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가출
심창섭
아내가 훌쩍 집을 떠났다
20여 년간의 결혼생활, 중년여인에게 그 무섭다는 우울증까지 억척스럽게 견디어낸 아내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만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집안의 온기마저 함께 빠져나갔는지 을씨년스러움에 자꾸 헛기침이 나고 헛헛한 갈증에 입술이 마름을 느낀다.
텅 비어버린 듯 한 아파트의 빈 공간 속에서 아내의 자리를 곱씹어 본다, 처음 며칠간은 마치 고삐를 벗어던진 한 마리 망아지가 되어 신나게 들판을 돌아치며 자유, 자유를 만끽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를 불러내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기울여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간이었다. 불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잔소리가 아름다운 화음이었을 거라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평소 잔소리하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화가 그립기만하다, 주인 잃은 텅 빈 침대에서도, 아내의 뒷모습이 실루엣으로 고정되어있던 주방의 창가에도 체취가 머물고 있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텔레비전 연속극 “아내가 뿔났다”가 빌미를 제공한 걸까? 시부 그리고 아들 내외와 손자 그리고 시누이까지 한집에서 생활하던 전통가족의 이야기였다. 그 전형적인 한국형 주부가 불쑥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 싶다며 가족회의를 통해 1년간의 장기휴가를 떠난다. 같은 도시 내에 방을 얻고 자유를 만끽한다.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도 보고 화병에 꽃을 장식하기도 한다. 가족과 생활에 얽매어 할 수 없었던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응어리를 풀어가는 내용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라며 우리나라 연속극의 수준까지 들먹거렸는데도 아내는 연속극의 주인공처럼 훌훌 떠남을 시도하였다.
대한민국의 주부들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고3짜리,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아들을 둔 엄마가 그렇게 떠났다. 대학생 딸내미와 하늘같은 남편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을 꾸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물론 가족회의라는 민주주의적이고 합법적인 모양을 갖춘 상태에서 결정되기는 했지만, 아내의 확고한 의지 앞에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막상 그녀가 떠나고 나니 긴장감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들놈의 아토피 피부염 증세로 멀쩡한 세탁기조차 사용할 수 없는 현실, 고3이라 밤 1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벗어던진 교복의 손빨래를 숙제처럼 해야 만 했다. 물론 딸내미가 나름대로 역할을 하며 애쓰는 모습이 보였지만 아내의 부재를 메울 수는 없었다. 스위치만 누르면 해결되는 가전제품들이 있어 한시적인 홀아비로 살아가기엔 물리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 나머지 부분에서는 도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떠난 뒤의 다가올 어려움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그동안 가족의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한 아내에게 그것도 관광이 아닌 공부를 하겠다는 그 의지를 향해 손사래를 칠 용기는 더욱 없는 형편이었다.
학창시절 운동으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여건을 늘 아쉬워했던 그녀였다. 오직 남편과 아이들만을 바라보며 좌우를 둘러볼 틈도 없이 평범한 주부로서의 행복을 자위하던 그녀의 변화는 지난 몇 년간 지역문화 단체의 주부대상 프로그램에서 시작되었다.
새벽녘 작은 기척에 잠을 깨면 그때까지 책상 앞에서 돋보기를 쓰고 영어사전을 뒤척이는 아내를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돋보기, 그래 아내도 어느덧 안경 없이 작은 글씨를 마주할 수 있는 청춘이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여기저기에서 암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잠 못 이루게 하는 원천은 무엇일까. 정말이지 늦바람이 무섭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적극성과 결단력이 너무 부럽기만 하다. 정년퇴직이라는 그물에 걸려 뭍으로 밀려 나온 나와는 달리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6개월 동안의 가방이 묵직했다. 공항을 빠져나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오는 차창 가로 떠오른 비행기가 장남감처럼 작아지더니 끝내는 점 하나로 아른거리며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구름 몇 점. 점점이 외로운 허공을 뒤로 한다
다행히 철부지로만 알았던 딸내미가 스스로 집안일을 거들어 주었다.
나 역시 처음에는 애들에게 측은지심이 들어 가능하면 따스한 밥으로 등교를 시키곤 했는데 이것도 두어 달이 지나면서 초심을 잃어갔다. 점점 귀찮아 지기 시작하였다. 김치찌개와 라면 끓이기를 주 무기로 하던 내가 매일 다른 반찬을 해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음식을 만들 때마다 지인들에게 묻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간단해 보이던 콩나물국조차 비린내로 냄비를 가득 채우기만 했다. 가능하면 먹지 말자던 인스턴트 음식으로 때우는 빈도가 높아졌다. 그나마 아내의 부재중에 내게 구세주가 있었으니 바로 인터넷이었다. 고심 끝에 인간성이란 없는 기계라고 늘 괄시하며 천대하던 인터넷을 열고 음식을 만들거나 가사에 어려운 일이 부딪칠 때마다 조언을 받았다. 아니 의존하다시피 하였다. 친절하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지시한대로 따르면 해결이 되곤 했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나면 집안은 순간적으로 정적이 몰려온다. 가끔씩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소리와 멀리서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들려온다. 느닷없이 정적을 깨우는 이동 잡상인들이 반복적으로 울리는 확성기 소리에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가 있었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고마울 뿐이다. 커피 물을 올린다. 한 방울씩 떨어지는 원두커피 향이 거실을 감싸면 비로소 안도감이 온다.
아내의 아침 또한 이렇게 시작했으리라. 문득! 그녀가 그리워 컴퓨터를 켠다.
전화로는 할 수 없던 단어를 메일을 통해 퍼질러 놓아야겠다. 첫 줄은 “그래 우리를 버리고 혼자서 행복하니?” 라고 투정부리며 시작하지만 마지막 행은 결국 이렇게 쓰고 만다.
여보! 언제 돌아와. 정말보고 시프다.
사랑하는 남펴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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