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정에 올라
심창섭
오늘도 산은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다.
고집스럽게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산은 어떤 억겁의 인연으로 하여 저토록 그 자리만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때론 앞을 가로막고 있는 답답함에 고개를 돌려보지만 그곳에도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다.
산으로 울타리를 두른 고장.
그래서 춘천을 산골이라 부르는 걸까?
춘천 도시의 한가운데 솟아오른 산이 하나 있어 우리는 그 산을 봉의산이라 부른다. 봉의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 봉우리가 1개에서 3개의 봉우리로 변화한다. 그중 남서쪽 방향인 종합운동장 쪽에서 보는 봉의산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3개의 봉우리가 형상문자로 산자(山字) 모습을 취한 것이 마치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펴며 땅을 차고 하늘로 솟구치려 하는 모습이다. 죽순을 먹고 산다는 봉황. 이 새가 바로 전설 속의 상서로운 봉황조(鳳凰鳥)이다. 그래서 봉의산 앞에 대나무 마을의 이름을 가진 죽림동(竹林洞)도 있지 아니한가.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
보통의 산 은 그 뿌리가 이어지는 형세를 가지고 있으나 이 봉의산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날아와 앉은 듯 독야청청(獨也靑靑)이다. 도심 한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봉의산을 정점으로 대룡산, 마적산, 수리봉, 화악산, 북배산, 계관산, 삼악산, 금병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강강술래를 돌듯 돌아난다.
매일 아침 춘천의 아침 해를 잉태시키는 대룡산이 동쪽으로 길게 누어 게으름을 피우고 북쪽 편으로는 오봉산이 가로막고 뜨나리재(浮沈峙)와 무작개의 전설이 깃든 마적산이 버티고 있으며 왼쪽의 수리봉은 샘밭뜰과 고대국가인 맥국의 전설을 품고 있다.
또 의암호 너머 서북쪽 저 멀리로는 낮은 산들을 지그시 누르고 화악산이 1,468m의 큰 키를 자랑하며 우쭐거리고 서 있으며, 서쪽으로 북배산, 계관산 봉우리가 신연강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멈춘 삼악산이 춘천을 내려다보며 저녁 해를 품는다.
신연강 협곡을 건너서면 금병산이 한국 단편문학의 큰 별로 무지개 같은 삶을 불태운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의 생가와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문학배경을 간직한 채 하루에 몇 번씩 오가는 경춘선 간이역인 신남역에서 이별과 만남의 추억을 연출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야,
안쪽으로 나지막하게 우두산, 고산, 국사봉, 장군봉, 봉황대, 안마산, 구봉산이 청소년기의 여드름처럼 여기저기에 돋아난 분지 속에서 춘천이 웅지를 틀고 있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춘천의 첫인상은 마치 활짝 핀 한송이 연꽃 같다고 표현한 것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운 춘천의 형국을 연상할 수 있지 않은가.
산을 두르고 물줄기를 벗 삼은 춘천을 한눈으로 즐기기 위해 예전의 선비들은 봉황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봉의산 북쪽 산록에 기대어 있는 정자 하나있어 오르기를 즐겨했는데 바로 소양정이다. 물과 산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이요루라는 옛 이름도 아름다운 정자이다.
춘천의 상징물이기도 한 봉의산과 소양강 그 중에서도 소양정은 춘천 답사 일번지로 손꼽히는 곳으로 춘천을 찾는 많은 묵객들이 이곳의 경관에 반해 많은 시문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자리가 옮겨지고 누각으로 모습을 변신하여 주위의 풍광도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곳에 오르면 북한강과 소양강이 먼 길을 달려와 몸을 합치며 부부의 인연을 맺는 멋진 풍경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나 또한 오늘은 풍류를 즐기던 선비의 마음으로 소양정에 오른다. 누각이 있는 마당으로 올라서니 좌우로 도열하듯 서있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나를 반겨준다.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누각으로 오른다.
누정건축물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예술적 취향이 가장 풍부하게 적용된 소산물이라고 한다. 외부에서 보는 정자의 모습보다는 내부에 들어서면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과 각 귀퉁이는 마치 부챗살처럼 펼쳐지는 선자연의 자연스런 곡선이 일품으로 보인다. 그 위에 먼지 쌓이고 퇴색한 한시현판이 어우러진 전통의 풍경이 은은한 다향으로 다가온다. 기둥과 기둥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액자 속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붉은 단청이지만 검은색으로 보이는 기둥과 기둥사이로 초록색의 자연이 전면으로 펼쳐진 산하의 풍경에서 눈과 가슴이 트이며 나는 비로소 진정한 춘천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면으로 키 큰 상수리나무와 아카시아 나무가 시야를 막고 강 건너 편으로 아프트촌이 들어서 선비들이 느끼던 그때의 감흥을 그대로 전달받기는 어려우나 탁 트인 의암호의 풍광에 가슴이 후련해지는 상쾌함과 짜릿함이 전해온다.
산천은 변함없으나 이미 물은 옛물이 아니다. 비단폭 처럼 휘돌아 치며 흐르던 소양강물은 인공으로 막아버린 의암호에서 발길을 멈추며 주저앉는다. 이젠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소금배도, 금강산과 설악산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던 뗏목의 자취도 고기잡이 돛배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멀리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춘천의 산과 들. 나무사이로 펼쳐진 풍광을 보며 잠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한 떼의 바람에 숲이 술렁이자 싱그러운 솔 향이 코끝을 스친다. 하얀 도포를 거치고 갓을 쓴 선비들이 정자에 앉아 먹물을 흠뻑 찍어 시를 짓고 있다. 묵향이 솔바람과 엉키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정자를 감싸면 시정에 취한 선비들이 호탕하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곳에서 예전의 선비들처럼 호탕하지도 못하며 한 줄의 시상도 글로 표현해 보거나 한 폭의 수묵화도 그릴 수 있는 재주도 없다. 그러나 소양정에서 자연을 보았고 잠시 인생을 되돌아보며 마음을 열고 아름다운 내 고향 춘천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다.
돛배가 흐르던 강에는 한껏 큰 키를 자랑하며 솟아오르는 분수와 철제 아치교가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지만 우두 뜰에 자욱이 깔리던 밥 짓는 저녁연기의 정취는 간곳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춘천의 풍광을 한 눈으로 보고 즐길 수 있고 춘천을 사랑하게끔 내 마음을 흔들어 주는 이곳 소양정에서 나는 바로서 진정한 춘천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 (2002 춘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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