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심창섭
* 기억의 뒤안길에서 가물거리던 실타래가 풀려나온다.
완전히 잊혀진줄 알았던 시간의 흔적이 한 올의 끄나풀을 당기자 술술 이어진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일까. 그리고 기억량은 얼마나될까. 나이가 들면서 어제 일도 아니 잠시전의 일도 깜박하는 건망증 증세로 가끔씩 곤혹을 치룬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점에 대한 사건이 마치 컴퓨터의 팝업창처럼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조차 할 수없었던 시간들이 아주 작은 계기로 인해 그 사람의 이름은 물론 날자나 시간까지 또렷하게 떠올라 스스로 깜짝 놀라게 하는 기억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요즈음 TV에서 “친구야 반갑다"(friends)라는 프로그램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인기연예인들이 20~40여 년 전의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장면이다. 소위 소꿉친구 또는 부랄 친구라 부르는 친구들. 어린시절 과거의 시간들을 함께 했거나 철없던 시절의 순수를 함께했으나 삶이라는 언덕에 가려 잊혀지거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나온다.
당사자인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사건을 이름조차 낯선 친구가 어쩌면 그리도 어제 일처럼 정확히 그려대는지 의아해 하면서도 손바닥을 치고, 무릎을 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철없던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물론 감추고 싶었던 부끄러운 행태까지 모조리 드러나는 대본 없는 대사야 말로 백미중의 백미이다. 아득한 기억 속에서 소년과 소녀였던 친구들이 이제는 머리가 벗겨지고 불룩 나온 아랫배를 흔들어대 누가누군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빗나가 옥석을 가리듯 친구를 가려내는 모습이야말로 행복지수의 정점이다. 더욱 초등학교 졸업앨범에서 뽑아낸 순수한 옛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세월이 흘러가도 어딘가 한두 군데 남아있는 옛 모습과 잔상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아주 쏠쏠하다.
유명스타들의 어린시절부터 남다르게 끼있던 행동들이 있었는가 하면 아무도 주시하지 않던 평범한 어린이가 부단한 노력으로 스타가 되기까지의 힘든여정은 삶의 지표를 삼을 만 하다.
또한 친구들의 외형을 통해서도 그동안의 삶이 순조로웠는지 버거웠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을 정도로 삶의 흔적과 굴곡이 비춰지기도 한다.
완전히 잊혀져 하나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억력을 소생시켜주는 과거의 작은 흔적들. 마치 옛 책갈피를 들추었을때 불쑥 나타난 네잎 클로버와 은행잎 등을 통해 재생되고 복원되는 파일들. 기억을 지워버린 적이 없었기에 새록새록 피어나는 잔상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45년 만에 처음으로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200여명의 졸업생 가운데 연락이 닿은 40여명이 모여들었다. 얼굴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생소한 것 같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오랜시간의 공백도 우리들을 갈라놓지 못했다. 정말 많이들 변했다.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은데 모두들 나이테 같은 주름살과 하얀 머리카락도 잊지 않고 가지고들 나왔다. 옛 친구들의 변해버린 모습들을 거울처럼 마주한다. 대화는 어린시절로 돌아간다. 내가 좋아하던 순이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몰려온다. 그 시절의 배고픔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피어난 코 찔찔이의 추억이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고 윤색된다. 처음의 서먹함은 술잔이 몇 순배 돌자 사라져 버린다. 웬 보따리들이 그리도 많은지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노숙함을 갖춘 여자친구들에게는 말을 함부로 하기가 어렵다. 세월의 두께를 한 겹 더 포장한 것 같은 당당함과 자신감이 느껴진다. 점점 목소리들이 커진다. 아줌마의 힘인가.
그 시끌벅적한 와중에서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친구들의 부음소식을 듣는다. 잠시 숙연해진 분위기를 추스르며 술잔이 돌고 돈다. 술잔이 부딪친다. 서먹하던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우린 완전한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
체면이나 위선도 벗어 던진다. 싸움을 잘하던 친구와 공부를 잘해 반장을 하던 친구들은 그시절 행동을 은연중에 부각시켜도 조금도 유치하지가 않았다. 화면에 반짝거리는 반점이 연속되는 무성 활동영화처럼 우리들의 우정은 과거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누가 가지고 왔는지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돌고 있었다. 색상이 변해 황색이 된 32절크기의 흑백사진의 위력은 대단했다. 졸업앨범도 없던 우리에게 이 사진은 서로를 확인한는 유일한 기록물이었다. 졸업사진 조차 살 수 없었던 나와 몇몇의 친구들에게 이 사진은 환상 그 자체였다. 누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얼굴이 작게 나왔지만 사진 안에서 내 모습을 쉽게 발견한다. 순간 호흡이 멈춰진다. 상구머리를 한 나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흑과 백의 갈피사이에 소리 없이 묻혀있는 시간의 뒤안길이 손에 잡힐 듯 어른거린다. 친구들도, 술잔도 잊어버린채 나는 순간적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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