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조형물

기념물(14) -춘천절기 계심의 묘비

심봉사(심창섭) 2010. 6. 21. 20:43

 

 

                            * 비석 후면에 기록된 계심의 행적

 

 

 

 

 

           * 계심의 묘가 망실되면서 묘비를 옮겼던 곳(계단 바로 위)

                     * 이 도로가 신설되면서 계심의 묘가 없어 지는 동기가 되었다.

 

 

  - 기녀의 피맺힌 순절

        작고 초라하지만 춘천절기 전계심의 애절한 묘비 이야기-

춘천문화재 답사의 일번지인 봉의산 기슭 소양정에 오르다보면 "春技桂心旬節之墳/ 춘기계심순절지분"이라 쓰인 돌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 춘천기생 계심의 묘비이다. 조선 명기중의 한 사람이나 기생으로의 명성보다는 절개를 지킴으로써 조선시대의 가치관에 부합된 삶을 산 비운의 여인이다.

그녀는 고작 관청에 소속된 관기에 불과했지만 그의 절개와 일관된 행적에 감동을 받은 춘천의 선비들이 세운 비석이기에 그 가치가 더해진다.

묘비는 산소 앞에 세우는 것이 기본이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이 비석 또한 박복한 이력을 갖고 있다. 본래 그녀의 묘소는 이곳이 아닌 소양1교에서 현재 후평동 방향의 산기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에는 소양강과 봉의산이 연접된 급경사로 소로밖에 없던 곳이었다. 다만 정확한 본래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도로가 개설되면서 묘가 소실되면서 그래도 묘비만큼은 치우기가 민망(?)했던지 지금의 소양사 입구 계단 윗편에 옮겨 놓았었다. 일부 파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때우는 등 묘비가 많이 훼손된 것은 세월의 풍화가 아닌 이건과정에서 생긴 상처로 보인다.

춘천의 문화축제인 소양강 문화제의 시원인 제1회 개나리 호수제 때 계심의 정절을 기리고자 춘천의 접객업소 여인들이 등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하기도 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후미진 곳에 방치되던 계심의 묘비는 이후 시민들의 관심을 받으며 부각되자 춘천문화원에서 1997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고 춘천시에서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해서체로 "節妓全姓桂心名少仍母賤籍敎坊.簡潔之姿幽貞性持身無異盧閨房十七....." 라고 시작되는 계심의 행적이 한자로 음각되어있다.

주인공 전계심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 때 천한 집안 출신인 관노였다. 비록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한 행동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춘천 부사로 부임한 김처인의 소실로 가연을 맺은 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부사는 곧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 떠났으나 소식이 없자 그녀의 어머니는 속인 것이라며 그녀를 서울의 기방으로 팔아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기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계심은 이미 부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의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고결한 성품이 소문이 나자 수많은 사내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녀는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정숙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계심은 자신에게 욕망의 눈길을 보내던 한량의 폭력에 의해 정조를 유린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고 말았다. 낭군을 만날 면목이 없어 상심한 계심은 님에 대한 사랑을 지켜 나가고자 부사에게 사랑의 사연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간직하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하고 말았다. 계심이 자결하던 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그녀가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보니 그녀는 꿈속의 모습처럼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부사는 안타까움과 불쌍한 생각에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의 봉의산록에 장사지내 주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순찰사가 사대부가 부인들도 힘든 것을 계심이 해냈다며 그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烈女旌門)을 세워주었고 1796년에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묘비를 세워주었다. 묘비의 글은 박종정[朴宗正]이 짖고, 글씨는 류상륜[柳尙綸]이 썼다고 한다.

<비문전문>

 

春妓桂心殉節墳碑銘  

節妓全姓桂心名 少仍母賤籍敎坊 簡潔之姿幽貞性 持身無異處閨房 十七于歸府吏家 與子成說許不更 退來自守粉黛中不學他人嬌笑呈 尙方移屬被誰囑 收拾嫁衣入漢京 長安挾斜惡少多 料得行路遭暴强 裙帶秋蓮*儲藥 鴻毛擲矢自戕臨別殷勤托所天 弱息猶關鐵肝腸膓中有物添身屢忍能割愛手墮傷, 垢后毁容便自汚 會須一死心深剛, 月白人靜中元夜從容飮毒如飴糖傍人驚救已無急, 奄奄僅辨猶聞聲 賣髢備柩屬後事肥膚勿露收歛精 三度家書繫腰間 面面訣語哀其鳴 夫婿抱蒿歸*里一靈難掩夢感場 玉碎珠沉等碧綠 節義方之逾秋霜 巡相李公聞其事 錦水*娘雙表旌 亟我伐石督棹楔 工備辨給出上營 新莅明府且捐捧墳前標立三尺盈 春川孤客OOO(三字未詳)掇取餘意述此銘

嘉慶元年丙辰五月 日

錦城 朴宗正銘 文化 柳尙綸書 (嘉慶元年卽正宗二十一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