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나무
沈昌燮
“에이! 그놈의 동백꽃 때문에......”
점심시간, 커피자판기 앞에서 애꿎은 일회용 종이컵을 구겨 던지며 함대리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투덜댄다. 함께 커피를 마시던 직원들이 씨-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속칭 배춧잎으로 불리는 만원권 다섯 장씩을 전해준다. 어제 생각지도 않게 마련되었던 환영식 부담금이다.
지난 2월말쯤부터 3월의 문화인물이라며 여기저기에 포스터가 나붙고 연극공연이다, 강연회다, 하며 신문방송에서 분위기를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단편소설의 선구자” “무지개처럼 나타났다 혜성처럼 사라진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우리고장 출신 문인 김유정을 기리는 행사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중 김유정의 대표작인 동백꽃이 화두에 올랐다. 아니 작품 이야기가 아닌 동백꽃의 색깔 때문이었다. 동백꽃이 빨간색이라고 우기는 염 차장과 노란색이라고 우기던 함 대리가 입씨름 끝에 진 사람이 술값을 내기로 하고 술집으로 향했다. 이곳 춘천에서 태어나 33년동안 한번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토박이 함대리와 불과 8개월전 본사에서 낙하산 인사로 승진과 함께 내려온 염차장간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두사람의 결투(?)에 쾌재를
부른건 그를 제외한 기획실 직원 모두였다. 결국 5대 1의 싸움이었다.
사실 염차장이 이곳으로 전근해 오기 몇 달 전 사내등반대회가 있었다. 등산은
춘천의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652m의 금병산이었다. 산행은 김유정의 외가가
있던 학곡리 원창고개 마루에서 출발했다. 김유정의 소설 속 무대였던 문학지를
돌아보며 그의 생가 터가 있는 실레마을로 하산하는 2시간 코스의 등반이었다.
그때 문학소녀처럼 늘- 시집을 품에 안고 다니는 미스 정이 노란 꽃이 핀 꽃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으며 “이게 무슨 꽃인지 아세요, 이 꽃명을 맞추시면 제가 오늘 커피살께요.” 하자 자기네 집 넓은 정원과 꽃나무 자랑에 항상 침이 마르던 김 대리가 나선다. “음~ 이 꽃은 봄의 전령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산수화지” 하며 자신있게
말한다.
정말이지 그 꽃은 박태기와 함께 이른 봄 정원에서 제일먼저 노란색 꽃을 피우는 산유화 같았다. 모두들 그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긍정을 하자 “아니에요” 정색을
하는 미스 정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맑게 구른다. “정답을 아시는 분이 없는 것 같네요. 제가 답을 알려드리는 대신 커피는 다른 분이 사주셔야 해요” "바로 이 꽃이
동백꽃이야요, 김유정의 소설 속에 나오는 “동백꽃”말이에요," 하며 하산길 내내 그의 소설이야기로 관심을 끌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가 엊그제 일같이 생생한데 동백꽃이 빨간색이라고 우기는 염 차장이 가소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냄새를 풍기며 은연중에 엘리트임을 과시해 오던 염 차장이었다. 그뿐 만아니라 분기별로 실시되는 사원평가 때마다 높은 점수로 동료들을 주눅 들게 했던 속칭 KS출신인 염 차장과의 싸움이었기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더더구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승자의 입장에서 전혀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었기에 실장님과 약혼자와 선약이 있던 미스 정을 제외한 6명 전원이 참여했다. 모두 신이 났다. 낄낄거리며 브라보! 를 외쳐대며 술잔을 계속 비워댔다. 술맛 중에 제일은 공짜 술이라더니 술맛은 정말 기가 막혔다. 돌아가며 목이 쉬도록 노래까지 불러댔다. 그렇지 않아도 일주일 내내 골치 아픈 프로젝트 계획으로 연이어지던 야근에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른 때는 술을 별로 마시지 않던 유 대리까지 신나게 마셔댄다. 기분 좋게 취한
유 대리가 “자! 이 정도에서 이별장을 가져오시지” 하자 지배인이 기다렸다는 듯
얼른 계산서를 가져온다. 총액 이십오 만원이다. 한사람이 부담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액수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돈낼 사람이 따로 있으니 마음이 너무 편하다.
처음 약속했던 대로 염 차장과 함 대리가 공동으로 사인을 했다. 술값은 진 사람의 월급에서 공제하면 되니까 계산서가 넘치도록 사인들이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정말이지 신나는 봄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좋았던 기분이 월급날인 바로 오늘 산산 조각이 나고 말았다. 술값을 낼 사람을 가리기 위해 함대리는 미스 정을 내세웠고, 염차장은 책한 권을 가지고 나왔다. “염 차장님이 지셨어요. 김유정의
동백꽃은 노란색이 맞거든요” 오히려 미스 정이 죄송스럽다는 듯 다소곳하게 말을 한다.
순간 염 차장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도는 듯싶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을 펼친다. 원색식물도감이다. 미리 접어놓았던지 한번에 노란 꽃이 활짝 피어있는 사진이 보인다. 이미 봄이 무르익어 초여름을 달리고 있었지만 책갈피에서는 샛노란 동백꽃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알싸한 생감냄새가 피어나는 듯 했다. 염 차장이 의아해하는 분위기를 의식한 듯 헛기침을 한 뒤 조용히 말문을 연다. “ 바로 이 꽃이 여러분들이 말했던 노란 꽃입니다. 이 수종은 여기 적혀있는대로 녹나무과의 생강나무입니다.” 단호한 어조로 결정을 내리는 듯하자, 순간 모든 시선이 미스 정에게로 향한다. 미스 정이 뭔가 한마디를 하려는 순간 “그러나 일명 동백나무 또는 동박나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서로 마주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염 차장의 말이 이어진다.
“사실 김유정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니 존경하는 문인중의 한 분입니다. 중학교 시절 그의 소설을 교과서보다 사랑했고 필독했던 문예반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지고 있던 책자중 동백꽃이라는 제명아래 그려 논 표지화는 붉은 동백, 즉 후피향나무과의 상록수인 동백화(冬栢花)였습니다. 노란색과 붉은색, 봄꽃과 겨울 꽃, 내가 알고 있는 동백과 소설속의 동백 때문에 혼돈이 왔고 그래서 이 식물도감까지 구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염차장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이곳으로 온지도 벌써 여덟 달이 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늘 객석에 앉아 있는 구경꾼 같은 기분으로 지내오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외로웠습니다. 업무이외에는 여러분과 한번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문화인물로 김유정이 선정되어 자연스럽게 이런 자리가 만들어 졌고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날처럼 신나고 마음 편하게 술잔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모두가 긍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사실 술값은 이미 그날 제가 지불하고 나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날처럼 여러분의 동료로서 친구로서 같이해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말을 마친 염 차장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모두 머리가 띵하다.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날 퇴근시간 함 대리가 아니 직원 누구랄 것도 없이 현관문을 밀치고 나가는 염 차장을 불러세웠다. 이래서 우리는 얼떨결 8개월 만에 사적으로 아니 진정한 동료로서 인간적으로 그의 전입 환영식을 거나하게 치러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우리보다 한 수 위인 그를 우리의 가족으로 정식 영입하였고 오늘 월급날 그날의 외상값을 주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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