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 텃밭에서 길을 묻다"

심봉사(심창섭) 2010. 4. 2. 07:42

 

 

텃밭에서 길을 묻다

沈昌燮

 

* 오월 초순, 봄볕이 느긋한 날을 골라 텃밭을 일군다.

괭이가 한번씩 메마른 흙을 뒤집을 때마다 부드럽고 촉촉한 속살이 드러난다.

고향의 질감이 느껴지는 구수한 흙냄새가 코끝에서 맴돌고 두둑과 고랑이 하나씩 만들어질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른다.

 심심찮게 언론매체에서 텃밭 가꾸기의 즐거움을 합창하기에 시작한 농사일로

 올해도 친지의 사용하지 않는 40여평의 밭을 빌려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전원의 여유와 정취를 만끽하며 무공해 채소로 신선하고 풍성한 식탁을 채우고 주변 친지들에게 고추 상추 호박을 한 봉지씩 봉송(封送)하는 쏠쏠한 즐거움을 그 어디다 비기랴.

내가 손수 기른 무공해 청정채소라며 덧붙인 한마디에 봉지의 무게가 배가된다.

 정으로 나누는 기쁨의 뿌듯함에 힘든 줄도 모르고 오늘도 밭 주변을 서성이며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땅 부자가 설쳐대는 시대에 땅 떼기 한평조차 없는 무능력자의 설음이 잠재된 발로 인지도 모른다.

 흙을 뒤집고 파헤치는 노동을 통해 스트레스를 달래고 또 남아도는 백수의 시간 때우기를 위한 핑계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땀 흘린 만큼만 수확의 기쁨을 주는 그 고집스런 정직함이 맘에 들었다.

 자고나면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밭에서 흘리는 짭짜름한 땀 냄새의 상쾌함에 힘이 드는 줄도 모르고

땅을 일궈 가꾸고 거두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

안마당 화단에 채송화, 국화, 사루비아 꽃씨를 뿌리고 다알리아 구근을 심던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작은 땅이라고 만만하게 시작했지만 그것도 농사랍시고 생각보다 알아야 할 것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주변사람들에게 귀동냥을 하고 인터넷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농사를 시작한다.

등산화를 신고 선글라스와 창이 넓은 밀짚모자도 하나 준비했다.

장비라야 삽과 괭이, 모종삽, 그리고 분무기와 물뿌리개가 전부지만 이제는 3년차 농군으로 제법 초년생의 어설픔은 벗은 편이다.

좋은 모종을 구한다는 욕심에 올해는 시장의 좌판이 아닌 육묘장을 찾았다.

나처럼 초보 텃밭농군들이 옆 사람의 구입품목을 기웃거리며 눈치를 보느라고 활기가 넘쳐난다.

막상 10여 가지가 넘는 고추모종을 대하고 보니 선택이 망설여진다.

고추모종 한 가지에 웬 종류가 그리도 많은지. 나 역시 적당한 곁눈질로 골라본다.

 한여름에 상큼한 효과음으로 입맛을 돋우어 주는 풋고추, 매운 맛으로

입술이 얼얼해지는 청양고추 그리고 조림용 꽈리고추도 골랐다.

다행히 초보자들을 위해 예전엔 없던 부추, 옥수수, 상추, 파, 호박, 쌈 채소류 모종까지도

낱개로 판매해 선택의 폭이 한결 넓어졌다.

단비가 온다는 예보에 맞추어 택일을 하고 모종과 씨앗을 준비한다.

초코렛 상자를 닮은 플라스틱 포토의 모종들이 작은 바람에도 스스로 몸을 누이며 환경에 순응한다.

포토에서 한 뼘정도의 키로 자란 고추모를 뽑아내자 가늘고 하얀 뿌리들이 보인다.

이 여린 뿌리가 올 여름의 강한 태양과 비바람을 견디며 수확의 기쁨을 주려는지 모르겠다.

비닐에 구멍을 뚫고 물을 준 후 모종을 조심스레 심는다.

일곱 개의 이랑 중 겨우 두 이랑을 지나치는데 벌써 땀이 흐르고 허리는 통증을 호소한다.

비닐을 씌우지 않은 공간에는 열무와 상추씨를 뿌린다.

 불과 1~2cm의 깊이에 좁쌀알보다도 작은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다.

과연 이 씨앗들이 제대로 싹을 틔우 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는지 의구심이 든다.

농사를 시작한 후 땅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낀다.

예전엔 그저 돈으로 환산해 보던 땅은 이제 농지라는 이름으로 내게 다가왔다.

지나치다 잡초가 무성한 빈 땅보면 괜히 마음이 언짢아 진다. 무엇이라도 심으면 될 땅인데 저렇게 버려두다니......

일주일 만에 찾은 텃밭에는 반란이 일고 있었다.

 여기저기 작은 새싹들이 마른땅을 비집고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비실비실하던 모종들도 꼿꼿하게 제법 자리를 잡았다. 생동감이 충만하다,

자세히 보니 정성으로 뿌린 씨앗보다도 여기저기에 잡초들이 무서운 번식력으로 왕성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산야에 있었더라면 나름대로의 삶이 주어졌을 텐데 선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뽑아버린다.

과연 내 심안의 텃밭에는 무엇을 파종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싫어도 버리지 못한 과욕과 불만의 씨앗들이 잡초처럼 왕성하게 자라고 있지는 않는지.......

어이할꼬! 어이할꼬!

수시로 찾는 바지런과 화초 가꾸기처럼 농사를 짓기 때문인지

 별다른 병충해 없이 자라주는 채소들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르겠다.

비둘기 나른하게 구- 구- 울어대는 밭가에 앉아 잡초를 뽑는다.

가끔씩은 산들바람이 일고 앞산에서 뻐꾸기가 울어

 적막감을 흔들지만 무심하게 앉아 잡초를 뽑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아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한다.

때론 잡초처럼 뽑혀 버려져 있는 나를 만난다. 잡초라는 화두에 빠져 나를 잃는다.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도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

나른한 오월의 햇살을 비둘기가 무심히 쪼고 있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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