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 초
沈昌燮
“ 불쌍한 놈. 어린것이 무슨 죄가 있겠수, 다 지 팔자소관이지 ”
유년기에 피붙이를 잃고 친척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내 삶을 빗대어 친지들이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수군거리던 귓소리이다. 아니 “잡초같은 놈”이 더 냉정한 표현으로 어린가슴을 못질하던 애증의 대명사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듯 세월 또한 덧없이 흘러갔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청년기도 그렇게 보냈고 뚜렷하게 이룬 것도 없이 벌써 이순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다. 진정한 가족애나 가없다는 부모의 사랑조차 모른 채 자라던 내게 그나마 연민의 눈길을 주던 곁붙이들마저 자꾸만 떠나버리는 시간, 쓸데없이 무성해진 심경의 잡풀들을 조금씩 걷어내 본다.
그리 넓지 않은 텃밭, 칠월의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색바랜 밀짚모자 눌러쓰고 앉아 잡초를 뽑는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정성으로 파종한 씨앗보다도 더욱 촘촘하게 배어 나오는 잡풀들의 극성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바랭이, 애기똥풀, 비름, 개망초, 민들레, 냉이, 씀바귀, 환삼, 질경이 솔거지 등등 종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풀들이 질긴 성화를 부린다. 보잘것없는 그들에게도 각기 다른 이름이 존재한다는 게 새삼스럽다. 하나하나 마다 약초, 사료, 식용 등의 용도로도 쓰임새가 있고 나름대로 꽃을 피워 누가 보건말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번식을 꿈꾸고 있었다. 스스로 뽑힘이나 괄시를 의식한 탓인지 뛰어난 번식능력과 활착능력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잡초에게 때론 서늘한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잡초란 어느 특정한 식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곳에 자라는 풀의 통칭이었다. 냉이나 씀바귀류는 분명 봄나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식물이다 보니 우리텃밭에서는 잡초로 변해 있었다. 결국 내가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쓰잘데 없는 잡풀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불쑥 내 앞을 가로막고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행세하는 놈이 있었다. 바로 야초(野草)라는 호칭이다. 어감만 다를 뿐 사실은 “잡초”라는 뜻이다. 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있는데 한자어로 분장하여 어원은 생략된채 그저 또 하나의 교양(?)있는 별호로 불리고 있었다. 지금도 “잡초 같은 놈”이라고 대놓고 부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머리가 하얗게 흐른 세월로 스스로의 체면들 때문에 젊잖게 부를 뿐이다.
한겨울의 모진시련을 이겨내고 어느 봄날 푸르게 돋아나던 잡초들의 눈부신 생명력을 떠올려본다. 과연 내게 잡초를 연상했을 만큼 강인함과 끈질김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순탄하지 못했던 인생 삶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그저 주어진 환경에 거스르지 못하고 달려왔을 뿐인데.....
잡초는 가장 낮은 자의 이름으로 표현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민초들의 대명사가 아닌가.
안락과 행복의 대열에서 밀려나 있던 그 시절이 나를 성장시킨 토양이 되었지만. 아직도 앙금으로 가라앉아 조금만 자극을 주어도 부유하는 상처로 남아있다. 잡초(雜草)로 불리면 어떻고 야초(野草)로 불리면 어떻랴, 또 잡풀이나 들풀이라 불리면 무슨 상관이랴. 이제는 어린 가슴을 못질하던 애증의 비아냥거림이 아닌데........
뜬금없이 옛시절의 아픔이 떠올라 신경질적으로 잡초를 뽑아 던진다.
비 한 차례 지나가면 죽순처럼 올라올줄 알면서도 이랑 사이에 억척스레 뿌리내린 잡초를 뽑는다. 지난주 뽑아버린 마른잡초 더미 위에 풋풋한 풀향기와 흙냄새를 함께 얹는다.
잡초가 쌓인다. 불현듯 버려진 잡초더미에서 나를 만난다. 잡초가 잡초를 뽑다니, 심보가 뒤엉킨 나를 뽑아 던진다. 며칠사이에 불쑥 키 자라 하얀 꽃을 피운 망초대도 뽑아 던진다.
“ 망할 놈의 잡초 같으니......”
그 옛날 뽑아도 뽑아도 끈질기게 솟아나는 잡초를 향해 원망스럽게 푸념하던 인연으로 저 풀이름은 망초가 되었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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