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 팔불출(八不出)

심봉사(심창섭) 2010. 4. 22. 17:25

 

 

팔불출(八不出)

 

심 창 섭

 

* “아빠! 왜 사이다만 먹으면 코에서 비가와? ”

하며 턱 앞에서 크고 초롱한 눈망울을 꿈벅이던 막내녀석이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열흘에 한번씩 주는 1,000원의 용돈으로 올해 어버이날엔 제 엄마에게 8,000원의 거금을 주고 산 빨간 카네이션 꽃다발을 안겨 아내를 놀라게 했다. 또 중학교 1학년인 딸 놈도 지 엄마의 생일에 거의 1년치의 용돈을 투자해 화장품 선물을 할 줄도 아는 아이가 되었다. 이제는 불쑥 커버린 이 녀석들의 성화때문에 이젠 가족들의 기념일을 꼭 챙길 수밖에 없는 자상한 아빠이자 멋진남편(?)이 되고 말았다.

벌써 몇 년전의 일이다.

늘- 그러하듯 늦잠에서 깨어나 눈비비고 앉는 아침식탁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고정반찬 몇 가지와 기지개.

밥맛이 있을 리 없다. 평소처럼 밥 반공기를 국에 말아 겨우 비우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 동료들과 술 한잔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아내는 자고 있었다. 늦은시간도 아니였지만 평소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먼저 잠자리에 드는 법이 없던 아내인지라 의아해 하며 혹시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닌가해서 아내의 이마에 살며시 손을 얻었다. 순간. 손을 냅다 뿌리치며 말도 없이 등을 돌리고 돌아 누어버린다. 이크! 이거 무슨 일이 있구나. 살짝 밖으로 나와  처형에게,  또 처남에게도 전화를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도대체 알 수 조차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TV도 못켜고 안절부절하다가

밥이라도 해야할것 같아 주방으로 가니 싱크대 위에 주등이가 뜯긴 미역봉투가 딩굴고 있었다. 아차! 오늘 아침에 미역국을 보고 "누구 생일이야"라고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부리나케 탁상 달력을 보니 오늘날자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고 하단에는 아내생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날이 바로 아내의 생일날일 줄이야. 결혼 후 아내의 생일을 한번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남편에게 던진 무언의 시위였다.

 

그녀의 등뒤로 흐르던 쓸쓸함.

아내는 그때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자신의 생일날 아침 미역국을 비우면서도 그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의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아이들의 생일은 그리 잘 기억하면서도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습관성 건망증세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친척집에서 성장하다 청년기부터 혼자 생활하던 나에게 생일과 명절의 의미는 늘 아픈 기억뿐이었다. 남들이 흥청거리는 명절날이면 오히려 갈곳이 없는 미아가 되었고 닫아버린 식당을 원망하며 골방에서 숙명처럼 라면봉투를 뜯던 기억이 되살아 날뿐이었다. 어느때는 달력을 넘기다 날자가 훨씬 지나쳐 버린 자신의 생일날을 보고 혼자서 허허로이 웃어버리던 씁쓰름한 기억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기념일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매년 한번씩 정기적으로 오는 하루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도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는 즈믄해라며 전 세계가 들끓었지만 그날의 아침도 어제와 다른 점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어제와 똑같이 아침해는 대룡산 허리를 뚫고 태양이 솟아올랐으며 저녁엔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삼악산 뒤편으로 숨어버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게도 잊지 못할 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 가장 깊게 각인된 날은 어머님의 기일(忌日)이다. 새색시인 아내가 처음으로 맞는 시어머니의 제사일. 제수를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 모르겠다면 서도 이틀동안 혼자서 정성으로 젯상을 기득채웠다. 그 젯상 앞에 엎드려 나는 비로소 아들이 되었고 불효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 동안 냉수 한 그릇만 떠놓고 죄스러워 하던 긴 시간들. 조율이시, 좌포우혜, 지방과 축문까지 격식을 갖춘 후 무릎꿇고  엎드려 제주(祭酒)를 올릴 때 그렇게도 주체하지 못하게 흐르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동안 조상 님들께 한번도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못난 후손으로서의 부끄러움만은 아니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그렇게도 죄스럽던 마음이 순간에 해소되는 정말이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리곤 이렇게 제례를 치를수 있도록 계기가 된 아내에게 정말 잘해주어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던 그 날이야 말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였는지. 유교적 사상의 불효에서 벗어난 홀가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기일이 돌아오면 나는 작은 흥분과 아내에 대한 감사함과 고마움에 늘 어쩔줄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내의 생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에는 쑥스러운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연애와 결혼경력 20여년 동안 아내의 생일을 챙겨본 것은 겨우 두 번쯤에 불과하다. 이제야 아이들이 성장하여 미리 챙겨주는 바람에 잊어버릴 일이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다거나 무관심은 아니었다.

어느 해 이던가 한번쯤은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야겠다며 이벤트를 준비했다가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 있었다. 모든 건 아내의 생일날자에서 비롯되었다. 아내의 생일은 주민등록상 날자와 실제 생일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양력이 아닌 음력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내의 진짜 생일은 외우기도 편하게 2월 2일이다. 새해의 업무일지를 받으면 첫 번째로 집안의 기념일로 공간을 메우는 것이 습관이었다. 2월 2일을 찾아 “아내생일”이라 그게 써넣고 마치 도박꾼처럼 2땡, 2땡하며 외워나갔다.

정성이 지극했는지 결혼후 처음으로 아내의 생일날을 기억할 수 있었다. 아침에

축하의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저녁의 이벤트를 위해 아무 것도 모른척하며 출근을 했다.

지루하게 퇴근시간을 기다리다 한 다발의 꽃다발과 케이크를 준비했다.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가는게 매우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감격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싶은 모처럼의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감에 몸이 떨려왔다. 어떤 말을 하며 꽃다발을 건네야 할지를 궁리하며 가족들과 함께 축하외식 장소를 걱정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문을 열고 아무 소리 없이 환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건너는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의아한 표정엔 “이 이가 미쳤나?”라는 활자가 떠올랐다.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2땡 2땡하며 외운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숫자에만 연연하다보니 2월 2일을 22일로 착각했던 것이다. 20일이 지난 후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안기고 호들갑을 떠는 남편의 모습이 얼마나 코믹했을까.

미안스럽고 부끄러웠지만 웃으면서 케이크를 자르며 나름대로의 애정을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자신의 생일날이 되면 내게는 평소 갖고 싶었던 선물을 사달라고 조르면서도 제 엄마에게는 꼭 선물을 준비한다. 생일이란 새 생명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있는 날이지만 출산의 고통을 감내하신 어머니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아내의 교육덕분이다. 출산의 생체적 리듬 때문인지 아이들의 생일날이 되면 꼭 몸이 찌뿌등 하고 아프다는 아내. 어머니 이기에 앞서 여자라는 동질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생일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장모님을 찾던 아내였다. 내가 태어난 기쁨보다 어머니의 아픔을 생각하게 하는 아내의 교육방법은 개인주의 팽배로 자기만을 아는 아이들에게 평생의 좌표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놈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도 이러한 행위가 지속되고 그 자녀들에게도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구시대적인 발상에 불과한 과욕일까.?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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