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뜨덕 국"

심봉사(심창섭) 2022. 1. 11. 20:41

 촌놈의 절규

 

* 며칠 내내 빗줄기가 멈추지를 않는다.

눅눅한 장마가 추적거리며 거들먹거리는 걸음이 꽤나 지루하다. 주방에서 아내가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소리가 빗소리와 하모니를 이룬다. 아마 오늘저녁 메뉴는 뜨덕국인 듯하다. 아침에 텃밭에서 따온 애호박과 감자도 있으니 오늘같이 눅눅한 날 한 끼 음식으로 제격이리라.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질척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되는 뜨덕국은 애증의 상징적 음식이기도 하다. 언제나 허기지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 막연한 그리움이 따사한 온기로 다가온다. 지금이야 별식으로 사랑받지만 예전엔 주식의 하나였다. 둥근 두리반에 둘러앉아 뚝딱 한 양재기씩을 비워대던 서민음식의 대명사였다. 그렇게 그리움과 향수의 음식인 뜨덕국은 내게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각인된 잊지 못할 추억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이니 벌써 50년이 넘은 아득한 기억이다.

고종사촌 누님 댁 방문차 몇몇 친척들과 생전 처음 서울 행 기차에 올랐다. 흔들거리는 기차에서 차창풍경에 넋을 놓는 사이 종착역이던 성동역에 도착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전차가 도로 한가운데로 오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또 많은 차량과 인파에 눈이 휘둥그레질 틈도 없이 시발택시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차인원이 한사람 초과되었다. 택시기사의 의견에 따라 어린 나는 고모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목적지까지 가야만 했다. 그런 사연으로 서울의 첫 기억은 그저 흔들거림과 어둠 그리고 고모의 체취뿐이었다.

이튼 날 창경원 구경을 가기로 했으나 종일 끝도 없이 내리는 비로 취소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방구석에 엎드려 만화책을 부질없이 넘기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구불이 커야할 시간이 될 무렵 오늘 저녁은 수제비나 해먹자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해졌다.

수제비?

처음 들어보는 음식이름이다. 뭐지, 서울사람들이 먹는 음식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맛일까. 잔뜩 기대하며 기다리던 시간은 정말 일각이 여삼추였다. 서서히 밀려오는 어둠속에서도 빗줄기는 점점 굵어 졌지만 입에선 침샘이 더 고이기만 했다.

 

만화책도 시들해질 무렵 밥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때마다 두 번 정도는 불러야 일어나던 습관을 무시하고 한달음에 마루에 놓인 둥근 밥상으로 달려갔다. 이미 수저와 김치가 놓여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이 알루미늄 쟁반에 담겨 오고 있었다. 궁금해서 목을 빼고 들여다보았지만 김이 서린 음식은 내용을 분간하기 애매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첫인상, 한참 만에 내용물이 보이자 에이 이건 뜨덕국이잖아나도 모르게 내뱉은 불만스런 소리에 모든 시선이 일순간 내게로 쏠렸다. 그리곤 모두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영문도 모른 채 의아해하던 내게 누나는 이런 춘천촌놈, 이게 바로 수제비야, 하긴 춘천에서는 뜨덕국이라 부르지

실망이 컸겠네.........” 모두의 시선을 느끼며 먹은 그 수제비의 기억아 되살아나 혼자 피식 웃어본다. 따뜻함과 배부름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음식으로 그날의 사건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추억 의 책갈피에 간직되고 있다.

 

그랬다. 춘천에서는 수제비가 아닌 뜨덕국 또는 뜨더국으로 불리던 음식이었다.

뜨덕국과 손칼국수는 비 오는 날 점심이나 이른 저녁음식으로 온 식구가 둥근 두리반에 둘러 앉아 먹던 밀가루 음식이었다. 수제비는 밀가루 반죽을 맑은 장국 등에 적당한 크기로 떼어 넣어 익혀 먹는 아주 간단한 음식이었다. 서민과 가장 친숙한 음식 중의 하나였다. 먹을 것이 귀하던 1960년대 관청에서 주민들을 동원하여 제방공사를 시행하면서 규정량의 흙을 모으거나 나르면 밀가루를 나누어 주었다. 미국이 원조한 잉여 농산물로 4805라고 숫자로 불리던 밀가루였다. 그 밀가루 포대에는 성조기를 심벌로 가운데 악수를 하는 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게 밀가루는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하루 한 끼 밀가루음식을 먹으라는 분식의 날이 있었다. 영화관에서는 대한 뉴스를 통해 식생활 개선운동으로 분식을 장려하던 때였다.

그때 친한 사람과의 아침인사는 거의 진지(조반)드셨습니까였다. 그 만큼 먹는 문제가 생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밀가루 덕분에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식탁이 수제비, 칼국수, 빵 등으로 풍성해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만 부르면 만사 오케이 하던 시기도 잠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먹어야 했던 수제비와 칼국수에 물릴 즈음 라면이 시판되고 1970년대 초에는 통일벼가 개발되면서 우리의 식탁은 엄청난 변화를 갖게 되었다.

요즘은 우리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말로 친근함을 대신한다. 넉넉해진 인심 속에서 먹을 것이 지천이다 보니 입맛도 고급화(?)되어갔다. 퓨전음식에서 웰빙음식으로, 이어서 토종음식을 찾고 엄마 맛을 찾아 이곳저곳을 사냥하는 식도락가들이 줄을 잇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또 방송사마다 먹거리 프로로 거리엔 맛 집이 넘쳐나면서 우리의 시선과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이제 수제비는 현대의 도시인들에게 입맛 없을 때 먹는 별식일 뿐이다. 반면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음식으로 어머니 손맛의 향수를 느끼며 배고프던 옛 시절의 추억이 한데 어우러진 애증이 진득하게 녹아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수제비에 대해 너무 몰랐었다. 알고 보니 수제비는 형편 어려운 사람들이 끼니를 때우려고 대충 만들어 먹던 음식이 아니었다. 양반 댁의 잔칫상에도 오르던 요리로. 근대 초까지만 해도 양반가에서 별식으로 먹었다고 한다. 밀가루가 흔치 않아 쌀가루로 수제비를 끓였다고 한다. 쌀 수제비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추수가 끝나 쌀은 있는데 밀가루는 없으니 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쌀 수제비는 주로 농촌에서 추수철에 먹던 별미 중의 별미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영롱발어玲瓏撥魚 또는 산약발어山藥撥魚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수제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발어란 물고기가 뒤섞이는 모습을 형상화한 한자어인데 떼어 넣은 메밀반죽이 끓는 물에서 뒤엉키는 모습이 마치 물고기가 어우러지며 헤엄치는 것 같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수제비는 세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칼제비란 메뉴인데 칼국수와 수제비를 섞어서 만든 메뉴이다. 수제비라는 이름은 손을 뜻하는 수와 접는다는 의미의 접을 합쳐 수접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또 던지기 탕이라는 별칭도 있고 지역에 따라 뜨데기, 뜨더국, 뜨덕국(경기도, 강원도), 떠넌국, 띠연죽(전남), 수지비, 밀제비, 밀까리장국(경남), 다부렁죽, 벙으래기(전남 여천시, 경북 봉화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음식이다.

명칭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지난 한 세대를 지탱하게 해준 음식이기에 춘천만의 음식이 아닐지라도 추억의 음식으로 수제비를 새삼 음미해본다.

빗줄기는 끝도 없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고 뜨덕국이 익는 냄새에 먼 추억을 떠올려보는 장마철의 구수한 저녁녘이다. * [2018 문소회- 춘천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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