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유감(父情有感)
심 창 섭
*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다.
아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숨죽이며 흐느끼는지, 고통이나 수치감을 삭히는지 가끔씩 이불이 들썩거리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인다. 냉수를 한잔 들이키고 창밖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다보니 흥분된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어온다. 아이방문을 닫아주고 돌아서는 순간 거실벽면에 장식품처럼 걸려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저것이 있었는데.........”
재작년쯤인가,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들의 훈육을 위해 “사랑의 매”로 사다놓은 죽비였다. 불가에서 좌선 시 수행자의 졸음이나 자세 등을 지도하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란다. 대나무 제품으로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이지만 벌어진 두면이 극과 극을 분명하게 가르고 부딪칠 때마다 짝! 하는 경쾌하면서도 둔탁한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가는 회초리의 매서운 아픔이 아닌 효과음만으로도 훈계도구로서의 역할과 외형상 좋은 부모라는 품격이 느껴지기에 구입했던 물건이다. 체벌이 자연스럽게 인정되는 유교 중심적 사회에서 성장한 나 역시 초․중학교 때 잘못을 저지르면 선생님께 맞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스승이 제자의 바지를 걷게하고 회초리를 치는 김홍도의 그림을 미풍양속으로 알았고, 스승이나 부모 또는 연장자에게 복종과 순종은 당연한 미덕으로 알았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사회적 현실은 자율성과 창의성이 우선되는 시대가 아닌가.
아이는 TV시청이나 컴퓨터를 할때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갖다가도 책상에 앉기만 하면 30분도 못되어 졸거나 딴청을 하였다. 가능한 손찌검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회초리보다는 품위가 있어 보였다.
호통을 치기 전에 죽비로 소리를 내거나 등을 두드리면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또 화가 났을 때 손바닥을 내밀게 하고 손바닥을 때려 아이에게 정신적 수치감을 느끼게 하는 방법도 썼다. 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나름대로의 규율에 적응하여 불과 서너번 사용 후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회초리는 교육의 상승효과와 올바른 인간을 만들기 위한 “사랑의 매”였는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구입해 놓은 죽비를 두고서도 순간적인 흥분에 손찌검을 하고 말았음이 너무나도 부끄러울 뿐이다.
언제나 격한 감정은 동물적인 행동을 유발한다. 숨죽이며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감정을 삭히고 있는 아이의 마음을 훔쳐본다. 마음이 아프다. 조금만 더 참을걸. 아이는 육체의 아픔보다 감정이 많이 상했으리라. 죽비를 사용해야 했어야 했는데......
콩나물처럼 키 자라 이젠 발돋음을 하고 고개를 쳐들어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아이. 아직 성인으로 대할 수는 없지만 이젠 힘으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이가 내게 굴복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혈육의 끈 때문이었을까. 나이가 많아 설까. 아니면 아직은 경제권이 없는 자신의 보호자로서 어쩔 수 없는 관계 때문일까. 폭력의 순간 아이는 어떤 감정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있었을까.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지금도 TV에서 모정에 대한 프로를 볼 때마다 돌아서서 눈물을 훔쳐내는 이 아빠의 마음을 너는 모르리라. 부모사랑의 작은 편린조차 기억할 수 없는 성장기를 보낸 비애를 너는 모르리라. 누구보다 좋은 아빠가 되고자 필요이상의 채찍질도 마다않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가슴아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매가 필요할 때는 매를 들어야한다는 옛말도 있지만 나는 오늘 매를 든 것이 아닌 감정을 분출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입장에서 계량한 잣대로, 유교적인 사고로, 구시대적인 시각에서 아이들을 다루려는 자신의 가정교육이 바른 것이라고 확신은 서지 않지만 아직도 틀린 방법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내가 아이에게 손찌검을 할만 큼 모범적 행동해 왔는지 자성의 시간을 갖는다. 한해 한해가 흐를 때마다 나태해지고 게으르며 무력해지는 가슴을 향해 죽비를 가만히 두드려 본다.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그 울림이 가슴안쪽으로 밀려든다. 좀더 참았어야 했는데........
아픔이 아닌 부끄러움의 물결이 밀려온다. 날이 밝으면 정식으로 아이에게 사과하리라. 올바름을 포장한 아빠의 거친 행동이 부끄러웠다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홀로서기를 익혀야 된다고 말하리라.
다시한번 죽비로 손바닥을 쳐본다. 죽비소리가 꽃잎처럼 날린다. 청량한 죽비 향이 거실을 감싸며 흩어진다. 사랑의 매는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죽비를 살며시 벽에 걸어 놓는다. 죽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 모습으로 돌아간다. 꽤나 뒤척이는 긴 밤이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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