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사월의 풍경

심봉사(심창섭) 2010. 4. 9. 20:38

 

四月의 風景

심창섭

 

- 거리가 온통 꽃향기로 넘쳐나는 봄이다. 

봄꽃을 마구 터트리는 사월의 미풍 때문일까.

개나리가 도시의 여기저기에 노란 물감을 마구 뿌려대고 눈보다도 하얀 백목련화의 아련한 향기가 골목길을 메우고 있다. 지난겨울 백수생활 첫해의 길고 지루함도 따스한 봄볕에 녹아지는 사월이다.

거리는 선거운동으로 생동감이 넘치고 봄꽃에 들떠 실없이 웃어대는 큼직한 얼굴들이 여기저기에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생면부지의 차들을 향해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대고 선거운동원의 율동에 도시 전체가 술렁거린다. 시내곳곳의 로터리마다 목쉰 스피커가 울어대도 신등 색갈이 바뀔 때마다 차량의 행렬은 그저 무심하게 가고 서고를 반복할 뿐이다.

 

예전 초등학교시절 읽었던 너대니얼호손의「큰바위 얼굴」이 생각난다. 거울을 마주하며 큰 얼굴의 주인공이 성장한 나의 모습 일 것이라며 마법의 주문을 걸던 어린 시절 꿈의 한 페이지가 떠오른다. 그 당차던 희망과 꿈과 바램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어느 순간 내 곁은 떠나 버렸다. 유년기에 어머니를 잃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울어대던 그 순간부터 내 삶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이었다.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막연하게 희망이라는 끄나풀을 붙잡고자 어두운 골목길을 달리던 신문팔이 소년은 벌써 머리가 하얀 초로의 신사가 되어 있다. 삶의 무게를 버거워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이곳은 내 삶의 어디쯤 일까. 유리창으로 흐르는 빗물에 가슴이 젖어와 투명한 소주잔을 비운다. 추억처럼 아련한 그때가 저기쯤 일텐데 돌아봐도 출발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룬 것도 없이 세월의 힘에 밀리어 너무 멀리 온 것일까. 나보다 앞섰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나보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개 마루 나무그늘에서 숨고르기를 하며 잠시 어제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는다. 앞산에 불쑥 솟아올라있는 얼굴형상의 바위를 보면서도 희망이라는 단어가 아닌 불현듯 왜 인생의 도착점이 저만치쯤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떠오를까.

 

거리의 벽면을 도배한 큰 얼굴들. 너는 거기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명예와 욕망을 위해 쉰 목소리로 펄럭이고, 나는 밟혀도 죽지 않고 잡초처럼 세파에 몸을 맡긴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이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꿈이 봄바람에 들썩거리는 선거홍보물과 엉키어 씁쓰름한 잔영을 만든다. 도시의 커다란 벽면을 가로막은 정치지망생들. 하나같이 미소를 잔뜩 담은 얼굴과 큼직한 이름 석 자가 활자화되어 바람이 일 때마다 애절하게 펄럭인다.

출퇴근시간 탑승객이 잘 보이지도 않는 차를 향해 무작정 머리를 조아린다. 지나치는 생면부지의 길손에게도 다정히 그리고 힘있게 손을 잡으며 미소가

경련이 일도록 활짝 웃는 얼굴과 이름이 큼지막한 명함을 내민다. 자신만이 일꾼이며 무조건 열심히 하겠단다. 아무런 사심 없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 단다.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란다.

 

허나 어쩌란 말인가.

저 이는 먼 인척이 되고,

저 사람과 저 친구는 선후배 관계이고, 저 분은 직장 상사였고,

재는 친구의 친구인데.......

저 미소와 저 공손함을 선거가 끝나도 볼 수 있기를 무모하게 기원하면서 결국 고독한 칸막이 속에서 인주조차 필요치 않는 도장하나로 목마름을 달래보지만 나는 그저 한명의 1등을 만드는 조연에 불과할 뿐이다.

세월이 흐를 때마다 불과 한 달여 만이면 사라져 버린 현수막의 그 얼굴이 내가 그리던 진정한 큰 바위 얼굴이 아니었음을 느끼곤 한다. 봄이 지나면 당연히 여름이 오듯 시간에 몸을 맡기다보면 또 4년 후엔 어떤 얼굴들이 벽면을 채우는 풍경을 연출할지를 그려본다.

 

아직도「큰바위 얼굴」읽으며 희망을 그릴 아이들을 위해 존경받고 희망이 될 수 있는 큰 인물이 우리고장에서 배출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이렇게 도시전체가 봄꽃처럼 웃고 도시의 콘크리트 회색 벽면이 웃기만하는 모습이 좋기는 하지만 사월이 지나면 또 어떤 풍경이 우리를 들뜨게 할까. 봄 꽃잎 날리듯 선거 홍보물과 함께 봄날의 풍경이 그냥 사라져 버리지는 않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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