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의산 斷想
- 나무사이로 추억의 유년기를 엿보다.
심 창 섭
내 고향 춘천!
이곳에서 태를 자른 후 청년기에 잠시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60여년을 호흡한 곳이며 내가 영원히 잠들어야 할 곳으로 약속한 땅이다.
첩첩산으로 둘러싸인 갑갑한 분지를 벗어나 무지개를 잡고 싶었던 어린 시절, 더 큰 도시의 환상에 수년간의 방황시기도 있었다. 태지胎地의 풍광과 흙내음, 물내음이 그리워 눈과 마음이 짓물렀던 노루꼬리 만큼의 타향살이 설음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지지리 복도 없어 부모형제도 없는 환경의 막막한 고향이었지만 이름 할 수 없는 어떤 끌림에 의해 다시 돌아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고향은 한 번도 내 이름을 살갑게 부르거나 보듬어 주지 않았지만 또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연어의 회귀처럼 거창하지는 않지만 어미의 품을 찾는 동물적 본능과 막연한 그리움을 안고 돌아온 고향. 눈에 밟히던 풍광, 거부감 없는 땅냄새 그리고 거슬리지 않는 고향의 어투들. 이제 새삼스레 고향의 평범한 모든 풍광을 못내 겨워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 건 아마도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오랜만에 도시의 중심부에 배꼽처럼 도도하게 자리한 봉의산을 오른다. 예전 참으로 많이도 오르내린 산이다. 산 바로 아랫말인 요선동에서 태어났으니 어린 시절엔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또 가끔씩은 시가지를 막연하게 내려다보며 고향의 풍광을 각인시키곤 했었다. 이러한 토양은 타향에서 나를 돌아오게 만든 힘이었다. 초교시절 가사사정으로 친척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한동안 봉의산과 멀어졌다. 봉의산과 함께했던 기억은 가슴속 깊이 가라앉았지만 미모사처럼 건들이면 언제나 곧 바로 반응하며 부유하였다. 이러한 인연이 이어졌는지 직장에서도 문화재업무로 봉의산성을 수시로 찾을 수 있었고 또 봉의산기슭에 위치한 딸애의 학교 등교를 이유로 가까이 하던 산이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나무가 무성해 산에 올라도 춘천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하기가 그리 쉽지않다. 다만 몇 군데 나무틈사이로 떠오르는 풍광을 바라보며 만족해야한다. 예전 어린이 헌장비가 세워져 있던 봉의산 순의비抗蒙殉義碑 앞 광장에서는 남서향의 시가지를 훤히 볼 수가 있었는데 나무가 웃자라 시야가 좁아져 아쉬움이 크다.
봉의산 주등산로변 군사용 통신 반사판을 철거한 자리에 올해 새롭게 전망대가 있는데여기서는 춘천의 동남쪽과 남서쪽의 탁트인 풍경이 한눈에 조망된다.
아! 저기 동남쪽으로 우리 동네가 보입니다. 아니 상자를 쌓아놓은 것처럼 우리 아파트단지가 보입니다. 그 너머로 대룡산이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달리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곳이 바로 원창고개입니다. 다시 능선은 금병산으로 이어지고 그 앞에 나지막하게 안마산도 보입니다. 여기 저기 불쑥불쑥 솟아오른 아파트단지들이 무리를 이룹니다. 예전에 비해 춘천은 그 외형적인 모습이 참으로 많이도 달라졌습니다. 다시 자연석 돌계단 길을 따라 운동복차림의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집니다. 숨이 차오고 장딴지가 딴딴해 지며 몸이 더워집니다. 키작은 풀들이 작은바람에 손을 흔들어 주는 환영식을 받으며 정상을 향합니다. 가시철망 울타리를 두르고 정상부를 지키고 있는 철제 통신시설과 흉물스러운 시멘트건물에는 눈길도 주지않고 뒷편의 노천 체육시설이 있는 너른 곳에서 숨을 고릅니다. 여기서도 춘천은 나무 뒤에 숨어 있습니다. 북쪽의 능선 끝으로 다가가 나무사이로 다시 춘천을 내려다봅니다. 소양강 물줄기가 한 폭의 비단 폭처럼 하얀 물빛으로 휘어지며 산자락을 감아 돕니다. 그 물줄기 너머로 마적산이 버티고 그 뒤쪽에 하얀 바위덩어리로 자리한 용화산도 보입니다. 서쪽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한눈에 보이는 능선을 따라 내려갑니다. 멀리로 화악산의 푸른기운이 느껴집니다. 산마다 높고 낮음이 달리하며 자태를 드러내고 북한강이 봉의산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과 고산孤山의 모습이 어우러집니다. 발끝 쪽으로는 소양강과 북한강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너른 의암호가 펼쳐집니다. 산자락 끝에는 지붕만 보이는 소양정이 자리 잡고 소양1교, 소양 2교 그리고 소양강 처녀상과 쏘가리 조형물까지 한눈에 들어옵니다. 강 너머론 아파트 단지가 우두 벌을 가로막아 예전처럼 장쾌한 맛을 느끼기는 어렵지만 가슴이 확 터오는 청량한 기분입니다.
아랫쪽에서 늘 바라보기만 하던 봉의산에 올라 오늘은 산의 눈과 마음으로 춘천을 천천히 둘러봅니다. 나의 소년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바로 저기 턱밑에 있는 요선동이 바로 태를 자른 동네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 산은 민둥산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대다수가 상고머리나 빡빡 깎은 머리였는데 나무가 별로 없던 봉의산은 마치 빡빡머리가 엉성하게 자란 우리들의 모습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민둥산이 흉물스럽지만은 않았습니다. 봄이면 키작은 진달래가 온산을 덮는 장관을 볼 수 있었고 우리들은 봄날에 그 꽃으로 허기진 입맛을 달래곤 했던 기억의 향기가 입안 가득 번져옵니다.
다시 눈을 감고 7살 소년의 기억으로 봉의산을 오릅니다. 이제는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동네 형들을 따라 봉의산을 향합니다. 가까이 있었고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정상까지 오른건 한두번에 불과 했던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자주 찾던 곳은 지금의 도청건물 바로 뒷편과 세종호텔 주변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도본청 건물과 예전의 도경찰청 건물사이의 길을 따라 세종호텔까지 화강암으로 만든 긴 돌계단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참, 그 계단입구에 솟을삼문으로된 큰 대문이 서있었는데 지금 도청 앞에 이전된 위봉문이었습니다. 그 문을 들어서면 좌측 능선에 한 아름씩 되는 도토리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진을 먹고사는 풍뎅이를 잡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놀이였습니다. 나무 하나씩을 맡아 기다리다보면 찾아드는 사슴벌레, 풍뎅이를 잡는 재미로 배고픔도 모른 채 긴 여름의 하루를 이곳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풍뎅이의 다리를 잘라내고 뒤집어 누구 것이 쉬지 않고 오래 맴을 도느냐에 따라 승패를 가리던 놀이에 빠지곤 했습니다. 힘이 빠진 풍뎅이를 위해 손바닥으로 땅을 치며 입김을 후-후- 불어대면서 흥분하던 그 시간들.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행복했던 유년의 기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사슴벌레류는 더듬이를 잡고 누구 것이 더 큰 돌멩이를 들어 올리느냐에 따라 우월을 가리곤 했었습니다. 그 놀이도 싫증이 나면 계단 건너편 능선에 있던 충혼탑 공간에서 해질 무렵까지 칼싸움과 전쟁놀이를 하며 뛰놀던 곳이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없어진 현장에서 가뭇거리는 추억을 되새김해 봅니다. 또 가끔은 그 화강석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계단에 올라서면 잡초가 무성한 넓은 터가 나타나고 그 안쪽에 낡아 무너져가는 으스스한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건물이 일제강점기의 흔적인 일본의 신사神社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 터에 세종호텔이 들어선 후였습니다. 마치 떫은 감을 뱉고 난후에도 오랫동안 텁텁함이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도청일대가 우리의 자존심이랄 수 있는 강원감영이 있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놀이터를 조금씩 넓혀 나갔습니다. 지금의 도청 왼편 소양로 방향의 고개가 모수물재입니다. 지금의 도의회 건물 왼쪽 골짜기에 있던 샘터에서 시원하게 갈증을 풀고는 소양강으로 멱을 감으러 가기위해 늘 넘나들던 고개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의 춘천미술관 건물인 중앙감리교회와 춘천여고를 지나면 예전에는 지금처럼 한림대를 넘어가는 큰길이 없었고 향교 바로 옆 작은골목이 통행로였습니다. 그 골목 중간에 수건공장이 있어 좁은 골목 중앙의 도랑으로 늘 시커먼 염색물이 흐르곤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골목을 조금 지나면 지금의 춘천시의회 아래부터 언덕이 시작되는데 말탕개미 고개라고 불렸습니다. 공자公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향교 앞에서는 누구든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 고개 너머의 연못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성길네 연못 또는 한우물로 불렀습니다. 아마 그 명칭은 바로 건물주인의 이름자였던 것 같습니다. 좌우간 고개 너머엔 커다란 옛 기와집이 있었고 그 건물 앞쪽으로 우물과 큰 못이 있었는데 우린 그 연못에서 잠자리를 잡고 했습니다. 형들은 밤이면 반딧불이가 연못 위를 나는 모습이 환상적이라 하면서 그 푸른 불꽃을 눈썹에 붙이며 노는 놀이가 최고라곤 했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들의 무용담을 듣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밤에 는 형들이 귀찮다면 동행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곳에는 여름이면 잠자리가 정말 많았었습니다. 곤충채집 잠자리채를 가질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기에 댑싸리가지로 빗자루 모양으로 대충 엮은 후 그것으로 잠자리를 잡곤 했습니다. 형들은 암 잠자리를 한 마리를 잡아 바느질실로 다리를 묶고 그 끝에 다시 싸리가지에 이어 머리위로 원을 그리면서 “호투래 꽁꽁!. 호투래 꽁꽁!”를 외쳐댔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구호를 외치며 열심히 돌리다보면 손때에 지쳐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 암 잠자리를 향해 사랑에 눈먼 숫 잠자리들이 몰려들곤 했습니다. 막대기 실 끝의 잠자리에 숫잠자리가 달라붙으면 풀밭으로 내리면서 재빠르게 잡곤 했었습니다. 손가락 사이 사이에 왕잠자리를 끼우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던 그때의 발걸음이 나를 지탱하게 한 자양분일 뿐만 아니라 고향을 못 잊는 시발점 역할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 연못을 조금 지나치면 봉의산 비탈에 초라한 흙집이 여러 채 있었는데 그곳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마음에도 그들의 삶이 고단하고 그렇게도 안쓰럽게 보였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쓰러진 환자를 일으키고 눈먼 사람도 시력을 찾게 해주는 큰 대학병원이 그곳에 들어섰는데 그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굼증이 몰려옵니다. 그 집들 앞에 풍경처럼 놓여있던 구겨진 양은 세숫대야하며, 오지 물동이들이 왜 이리도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봉의산과 함께한 생활이었다고 하지만 늘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산위에서 아옹다옹하며 견디어낸 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춘천을 막연하게 내려다봅니다. 봉의산을 채색하던 진달래꽃과 아카시아 향기로 오월을 수놓던 향기로움으로 포장된 유년시절이 그리워만 집니다. 등에 초록색 빛이 감돌던 풍뎅이도 보고싶읍니다.춥고 배고프던 시절의 기억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춘천사람인 것이 너무나 행복한 시간입니다.*
<2011 문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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