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칡국수를 춘천의 음식으로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춘천의 대표 먹거리인 닭갈비와 마찬가지로 칡국수 역사 또한 그리 길지 않은 근래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칡국수는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로 만든 웰빙 건강음식이다. 약간 쌉싸래한 칡 고유의 향과 매끈 쫀득한 면발의 식감이 특별하다. 특유의 맛과 향으로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유혹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의 입소문에 언론에서도 다투어 소개된 음식이다.
논밭보다 산이 많은 고장이기에 산에서 생산되는 산물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땔나무火木는 물론 재목, 나물, 열매 등과 산에 사는 동물들 또한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기름지고 영양가 넘치는 음식이 흥청대는 시대지만 특히 농어촌에서 자라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에게 소위 고향의 맛은 영원한 향수鄕愁이다. 도시 사람들은 지방색이 진득한 색다른 음식을 맛보기 위해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서기도 한다. 토속음식은 그 고장의 첫인상이자 지역을 이해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모처럼 귀향한 부랄 친구가 식상한 입맛을 벗어나 보자며 좀 맛깔 나는 메뉴를 내 놓으란다. 궁리 끝에 제시한 음식이 바로 칡 국수였다. 칡은 우리가 어린 시절 봄철이면 질겅거리며 씹어대던 주전부리 중의 하나였다. 달콤함과 쌉싸래한 맛을 가지고 있는 칡을 캐고자 이른 봄날 친구들과 괭이와 삽을 들고 가까운 야산으로 향하곤 했다.
시내에서 벗어나 구불구불한 논밭 길로 근화동 미나리꽝을 지나고 철길과 공지천 뚝방을 넘었다. 돌이켜 보니 우리가 칡을 캐던 야산이 바로 공지천 배미산과 삼천동 어린이회관 주변이었다. 꽤나 멀다고 생각한 곳이었고 무서운 짐승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겁을 먹기도 했던 곳이었다. 지금의 안보회관이 있는 언덕을 오르면서 길섶의 산딸기를 다투어 따먹기도 했다. 그곳에서 바라본 아늑했던 그때 춘천모습은 이미 사라진 옛 풍경이 되고 말았다.
칡은 콩과에 딸린 여러해살이 덩굴로 산 양지쪽에 잘 자라는 흔한 식물이다. 칡뿌리에는 많은 전분과 적당량의 당분이 있어 식용과 약용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칡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림을 해결해 주던 구황救荒식량으로 한몫을 하기도 했다. 또 잎은 사료로, 줄기는 갈포벽지의 재료로 쓴다. 아니 식품이전에 칡넝쿨은 새끼줄역할을 하는 귀중한 농자재였다.
지금은 거들떠보지 않는 흔한 천덕꾸러기 식물이지만 당시에 한약방에서 매입하여 약재로 사용했다. 농한기를 이용해 칡을 캐다가 파는 사람들이 많아 근교에서 칡을 캐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가 어쩌다 칡을 발견해도 땅속에 깊이 박혀있는 칡뿌리를 캐기는 어려웠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캐는 칡은 가느다란 숫칡에 불과했다. 굵고 녹말가루가 들어있는 암칡은 우리들 몫이 아니었다. 힘들게 캔 가느다란 칡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쯤이면 석양이 곰짓내와 대바지 강이 붉게 물들이며 춘천을 아름답게 채색하곤 했다. 한적하던 산길 주변과 강변이 행락객들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
오래전 직장인 군청 홍보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당시 관내에 특별한 음식은 물론 기인奇人 등을 발굴해 언론사에 보도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 하나의 업무였다. 구곡폭포 부근 가정집에서 칡국수를 만들어 판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아직 한 번도 먹어 본적이 없는 색다른 음식임을 직감하고 출입기자와 함께 달려갔다. 구곡폭포로 가는 길의 봉화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작고 허름한 일반 가정집이었다.
정식 음식점이 아니기에 번듯한 식탁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앉은뱅이 둥근상[두리반]에 열무김치와 국수가 전부였다. 기대 속에서 초면의 음식을 음미하며 주인의 사연을 들었다.
농한기에는 주변의 검봉산과 봉화산에서 캐낸 칡을 한약방에 팔아 생활에 보태었다고 했다. 어느 해인가 잔뜩 모은 칡을 팔려고 했으나 공급과잉으로 값이 떨어진 것은 고사하고 매입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분할 방법을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국수였다. 칡을 절구에 빻아 물에 담가 두면 하얀 녹말이 가라앉는다. 몇 번 윗물을 흘려버리고 가라앉은 가루가 칡 녹말이었다. 이 녹말에 밀가루를 50:50 정도로 섞어 국수를 만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먹을 만했다. 이것이 칡국수 탄생비화였다.
처음부터 팔기위해 칡 국수를 만든 건 아니었다. 그저 밀가루 대용으로 가끔 활용했다고 한다. 이 별식을 먹어본 이웃들의 권유와 등산로 입구라는 조건으로 우연히 국수를 맛본 등산객들의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루 서너 그릇을 팔던 칡 국수는 서서히 입소문이 났고 언론홍보로 인해 정식 국수집으로 운영하고 소문이 나게 되었다.
문헌기록을 찾아보니 칡을 이용한 음식이 꽤나 오랜 역사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우리가 칡을 먹게 된 과정이 나온다. 세종 때 가뭄대책을 논의하던 중 “왜인들은 칡뿌리를 먹는데 이것을 이용하면 흉년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한다. 이 말을 들은 세종이 윤인보를 경상도로, 윤인소를 전라도와 충청도로 보내 칡뿌리 먹는 방법을 알리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흉년에 대비해 칡뿌리 식용 법을 보급했지만 널리 퍼지지는 못한 모양이다.
성종 때 또다시 가뭄이 들자 이번에는 문신 한명회가 칡뿌리 식용화를 제안했다.
“왜인들은 칡을 먹는다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칡뿌리를 캐어 먹는 자가 있다고 하니 칡뿌리를 시험하여 먹을 만하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기근에 대비하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이듬해 또 큰 가뭄이 들자 한명회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시식을 한 뒤 “지금 조선 팔도에 가뭄이 들어 왜인들이 칡뿌리를 먹는다고 하기에 시험 삼아 칡뿌리를 캐다가 껍질을 벗기고 말려서 가루로 만든 후 쌀 싸라기와 섞어 죽을 끓여 먹어보니 배를 채울 만했습니다.”
이렇게 칡뿌리를 비상식량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이렇게 세종 때부터 시작돼 성종 무렵까지 이어져 왔다. 당시에 만든 음식이 국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칡을 이용한 음식이 탄생하게 되었다.
결국 이집이 칡국수의 원조는 아니지만 잊힌 아니 뒤안길에 있던 전통음식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대다수가 산업화되면서 예전처럼 칡을 직접 캐고 녹말을 내어 손국수를 만드는 게 아닌 인스턴트 칡국수가 등장하게 된다. 칡국수가 흔해진 반면에 본래의 맛을 보기가 더 힘들어 졌다, 본래의 아날로그적 맛을 보려면 원조 집을 찾는 수고로움이 뒤따라야 한다.
칡국수는 만드는 과정에 인내심과 정성이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음식이다. 깨끗이 손질한 칡뿌리를 잘게 토막 내 절구에 찧은 다음 발이 고운 소쿠리에 받쳐놓고 물로 여러 번 씻어 내린다. 한나절쯤 지나면 전분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위에 고여 있는 물은 쏟아내고 다시 맑은 물로 몇 차례 더 갈아주기를 반복하면 가라앉은 하얀 가루가 바로 칡 전분이다. 여기에 밀가루를 적당히 섞어 반죽한 다음 칼국수처럼 만들거나 국수틀로 눌러 국수를 만든다.
칡향기가 은은한 칡국수는 막국수와 색갈이나 외형이 비슷하지만 맛이나 식감이 전혀 다르다. 칡향기가 강하게 나야 제대로 된 칡국수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짙은 향이 난다면 오히려 의심을 해야 한다. 밀가루를 섞는 것은 너무 강한 찰기를 다소 약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칡국수가 여름철 별미로 꼽히는 건 아마 칡의 찬 성질이 한몫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본초강목》에서 칡은 해독작용과 열을 내려주기 때문에 더위를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무더운 여름철에 딱 어울리는 음식이다.
촌부가 고향을 지키며 마을에 전해오는 칡 국수를 만들었다는 감동보다도 일단 맛이 있었다. 칡 향기가 입안에 은은하게 퍼지는 뒷맛이 일품이다. 약간 미끈하고 쫀득한 식감도 좋았다. 또 칡국수 뿐만 아니라 곁 음식으로 먹은 칡전(부침개)도 별미이다.
칡부침,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곁들이자 식도락가를 자처하는 친구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흘렀다. 나 또한 즐거운 하루였다. * [2018 문서총서- 춘천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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