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천년묵은 굴비 한 두름

심봉사(심창섭) 2019. 9. 15. 09:24



천년 묵은 굴비 한 두름


* 햇살 좋은 봄날,

연초록 새순으로 치장한 산하의 싱그러운 풍경을 가슴으로 읽는다. 봄바람을 안고 떠난 문학기행에 아이들처럼 들뜬 문우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돌다리 진천 농다리를 찾았다. 강변 버드나무가 바람이 일 때마다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흩날리며 우리를 반긴다.

 

이 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이 물줄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농다리 둘레길이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17번째로 선정된 곳이라는 선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만났던 잔상 때문이었는지 첫 대면임에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을 지날 때마다 농다리 간판이 보였고 차창 너머로 스치며 보이던 다리였다. 오래전 이곳을 지나치며 도대체 다리가 얼마나 길기에 롱long다리라고 하는 거야라는 농담에 동행들이 자네 같은 숏short 다리와는 비교가 안 되지라며 웃어대던 기억도 떠올랐다. 꼭 한번 마주하고 건너보고 싶었던 다리였다.

 

주차장 앞에 기념관이 있었지만 모른 척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1등으로 달려갔다. 아무 선입감 없는 순수의 마음으로 첫 대면을 갖는다. 생각보다 세금천洗錦川의 강폭이 꽤나 너르다. 콘크리트 직선다리에 익숙해 있던 내게 구불구불한 밭고랑처럼 자연스럽게 굽어진 다리의 외형에 감탄사를 토한다.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정말 한국적인 모습이다. 멀리서 본 곡선의 아름다움이 산하와 어우러지는 한편의 교향곡이었다. 지네 같기도 하지만 마치 굴비 한 두름을 엮어 놓은 모습이다. 산이 많고 개울이 많은 강원도태생이기에 징검다리뿐만 아니라 섶다리, 외나무다리도 건너보았지만 이런 돌다리는 처음이다. 특별한 설렘에 뛰어서 건너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천천히 그 자태를 감상한다.

 

겨우 1.2m의 정도의 높이이지만 길이는 무려 100m에 달하는 돌다리이다. 무려 천년세월의 물살을 다리사이로 흘러 보내고 때론 넘치게 하며 견디어 왔다니 놀라울 뿐이다. 감탄사를 토할 수밖에 없었다. 징검다리처럼 큼직한 돌 하나씩을 교각으로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크기도 제 각각이고 다듬지도 않은 자연석을 쌓고 상단에 너른 판석하나씩을 무심하게 올린 모습이다. 우리 전통석축의 기술인 그랭이질도 하지 않은 투박한 촌부의 모습이다. 시멘트나 석회 등을 사용하지 않아 엉성하고 허술하게만 보이지만 천년을 버티게 한 슬기로운 공법을 간직한 다리였다. 이러한 투박한 다리를 품고 있는 강을 한자로 세금천(비단을 씻는 강)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이러니irony 하다. 강폭이 좁은 개울의 징검다리도 장마가 쓸고 가면 이가 빠지듯 몇 개씩 사라지곤 했는데 천년의 물살을 수용하면서 자신을 지켜온 다리라니 놀라울 뿐이다. 매끈함을 버린 울퉁불퉁한 개성이 더 자신감 있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돌을 다듬어 축조했을 만도 한데 상판으로 사용한 28개 자연석 판석의 모양도 제 각각이었다.

 

천천히 돌다리를 건넌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편안한 마음으로 건널 수는 없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 다리를 오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오늘도 교각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문득 견우직녀의 오작교 사랑을 떠올린다. 다리는 연결만이 아닌 만남과 이별의 의미이다. 꽃상여가 건너기도 했겠지만 산파 할멈의 다급한 발걸음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를 치룰 선비가 홀어미나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장도壯途에 오르던 곳이다. 장원급제의 기쁨과 낙방의 낙담이 공존하는 곳이며, 나무 한 짐 묵직하게 진 머슴 돌쇠가 저문 강물을 바라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씻던 곳이다. 또 낮술에 불콰해진 김 생원이 비틀거리며 건너던 다리이리라. 아니 지난날은 고사하고 천년세월을 훌쩍 넘어 나를 부른 인연의 다리를 느린 걸음으로 건넌다.

 

그 다리를 답사란 명분으로 마주했고 건넜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교각사이를 빠져 나가는 물줄기처럼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돌다리는 나의 발걸음을 기억하리라, 아니 바로 물을 흘러 보내듯 아무런 흔적 없이 지우고 말지도 모른다. 아쉬움에 사진 몇 장을 담고 발길을 돌려 무심한 이별을 나눈다. 나가는 길에 인파가 물살처럼 쓸고 나간 조용한 기념관에 들려 잊지 않고 안내책자도 하나 챙긴다. 안개가 자욱하거나 함박눈이 내리는 또 다른 계절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때마침 농다리의 운치를 담은 사진작품을 전시하고 있어 눈에서 진물이 흐르도록 마음껏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였다. 귀경 길의 버스 속에서 문우들의 재잘거림이 농다리의 교각사이를 빠져나가는 물소리처럼 경쾌하고 활기차다 (2019 춘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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