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던가. 사실 동물위령비나 수혼비는 동일한 것 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그 격조가 다르게 다가온다. 의약품의 부작용이나 효능을 알기위해 죽어간 수많은 동물이나, 우리 안에 갇혀 인간의 눈요기로 살다간 동물이나, 우리의 식탁에서 사라진 동물들이 다른 게 무엇인가.

 

보일러와 아파트 문화로 독립공간이던 부엌과 마루가 사라졌으며 툇마루와 굴뚝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래 우리가 잃어버리고도 아쉬움을 모르고 지내는 게 어디 한 두 개뿐이겠냐 마는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예전에는 웬만한 집이면 마당이 넓지 않아도 병아리 몇 마리 사다가 마당 한구석에 닭장을 지어 밥찌끼나 푸성귀로 키웠다. 동이 트면 홰를 치며 아침을 알렸고 소풍 때는 삶은 달걀로, 도시락엔 계란 프라이가 되어 특식으로 부족한 영양을 채워주던 정말 고맙고 친근한 가축이다. 게다가 불시에 들이닥친 손님이라도 있으면 자연스럽게 비틀어 소주한잔에 정까지 담아 낼 수 있게 해준 것도 닭이었다.

 

그렇게 모든 걸 바쳤지만 나는 그들을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한 번도 죄의식이나 미안함 마저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인류 의학발전이나 식욕을 위해 희생된 동물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겠다.이제야 철이 들기 시작하는 것일까. 문득 모든 생명은 환생한다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떠오른다. 다음 세상에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게 될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만난 작은 비석 앞에서 삶이라는 화두에 빠져든다. 그림가가 길게 눕는 시간.   아직도 골목길을 빠져나가지 못한 슬픈영혼들이 서성거리며 저녁시간을 맞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