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의 금석문金石文
장절공 반석평潘碩枰의 암각한시岩刻漢詩 소고小考
심 창 섭
봉의산 바위벽에 옛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암각 시는 해발 301. 5m의 봉의산 남쭉 경사면인 해발 275m(8부 능선) 암벽(사진1)에 새겨져 있다.
지금은 휴식년제休息年制로 통행을 금하고 있는 등산로변의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고 글씨마저 얕게 새겨져 있어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고는 대면對面하기가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의산은 춘천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오른 진산鎭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나 명성에 비해 인문학적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산이다. 금석학 자료로 반석평의 암각시(사진2)를 비롯해 소양정昭陽亭 입구에 모아놓은 비석군의 27개 선정비善政碑(사진3) 춘천절기 전계심의 순절비春川節妓桂心殉節之墳(사진4)가 있고 소양사昭陽寺 측면 암벽에 조성(1952년도)한 해월선사海月禪師 유허비遺虛碑(사진5)가 있다. 또 최근 소양1교 옆 달팽이집 주변 건축물 철거로 우연히 드러난 2개의 암벽비석(사진6)도 있다. 이 비석은 풍화風化가 심해 글씨조차 판독判讀이 어려운 상태이나 위치, 규모, 비 碑碣의 조각 수법과 비음碑陰부분이 없어도 되는 여건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의 선정비가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근․현대 것으로 소양정 앞의 춘본학교설립자春本學校設立者 윤용성영세불망비尹龍成永世不忘碑(사진7) 봉의산항몽순의비鳳儀山抗蒙殉義碑(사진8) 봉의산산신비鳳儀山山神碑(사진9)가 있다.
이렇듯 많지 않은 금석문이나 기존에 여러문헌을 통해 발표된 비석군의 선정비는 제외하고 본고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반석평의 암각시를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강원도 감사監司로 부임한 반석평이 봉의산에 올라서 지은 이 시詩는 사실 춘천과 직접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자신의 현재를 돌아보며 정회情懷하는 마음을 독백형식으로 나열한 시詩이기에 향토사가들에게도 별다른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필자 또한 암각문이라는 희소성에서 출발하였는데 자료를 발췌하는 동안 그의 인물에 대해 호감과 끌림으로 한시의 내용과 인물의 면모를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었다.
춘천에서 장절공壯節公하면 의례 서면 방동리 산하에 잠들어 있는 고려충절의 대표적인물인 신숭겸申崇謙장군將軍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분 말고도 춘천과 인연이 있는 또 한분의 장절공이 있으니 그가 바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송애松厓 반석평(?∼1540(중종 35년)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으로 바로 봉의산 암각시岩刻詩의 주인공이다.
송애 반석평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있었던 1504년 32세의 늦은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다. 13세에 부친 서린이 죽자 모친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한양으로 올라갔다는 기록과 ‘어떤 재상가宰相家의 종(노비)이었으나 그의 재목됨을 보고 글을 가르치고 부자 집에 보내 아들로 삼게 하고 공부에 힘쓰게 했다’ 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아마도 서얼庶孼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적 차별로 인해 한양의 재상집에서 종살이를 하는 등 초년시절에 많은 고생을 한 것이 사마시에 늦게 급제한 원인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마시는 조선의 과거시험 중 하나로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쳐 부르는 명칭인데 소과小科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라고도 한다. 이 시험에 급제하여 생원生員이 된 후 성균관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마치고 종중반정이 일어난 이듬해 1507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초史草 및 임금의 명령을 기록했던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첫 관직으로 시작한다. 이어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등 시종직을 거쳐 1513년에는 조선시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강화과정에서 조정의 필요에 따라 특정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된 중앙의 관원인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다.
훗날 조광조, 김식 등과 교유했던 반석평은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사정 보고를 잘못했다는 탄핵彈劾에 의해 한때 파직罷職되기도 했다. 다시 같은 해 52세의 나이로 병조참의를 맡았다가 함북병마절도사를 거친 후 1530년 종 2품으로 8도道에 1명씩 두었던 지방 장관직인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다시 1531년에는 명나라 황제인 세종의 생일을 맞아 축하사절단장과 같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다음해 2월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533년 6월에 경상감사를 시작으로 평안․ 강원․함경․황해 등 8도 관찰사를 모두 역임한 분이다. 이후 형조참판, 한성판윤, 특진관, 공조 및 형조판서, 의정부좌찬성 등 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기도 했다. 조선조에서 8도감사를 모두 역임한 사람은 함주림과 반석평 두 사람 뿐이다.
반석평의 문집文集은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5수數의 한시 작품과 화답시 및 증시 15수가 전한다. 이 봉의산 암각시는 송애가 1534년 강원도관찰사로 재직 시 봉의산에 올라 지은 시로 추정된다. 이후 선생의 9대손인 반우한이 1725년 봉의산 바위에 암각자로 새긴 것으로 한시 말미에 기록되어 있다. 이 시는 춘천읍지, 춘천지, 광주반씨세보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 광주반씨 집성촌인 충북 음성군 원남면 상당1리(행치마을)에 소재한 팔각정 보덕정普德亭(사진10)에 이 시가 현판(사진11)으로 음각陰刻되어 걸려있는데 이곳이 올해 연임連任이 확정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생가마을이기도 하다
반석평의 인생을 살펴보면 인간 승리의 모델을 보는 것 같다. 중종실록中宗實錄에서 그를 서얼(양반의 자식 가운데 첩의 소생) 출신이라고 전한다. 당시 서얼금고법(조선시대 양반의 자식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한 제도)이 철저하게 지켜졌음을 생각해보면 반석평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공부를 했고, 과거시험에서 당당히 급제를 했고 조선 역사상 두 명 밖에 없었던 조선 8도道관찰사觀察使를 모두 역임한 사람이 되었다. 미천한 출신임이 밝혀져 조정의 추궁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중종의 비호庇護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신분적 제약 때문에 반석평은 항상 내면적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봉의산 산기슭에 있는 암각 시에서도 그의 현실 상황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평기식平起式 오언절구五言絶句로 원문은 탁본(사진 12)을 통해서도 정확히 확인되고 있다. 해제자에 따라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 확인된 세 가지 번역문을 모두 기록하여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碧岹帶聖化 / 벽초대성화 美號至令傳 / 미호지령전 鳳去韶聲斷 / 봉거소성단 登臨獨悵然 / 등임독창연 |
1. 푸른 벼랑도 성현의 교화를 입어 아름다운 이름 아직도 전해오건만 봉황은 떠나가고 퉁소소리 끊어지니 올라서 유람하는 이의 마음을 애달프게 하네 |
2. 성인의 교화를 두른 푸르른 산 그 이름 아름다워 지금까지 전하였네 봉황새 날아가자 태평시대도 끝나버려 산에 올라 창연함을 홀로 느끼네 | |
3. 푸른 멧부리 聖人敎化띄고 아름다운 이름 상기 전하는데 봉황은 가고 풍류소리 끊어져 산에 오르니 홀로 쓸쓸하여라 | |
嘉靖十年日 監司 潘碩枰 題 九世孫 遇漢 雍正三年 刻 |
가청10년(1531년/중종 26년)에 감사 반석평 시제를 9세손 우한이 옹정 3년(1752년/영조 원년)에 새기다 |
글자의 크기는 5~6cm이며 전체면적은 가로 60cm 세로 30cm이다.
내용에서 외형상 봉황鳳凰으로 지칭되는 봉의산에서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는 비관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조광조 등의 개혁세력改革勢力이 훈구대신들에게 꺾여 죽음을 당한 당시의 정세政勢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개혁을 바라는 반석평의 꿈이 꺾여 한탄스러움을 함축된 언어표현으로 시를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의 꿈이 대충이나마 무엇이었나를 알 수 있다. 못다 이룬 꿈과 아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인생 역정을 이겨낸 인물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바라보며 아쉽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고자 쓴 시로 생각된다. 그의 후손 우한은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가 관찰사를 지냈던 강원도 봉의산에 그를 위무慰撫하고자 이 한시漢詩를 새겼을 것으로 보인다.
장절공 반석평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다 겪는 가운데서도 조선 8도감사(관찰사), 5도 병마절도사, 한성판윤 등 6경卿이라는 고위직을 두루 거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1993년에 후손後孫인 반재식(전 종로문화원장)이 저술한 팔도감사 반석평「관산별곡」關山別曲이란 책은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생애를 이해하는데 더 없이 좋은 지침서이다. 여기에 핵심적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반석평潘碩枰은 청백리淸白吏로 존경을 받았으며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 병조참의兵曹參議.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형조참판刑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반씨 가문을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이끈 인걸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바로 장절공 반석평의 후손이다. 광주 반씨의 시조始祖는 조선왕조 개국 당시 공신인 반충潘忠으로 고려 조정에서 공조전서(장관)를 지내다가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후 원종공신으로 인정을 받고 해양군 광주백光州佰에 봉封해졌다. 반석평은 반충의 고손자高孫子로 성종 3년(1472년)에 옥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학 세 마리를 가슴에 품는 태몽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가 석평碩枰이다. 석평이 13세 때 아버지 서린이 세상을 뜬 후 어머니 장씨 부인은 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한성(서울) 이사를 실행에 옮겼다. 그 당시로서는 누구도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세 아들을 데리고 한성에 도착한 장씨는 훌륭한 선생이 있다는 소식을 들리면 그가 사는 가까운 곳으로 또 이사를 했다. 반씨 가문에서는 이를 두고 맹자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던 맹모삼천지교'에 비교하여 '경천지교京遷之敎'라고 부른다.
석평은 공부를 하는 동안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권오복 등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들이 무오사화 때 간신 유자광의 모함謀陷으로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석평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나이 32세 때(1504년) 형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다. 그는 1508년,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는 기관인 예문관藝文官의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1년 후인 1509년에는 4등급이나 뛰어 정 5품의 홍문관弘文館 교리校里로 승진하였다. 급 승진으로 인해 그는 주위로부터 질투를 받는 대상이 되어 2년간 대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임금의 명령이나 그 이행과정에 이상이 없는지 최종적으로 검토하는 정 6품의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이 되었다. 1513년 중종임금의 지시로 함경도 지방의 민정을 살피는 경차관敬差官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와 임금을 직접 대면하여 여진족의 침입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나라의 중신들 사이에까지 시기심을 일으켜 미천한 가문의 후처 소생이라는 등 모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반석평은 진중하고 온후한 사람으로 좋은 평을 하고 도와주는 사람도 많았다. 1516년 중종임금은 그를 '경흥부사'로 임명하였는데 그 무렵 반석평은 조광조와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어느 날 밤 오랑캐 50여 명이 경흥부사인 반석평을 노리고 급습을 하였다. 자다가 밖이 소란하여 잠이 깬 석평은 달빛 아래서 활시위를 당겨 적장의 가슴을 명중시키자 오랑캐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도망을 쳤다고 한다.
경흥부사로 부임한지 3년째 해인 1519년에 중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변방상황을 보고 하였다. 왕은 "오랑캐들이 천 명의 군사 보다 부사의 화살 한 개를 더 무서워 한다는 소문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소."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 해 12월 기묘사화가 일어나 각별한 관계로 친분을 유지했던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6년간 경흥부사로 근무하는 동안 공적이 높이 평가되어 1522년 그는 만포 첨사로 승진 발령되었고, 잠시 공주목사公州牧使를 거쳐 1년 후에는 함경도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로 제수되었다. 본시 문신이면서도 무관직에 있는 반석평은 정광필, 정사룡 등 친구들을 만날 때면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반석평은 언제나 간이 지필묵 함을 지니고 다니며 지시사항 등을 기록하고 그 여백에 마음을 가다듬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반석평의 시심은 노래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는데 우국애민가憂國愛民歌인 관산별곡은 이렇게 탄생되었다고 한다.
반석평이 41세가 되던 1524년. 경차관으로 변방에 간지 11년만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발령을 받고 한성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조정은 당쟁과 세력 다툼이 심각해 견디기 어려웠다. 그 시기에 북방의 여진족이 빈번히 침략을 해오자 중종은 1527년 북방 경비의 전문가인 반석평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 1528년 정월, 회령에서 여진족에게 포로가 된 병사들을 구출하기 위해 병사 10여명을 데리고 갔다가 적군 100여 명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꼼짝없이 죽음을 당할 상황이 되었는데 10 년전 죽을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한약재(황기)를 훔치러 왔던 여진족을 불쌍히 여겨 약을 주어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 족장이 바로 그 황기를 훔치러왔던 자의 아버지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다.
그가 58세가 되던 1530년에는 정3품인 특진관特進官으로 제수되어 늘 왕의 곁에서 국정에 관한 자문을 하는 위치가 되었다. 그는 종중에게 함경도 변방지역의 잘못된 노비제도를 개선토록 진언眞言하여 바로 잡기도 하였다. 즉 외지에서 유입된 사람 가운데 신원이 확실치 않은 사람은 신분을 무조건 노비로 하여 많은 문제가 파생됐는데 이를 시정토록 한 것이다.
반석정이 특진관特進官의 임무를 끝내고 처음으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그가 부임한 후 마을에는 5년 전에 사라졌던 학鶴의 무리가 다시 돌아와 사람들은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고 한다.
1531년 충청도 관찰사 역임 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명나라 세종의 생일을 맞아 축하사절 단장인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그는 이 때 명나라 백성들이 무단으로 조선에 들어와 경작을 하며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촉구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의 첫째 부인은 남양 박씨로 아기를 낳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떴다. 둘째 부인은 창원부사 이색李穡의 딸 예안 이씨인데 병약하여 그가 전라도 관찰사 재직 시에도 한양에서 살았다. 관찰사가 멀리 출타를 하려면 조정에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부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허가를 받을 새 없이 급히 다녀오는 바람에 그게 화근이 되어 파직을 당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예안이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지 한 달 후에 그는 다시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부인의 장례로 임지로 즉시 떠나지 않아 체직을 당했다. 부인 때문에 두 번씩이나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61세가 되던 1533년 6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경주를 향해 떠나는 중도에서 조광조와 함께 사형이 결정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감면되기도 했다. 경상도에서는 백성들이 빈충하게 사는 것을 보고 도토리 줍기 운동으로 1만석을 수집, 허기를 이겨내게 하였다.
여진족이 국경지대를 소란케 하자 조정에서는 북방문제에 정통한 그를 또 차출하여 이번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였고 1534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1536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에서는 너무 이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여 그 다음 자리인 공조참판으로 조정되었다. 그는 1년 남짓 공조참판으로 재직하다가 1537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1538년 그의 나이 67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539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이어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 해 7월에는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이 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중종이 직접 반석평을 형조판서에 제수하였다. 이러한 인사는 아주 이례적인 것으로 임금의 절대적인 신뢰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1540년 음력 5월 19일 6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남양박씨, 예안이씨, 진보 조씨 세 부인을 맞이했으나 후사後嗣를 얻지 못해 동생 석권의 아들 사렴을 후사로 삼았다.
묘역墓域은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조안리 팔당호변에 안장安葬되었다가 근년에 충북 음성군 원남면 행치마을로 이장移葬하였다. 많은 공로를 세운 반석평에게 투철한 우국정신과 특출한 무공을 인정하여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라고 기록이 전한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을 생각하며 시가 새겨진 암벽을 바라본다. 생면부지 그리고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임에도 이렇게 480년이 지난 후에 시 한수가 이렇듯 인연의 끈을 이을 줄이야. 탁본을 위해 경사지고 발 딛기조차 어려운 곳에 암벽에 위치해 흔들리는 사다리에 로프를 매고 올라 겨우 한쪽발로 중심을 잡는다. 테이프조차 제대로 붙지 않아 어정쩡한 자세로 저려오는 아픔을 참으며 먹방망이를 두드려 완성도가 낮은 탁본 한점을 겨우 만들 수 있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
암각시가 있는 바위군(우측 나뭇잎 좌측)의 모습
반석평 한시 근접
소양정 입구의 선정비군
소양정 진입로변의 춘천절기계심의 묘비
봉의산 북쪽사면에 위치한 소양사 좌측암벽에 새겨진 해월선사 유허비
옛 소양정 터 하단에 위치한 미상의 비석(자연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조성, 비문은 풍화로 판독불가)
소양정 정면(좌측)에 위치한 욘용성 영세불망비)
봉의산 남쪽사릉에 위치한 봉의산 순의비
봉의산순의비에 제례를 시작으로 소양강문화제가 시작되는데 그에 앞서 이 산신비에 제를 올린다
반석평암각시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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