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 춘천의 봄

심봉사(심창섭) 2011. 11. 25. 11:21

 

 

춘천의 봄

심창섭

 

- 호수너머 찻집의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의암호 건너편에 불쑥 솟아오른 봉의산을 무심하게 바라봅니다.

커피 잔의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당신이 순간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커피 향에 취합니다. 때론 춘천의 진한안개가 당신을 유괴한 시간에도 나는 당신의 실종을 신고조차하지 않습니다. 늘 그곳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기에 당신의 존재를 잊기도 합니다. 4월이 시작되었는데 며칠전 쌓인 늦눈 위로 오늘은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립니다.

호수에선 철새가 겨울의 젖은 날개를 털며 날아오르고 그 뒤로 소양강다리와 봉의산이 보입니다. 오랜 세월 눈에 익어 식상할 풍경이지만 오늘 봄비 속에서 춘천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어느덧 이순耳順의 문턱을 넘으며 나른한 감상에 빠져 홀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맛은 그 의미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 진정 춘천의 봄이 시작되려나 봅니다. 춘천이라는 이름은 늘 봄을 말하고 있지만 아직도 춘천의 화판은 회색입니다. 입춘立春을 오래전 보내고 우수․경칩을 지나고서도 춘천의 봄은 너른 호수를 건너기가 아주 힘든 모양입니다. 마지못해 의암호를 넘어선 날선 봄바람이 따사롭게 느껴지는가 싶으면 벌써 여름으로 들어서는 춘천의 봄은 마치 노루꼬리처럼 짧기만 합니다. 그런 아쉬움으로 이름에 봄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잠시 머무는 봄이기에 춘천의 봄은 더 아름답습니다. 춘천의 봄은 연녹색 바탕에 더욱 돋보이는 노란색으로 시작됩니다. 정원의 산수유 꽃망울이 커지기 시작하고 덩달아 개나리가 도시를 노랗게 채색하고자 채비를 서두르는 시간에 벌써 춘천의 산록을 여기저기 물들이는 노란색이 있습니다. 화려하지도 않고 수목이 크지도 않은 조금은 엉성한 몸짓으로 비탈길과 바위틈에서 봄을 알리는 꽃이 피어납니다. 바로 동백꽃입니다. 사실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유명해 지지 않았다면 우린 그저 산동박나무로 부르며 땔감 나뭇짐 속에 고개를 내밀고 묻혀 있을 그런 잡목雜木이자 소박한 봄꽃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 꽃 열매 기름으로 할머니들이 머리를 치장했었는지, 등잔기름으로 쓰였는지, 그 잎을 튀각으로 식단에 올렸는지 춘천에 살았지만 사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이제 동백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소양호 안쪽 마을 산막골에서 웅거하며 숙명처럼 소나무와 싸우고 있는 최 화백을 만났습니다. 손수 만들었다는 햇차를 한 움큼 가지고 나왔습니다. 처음대하는 담담한 맛과 연녹색으로 피어오르는 찻물의 빛깔에 반해 모두들 탄성을 올렸습니다.

바로 동백나무 녹차였습니다. 노란 동백꽃이 지고 나면 마치 붓 꼭지 같이 돋아나는 동백나무 새순을 따서 그늘에 말린 동백잎차랍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알고 보니 몇몇 마니아들은 이미 동백꽃차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유정은 소설 속에서 동백 꽃 향기를 알싸한 향이 난다고 표현했습니다.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알싸한’ 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느낌이 문학적으로 다가옵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산수유화로 알고 있는 나무의 학명은 생강나무라고 합니다. 가지를 씹으면 매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생강냄새가 입안으로 퍼지는 나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외지사람들에게 생강나무라는 이름보다는 늘 김유정의 동백꽃임을 강조합니다.

 

문득- 이른 봄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을 동백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이때쯤이면 봉의산 산록에는 노란 동백꽃 망울이 봄의 문을 열고 있을 시기입니다. 급히 찻잔을 비우고 산을 오르기로 했습니다. 봉의산은 지척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오를 수 있다는 계산으로 오히려 오르기가 자꾸 미뤄지는 산이기도 합니다. 비 때문인지 산은 조용했습니다. 인적이 없는 오르막을 우산을 쓰고 호젓하게 산길을 걷습니다. 이미 키작은 풀들이 연초록색 물감을 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봄은 저만치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기를 머금은 낙엽을 밟으며 약수터를 지나 충원사 쪽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상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동백꽃들이 보입니다. 나뭇가지 끝과 꽃봉오리에 투명한 물방울이 아름답게 망울져 있습니다. 아직 동백꽃은 노란색이 아닌 연녹색 빛을 머금고 여린 소녀의 자태로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노란 봄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비가 지나고 나면 춘천엔 봄이 성큼 다가올 것 같습니다. 내친김에 허물어지고 이끼 낀 옛 봉의산성 앞에 섰습니다. 성벽은 오늘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응어리진 사연이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몽고군과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들의 함성과 결연한 의지, 그들의 배고픔과 갈증, 그들의 죽임을 멍하니 바라 볼 수밖에 없던 아픈 기억을 반추反芻하며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리도록 슬픈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그 긴 날을 자해自害해온 생채기조차 흔적이 희미해 가는 세월입니다. 그때 이렇게 비라도 내렸다면 우마牛馬의 피가 없어도 견디어 내며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오늘은 당신의 혼을 위무慰撫하는 빗줄기로 가슴을 적십니다. 성벽 틈을 비집고 나온 소나무 몸피는 굵어만 가는데 점점 무너져 가는 성곽 앞에서 나 역시 그날의 당신처럼 바라만 볼뿐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잊지 않고자 새로 쌓은 산성은 옛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는지 자리를 차지한 채 봉의산성이라는 명찰案內板을 달고 축대는 아니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산성에 올라서니 나무사이로 시가지가 보입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있는 아파트 단지도 눈에 들어옵니다. 예전에 비하면 춘천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그 너머론 모두가 낯설지 않은 산, 온통 산뿐입니다.

 

이제 여기서는 정상頂上이 멀지않기에 발길을 재촉합니다. 봄비 때문인지 안개가 몰려다닙니다. 눈앞이 가려졌다간 시야가 탁 트이기도 합니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자 후드득 대추 비를 우산 위로 쏟아놓습니다. 색 바랜 솔잎도 함께 날립니다. 정상의 너른 곳에 만들어 놓은 운동시설물에도 봄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올해의 봄이 쓸쓸히 다가오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모처럼의 등정,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보고 싶었는데 봉의산은 내가 함께 하는 게 낯설기만 한 모양입니다.

비가 조금씩 자저 들기에 춘천의 봄을 느끼고자 우산을 접어봅니다. 봄비를 맞으면서 꽃을 피우고 있는 동백꽃 알싸한 향기가 내 몸에서 뿜어 나기를 바라며 하산 길을 재촉합니다.

올해는 꼭 봄의 향기가 가득한 동백잎차를 만들어 지인들과 시음하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기만 합니다. *  <2011 새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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