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느림의 발라드(2016, 청선낭송회 발표)

심봉사(심창섭) 2016. 4. 4. 20:08



원고청탁 주제

느림의 발라드

심창섭

 

 *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 이유하나로 내 청년기의 삶은 언제나 숨참이었다. 바쁘게 살아가야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치부置簿하던 시절, 천천히, 느긋함으로 연상되는 느림이란 배부름과 게으름의 동의어이자 사치스러움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단어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사진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내게 느림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이기도 했다. 사진은 초단위의 짧은 시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예술이기에 순간의 판단력을 요구한다. 피사체와 마주하며 사고思考하고 고민하지만 결국은 전광석화의 속도로 영상을 사로잡지 않는가. 그 찰나의 속도에 길들여져 있는 내게 느림이란 그저 슬로우 셔터라는 사진용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사진작업의 바탕이 바로 느림의 시발점이었다. 촬영을 위해 카메라 뒷 뚜껑을 열고 구깃구깃 필름을 끼운다. 아무리 급해도 생략할 수 없는 절차이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레바를 돌려가며 노출과 거리를 맞추고 구도와 색상, 색온도까지 계산해야한다. 조금의 과부족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예민함과 독선에 아부하며 원하는 영상을 얻고자 빗속과 눈보라 속에서 몇 시간씩의 기다림도 다반사였다. 그 시간 또한 지루함을 동반하고 있었지만 행복한 기다림이었기에 인내할 수 있었다. 촬영이 끝난 필름은 되감기를 해야 한다. 스르륵! 필름의 마지막 끝이 파트로네(patrone)속으빨려 들어갈 때의 그 느낌, 마치 줄이 잘린 연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듯한 순간의 환희를 손끝으로 맛보면서 한 과장을 끝낸다.

 

  이제는 미세한 불빛도 허락하지 않는 암실에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던 필름을 끌 어내 현실과는 상반된 음화[negative]로 만들어 낸다.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의 촉촉한 기다림이 바로 현상이란 두 번째 과장이다.

 

  필름이 뽀송뽀송해지면 흐릿한 붉은 조명아래서 다시 한 번 적정량의 빛을 하얀 인화지에 덧씌운다. 아직도 영상은 음화이다. 현상액 속에서 빛을 머금은 백지인화지 위로 서서히 영상이 피어오른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숨어서 보는듯한 설렘이다. 아마 이 마지막 과장의 떨림과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사진기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양파껍질을 벗겨내듯 몇 번의 기다림을 감내하던 아날로그 사진작업이 불과 얼마 전인데 벌써 아득하게 느껴진다.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린 밤하늘 꼬리별의 궤적을 찾고자 두리번거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과 아득함이 바로 사진의 백미이자 느림의 미학이 아니었을까?

  요즘은 사진관에서 조차 필름을 보기가 쉽지 않다. 사진관의 상징이었던 암실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걸 보면 세월이 꽤나 흘렀나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시대로 변화하면서 느림이란 이젠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쾌쾌한 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출이란 복잡한 광선의 감도感度, 초점조차도 맞출 필요조차 없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듯 그저 셔터만 살짝 누르면 기계가 다 알아서 선명한 사진이 만들어 진다. 아니 사진기조차도 필요 없다. 휴대폰 하나면 영상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또 버튼 하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얗게 지워버릴 수도 있는 공상과학소설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의 속도에 생략되어가는 설렘과 기다림을 복원하고자 이쯤에서라도 고속도로를 벗어나 시골길의 한적함을 누려보리라. 달리거나 노래할 때에도 숨을 고르는 시간필요하듯 내 삶에 '쉼표'를 그려 넣고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들에 눈길을 돌려보리라. 느림이 만들어주는 기다림과 여유를 만끽하면서 깊고 너른 강물이 흐르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