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낯익은 듯, 정말 낯선 듯
樂涯 심창섭
* 30년 동안의 질긴 인연을 무 자르듯 단칼에 잘라버렸다.
삶에 대한 반항이었는지, 아니 남은 세월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위장된 젊음이었지만 외형을 위해 가려움증도, 탈모증세도 감수하며 보낸 중독기간이었다. 정말 한동안을 망설였다. 한 올에 십원에서 백원이라는 보상금으로 용돈을 챙기던 조카의 머리에도 어느덧 서릿발이 내리는 시절. 보름여만 지나면 하얗게 선을 그으며 올라오는 흰 머리카락의 경계가 남북의 휴전선처럼 그어지는 그 분할의 아픔이 싫었다. 한번만, 한번만 더 하며 계속하던 반복은 습관과 핑계에 불과했다. 양귀비를 시작으로 비겐-A, 세븐에이트 등 수많은 염색약통을 비웠다. 검정에서 짙은 갈색으로 까지 변화를 고수했던 그 긴 세월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말부터 탈모가 심해지는 현상과 염색절차의 번거로움에 지쳐버렸기 때문이다. 염색초기에는 1시간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요즘은 불과 10분 이내에 염색이 가능하지만 그 귀차니즘은 여전했기에 결딴(?)을 내렸다.
느닷없는 염색약과의 절연선언에 자녀들은 물론 아내도 반대표를 던졌고 주변의 지인들마저 만류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질책이다. 귀를 막고 인고한 세 달여가 지나 거울과 마주섰다. 거울 속에 낯선 사내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그럼 저 사람이 나였단 말인가. 당혹스럽다. 하지만 진정한 내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머리끝부분에 지난염색의 꼬리가 남아 낯설음을 감해주고 있었지만 거울 속의 저 늙은이가 포장되지 않은 나란 말인가.
이제 세월의 뒤안길에서 서성대던 바람이 흩고 지나쳐 돋보기를 집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 되었는데, 무엇이 부끄러워 염색으로 감추려만 했던가? 흰머리를 감추고 살아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주름 골이 깊은 노인들의 검은머리는 오히려 어색스럽게 보인다. 조금 흉하기는 해도 정말 홀가분하다. 세월을 막을 장사가 있겠는가. 자연의 섭리燮理에 가슴을 열고 맡겨 보리라. 그래도 오랫동안 염색약의 검은가면을 벗어던지고 다가온 솔직함은 정말 낯설기만 하다.
직장과 집안에 웃어른들을 빙자해 어쩔 수 없이 염색을 했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좀 더 멋져 보이고 젊게 보이고 싶었다. 겸손이라는 허울을 쓴 행위로 사실은 늙어지는 모습이 싫었음이다. 젊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게 누구나의 바람이겠지만 머리를 염색하고, 얼굴의 검버섯을 없앤다고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아이들의 말처럼 호박에 줄긋는 다고 수박이 되는 게 아닐텐데.....
유별나게 예민한 피부로 염색 때마다 돋아나던 뾰루지 무리들과 간지러움, 그리고 옷깃과 피부에 지워지지 않는 검은 반점의 흔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미 눈가와 입가에 고랑과 이랑처럼 깊게 패여 가는 주름의 훈장이 뚜렷한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겁나랴,
이미 눈썹에도 초겨울의 무서리가 비치고 있는데.....
사실 온화한 미소를 담고 전시장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은발의 어르신들의 모습은 참 격조가 있어 보인다. 은발의 머리가 상징하는 여유와 관록을 겸비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직은 어정쩡한 나이의 늙은이이기에 스스로도 부담스럽기만 하다. 며칠 전 대형슈퍼에서 “할아버지 좀 비켜주세요” 조금은 짜증이 담긴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쪽에서 머뭇거리는 늙은이를 책망하는 소리다. 깜짝 놀라 길을 비켜준다. 눈을 흘기며 내 얼굴을 쳐다본 여인이 순간 “어머 죄송해요” 하며 얼른 자리를 비켜간다. 아마 할아버지라 부르기에는 아직 젊음이 얼굴에서 느껴졌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할아버지의 대열에 동참했다. 이제 한동안은 앞뒤가 다른 인격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도 있었다. 그 동안 잘 어울리지 않던 색상의 옷을 무난하게 걸칠 수 있는 게 된 것이다. 그렇게 촌스럽기만 하던 파스텔조 색상의 옷을 걸쳐본다. 이제 은발의 당당한 모습을 나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고려후기의 성리학자인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께서 백발이 되고 나이 듦을 한탄하면서 지은 시조 탄노가歎老歌가 떠올랐다. 늙음 자체야 어쩌지 못하지만 백발쯤은 염색약으로 간단히 해결 할 수 있는 시대이다. 선생께서 오늘에 살아 계셨다면 염색약을 사용하였을까 궁금해지는 시간이다.
그의 시를 읊어보며 마음을 달래본다.
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 젊음을 지나친 바람 문득 불고 간 곳없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 그 세월 잠깐 빌려다가 머리위에 붙이고
귀 밋테 해묵은 서리 녹여 볼가 하노라. / 귀밑 흰머리 검게 하여 젊어 볼거나
한손에 막대잡고 또 한손에 가쉬쥐고 /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난 길 가쉬로 막고 오난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고 했더니
백발이 제 몬져 알고 즈럼길로 오더라.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지 말려이고 다시 져머 보려터니 / 늙지 않고 젊어보려 하였더니
청춘이 날 소기고 백발이 거의로다 / 청춘이 날 속이고 백발은 어쩌지 못하네
잇다감 곳밧츨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 / 이따금 꽃밭을 지날 제면 죄지은 듯 하여라
[禹倬(1263-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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