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일상
심창섭
오늘도 어제처럼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밤새 어깨를 맞대고도 모자라 통로까지 넘쳐나던 차량들이 약속이나 한 듯 꼬리를 물고 쫓기듯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겨울방학 기간인데도 밖에서 노는 아이들조차 없는 도시의 아파트 주차장.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여기저기에 이 빠진 모습으로 군데군데 몇대씩 남아있는 차량들. 저기 저쪽 구석에 남아있는 내 차가 오늘따라 작아만 보인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사무실에서 습관적으로 여직원이 타주는 아침 커피를 마시며 일과를 시작했는데.....
전화기, 컴퓨터 자판, 그리고 프린트기에서 쏟아내던 그 소음이 그립다.
싸 아~ 하며 한줄기 바람이 가슴을 흔들며 지나친다.
창밖을 바라보는 내 등이 고독해 보였는지 아내가 커피잔을 내민다. 적막감이 싫어 습관적으로 켜놓는 라디오에서 비발디의 “봄”이 흐르고 있다. 베란다의 녹색화초위로 늦겨울의 말간 햇살이 봄의 전령사처럼 반짝인다. 감미로운 커피 향과 따뜻한 커피 잔의 체온에 한결 마음을 풀린다. 소위 다방커피의 대명사인 설탕 둘에 프림 하나이던 커피 취향이 언젠가 프림커피로 변했고 요즈음은 아내의 미각에 따라 아메리칸 스타일로 길들어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커피가 없었다면 우리생활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모여들던 자판기 주변. 차를 나누며 풀어버리던 그 많은 스트레스들. 그리고 잠시잠시의 여유로움. 밀크커피, 설탕커피, 프림커피, 블랙커피, 그리고 우리 차. 동전 몇 닢만 밀어 넣으면 미련없이 토해내던 직장의 종이컵 진한커피맛이 그립게 떠오르는 시간이다.
“남자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야 한다.”
지금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예전엔 당연시된 생활 속의 규율(?)이었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남자였기에 이 원칙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오다 정년이라는 세속의 틀에 밀려 고단했던 바깥 나들이를 마무리 했다.
행복했다. 의무감과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 큰일을 마친 여유로움에 한 동안 난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등산, 낚시, 사진촬영 등 시간을 핑계로 실행하지 못했던 숙제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술자리에서도 상사를 안주삼지 않아도 되었고 출근 걱정 없이 술잔을 채우며 희희낙락했다.
오매불망 그렇게도 기다려지던 일요일이 연속되고 있어 마음 놓고 늦잠을 즐기기도 하였다. 건네줄 명함이 없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한 동안 남들이 힘들게 일하는 근무시간에도 유유히 거리를 활보했고 사우나에서, 헬스장에서 땀을 빼면서 유유자적하기도 했다. 정말 한 동안은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바라며 행복에 겨워했다. 정말 한 동안은.................
그런데 자유인이 되자 호사다마랄까 노인성 증상이 불쑥 다가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9시 뉴스를 끝까지 시청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초저녁 잠에 목이 꺽이는가 하면 먼동이 트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억지로 눈을 감고 견디기도 고통이다. 곤히 잠든 아내를 위해 까치발로 안방문을 연다. 아직도 거실 밖은 가로등이 외롭게 불을 밝히고 가끔씩 두 눈을 부릅뜬 차량들이 질주하는 매일 똑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잠 못이루는 사람을 위해 24시간 내내 잠자지 않는 TV채널이 있다는데 여간 다행스럽다. 눈도 점점 침침해저 또 한 도수 높아진 돋보기를 코끝에 걸고 잉크 냄새풍기며 새벽같이 도착한 조간신문을 펼친다. 사회면 정치면 문화면 신문 구석구석은 물론 전단지까지 열독하다보면 동편하늘이 서서히 깨어난다.
퇴직한지 겨우 일 년, 아직도 혈기왕성하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것 같은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왜 이리도 허전한 걸까.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조바심이 인다. 금전인력(?)에 의해 썰물과 밀물처럼 직장과 집을 오가던 체질화된 생체리듬에 몸이 뒤틀린다. 출근하지 않는 남자. 시간만 되면 습관처럼 여닫던 현관문도 함께 침묵한다.
갈 곳이 없다는 공간개념의 지향성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만 같던 그 많은 일들이, 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현실이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오늘도 어제처럼 해가 뜨고 저물고 또 내일도 이와 같을진데.....
놀고먹는 행위가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긴장감이 풀려 오늘이 달력의 어느 쯤에 있는지 요일과 날자에 대한 기억력이 무뎌진다. 초청장을 받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서야 급한 외출준비에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또 몇 번인가 외출 시에 습관적으로 들어서던 예전의 출근길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핸들을 돌릴 때 다가오던 허무감은 무엇이었던가.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잊지 않고 불러주는 지인들이 있어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 지독한 습관성질환의 미열을 달래고 있다.
오늘아침 전화 벨소리가 기다려진다.
남자는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야 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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