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선당邀仙堂/ 문소각文韶閣(사진1)의 명칭에 대한 재조명
요선당(문소각)은 옛 춘천의 주요 건축물중 하나이다. 옛 기록 중 특히 시문詩文이나 기문류記文類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청평사, 소양정, 소양강, 자양강, 고산 등과 함께 대표적 소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기록이나 규모를 알 수 없었고 깊이 있게 다뤄준 사례가 없음을 안타까웠다.
향인鄕人으로서 늘 춘천에 대한 기록부재가 아쉬워했던 차에 매년 본회에서 발행하는 문집의 주제가 마침 봉의산으로 채택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춘천관아도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시작을 하고자 했으나 능력이 못 미쳐 평소 의문시 되던 문소각(요선당)을 화두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 건물이 봉의산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산기슭에 위치하고 춘천에는 고 건축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사라진 춘천의 대표적 건물이기에 살펴보고자 하였다. 더구나 옛 건물지 부근 마을이 아직도 요선동이라는 동명同名이 사용되고 있고 더구나 그곳은 필자가 태를 자른 잊을 수 없는 곳이기에 더욱 애착이 가기에 시작했다. 그러나 발제자의 능력한계와 한정된 자료로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이 따라 문헌자료를 비교 확인하는 단순한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본고에서는 규모나 건물의 형태는 배제하고 단지 건물의 명칭과 시대만을 검토하는 피상적 내용으로 검토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건축물은 서민들을 위한 건물이 아닌 관아官衙의 일부로서 부사가 업무를 마친 후 경관을 즐기며 소요逍遙하거나 빈객(중앙의 손님)이 머물던 곳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서북쪽으로 소양강, 자양강(모진강) 두강이 흘러와 하나로 합쳐지는 장관과 탁 트인 우두벌 너머로 고산, 화악산 등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또 시선을 서남쪽으로 향하면 발끝으로는 춘천부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로는 봉황대, 백로주, 삼악산이 조망된다. 이어서 남쪽의 안마산, 금병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어 이곳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은 영서에서 가장 뛰어난 조망권을 가진 곳으로 극찬하는 곳이었다.
먼저 봉의산 아래 관아의 객사客舍였던 수춘관壽春館 서쪽인 지금의 도의회 앞 주차장 부지쯤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는 요선당과 문소각이 동일한 건물인지 별개의 건물인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엄황嚴惶이 저술한 춘천읍지에는 “봉의산 아래 요선당의 동쪽에 있다“라 했고,
관동지 이민구李敏求의 문소각기문에도 ‘공관과 요선당邀仙堂 사이의 땅을 살펴 작은 누각樓閣을 창건하고는 문소라 이름했다.’ 라고 하여 요선당과 문소각을 별도의 건물로 보았으나, 여지도서, 춘천읍지(조선 순조대 발간), 관동읍지 본문과 관동읍지 김병륙의 문소각 중건기에는 ‘요선당은 14칸이다. 일명 문소각이라고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선당의 별칭으로 같은 건물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요선당은 문소각의 옛이름 또는 별칭이라는 설과 공관(객사) 주변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문소각이라 했다는 설이 대치된다. 다만 건물의 창건 후 노후, 화재, 병화로 몇 차례 중수에 따라 건물에 변화가 있을 수 있고 과거 기록의 인용시 착오도 있을 수 있어 정확한 판단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1573년 창건된 건물로 본다면 불과 100여년 후인 1600년대 중반에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춘천읍지의 최초기록을 따라 별도의 건물로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
각 문헌에 요선당은 1573년 부사 성의국에 의해 창건된 것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나타난다. 또 1582년 부사 심충겸에 의해 요선당이란 이름으로 중건되고 현판을 건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관동지의 이민구 기문에는 부사 엄황의 문소각 창건설과 ‘ 아! 문소각을 처음으로 건립한 사람과 시기는 알 수 없다’라는 오수채의 기문이 병치竝置되어 혼란을 가져온다.
이에 이를 연대별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573년 부사 성의국에 의해 모옥茅屋으로 건물 신축하였으나 건물명 없음
- 1582년 부사 심충겸이 요선이란 시액을 적어 걸면서 요선당이라 명명하고 편액게시
-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 소실
- 1611년 춘천부사 유경종이 중건하고 중수기문 게시
- 1625년 춘천부사 민형남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
- 1646년 춘천부사 엄황이 건물을 짓고 문소각이라 편액
- 1648년 이민구의 기문인 “문소각기”이후로 문소각으로 불림
원문에 충실하기 위해 살펴본 춘천읍지(1600년대) 여지도서(1700년대) 춘천읍지(1831년) 관동지(1820년) 관동읍지(1871) 조선환여승람(1920년) 강원도지(1940년)의 중건기重建記의 비교와 한시, 기문류를 시대별로 나열하여 창건, 중수되는 과정과 건물과 관련된 문객들의 한시, 중건기, 기문을 살펴보고자 했다.
춘천읍지(엄황), 여지도서, 춘천읍지(조선 순조대)에 기록에
엄황의 춘천읍지에 본문이 시작되기 전 요선당邀仙堂은 1573년(만력 계유년)에 부사 성의국이 처음 창건하였고, 만력 임오년에 부사 심충겸이 공사를 마치고 요선이라 게시하였다. 임진년에 불타고 신해년에 부사 유경종이 역사를 시작해 중건하였다. 천계天啓 을축년(1625년)에 민형남閔馨男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라고 기록되었고
□ 유경종의 요선당기문에
“ 신해년 봄에 내가 우대언右代言으로 재직 시에 어버이를 위해 상소上訴를 올려 춘주로 걸양출재乞養出宰를 요청하였다. 이는 예로부터 춘주는 명부名府로 알려져 있으며 부의 아름다운 곳에 요선당邀仙堂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임진란壬辰亂 시에 왜적이 부府에 들어와 관청과 민가가 모두 불타 없어질 때 요선 또한 참화로 초토가 되었으니 어찌 참혹하지 않다 하리오, 내가 부임한지 며칠 만에 누차 그 곳을 돌아보니 가시덤불과 망초대만 푸르고 기와조각과 도토리만 구를 뿐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길 없었다. 오직 변하지 않은건 강산뿐이었다. 이에 예전을 일을 잘 아는 노인을 찾아 요선당의 내력을 물어보니 아! 요선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융경연간隆慶年間에 여기에 띠풀로 엮은 정자를 창건하고 공무를 마친 후 소요하는 곳으로 삼았었던 곳이다. 그 후 성의국成義國이 처음으로 규모를 넓히고 띠풀 대신에 기와를 얹었으며 편액扁額은 아직 달지 못하였다. 수령이 바뀌어 심충겸沈忠謙이 단청을 새로이 하고 요선이란 제명으로 시를 짓고 시문과 요선당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불행이도 병화로 이 지경으로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내가 탄식하여 이르기를 ”요선당의 흥함도 여러 번이요, 당의 폐함도 여러 번이고 중수重修한 것도 또한 여러 번이라 내가 이 읍邑을 맡게 된 것이 바로 당을 중수할 기회가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때가 농사철이라 시작도 못하다가 8월에 이르러서야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목재와 돌을 나르는데 백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공록 납부에 문제가 있는 아전들의 과오에 따라 죄질의 경중에 따라 사역으로 두 달여의 기일 만에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얹은 모습이 본래의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해도 후인들이 보는 경관은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요선당은 봉의산을 등지고 향로봉香爐峯을 마주하고 있으며 왼편으로는 대룡산大龍山이, 오른쪽에 추림楸林(오동나무숲)이 있다. 두 강물의 흐름과 삼악산三岳山, 고산孤山, 봉황대鳳凰臺에 이르기 까지 허다한 삼라만상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공무公務를 마치고서 여가餘暇에 휴식과 함께 탁 트인 승경勝景을 바라보면 시를 읊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개 낀 아침 맑은 소리로 시를 읊고 달 밝은 저녁에는 가슴속이 맑고 깨끗하여져 몸이 세상을 초월하여 황홀하여진다. 마치 현포玄浦에 올라 봉도蓬島를 거닐고 부구浮丘를 끼고 홍애洪崖에 다다른 듯 하다면 믿겠는가? 당의 아름경치로 볼 때 마땅히 이름은 요선으로 정해야 한다. 요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는 지을 수가 없을 것이다. 충겸이 이름을 지은 뜻의 본의가 오늘에 이르렀으니 오늘에 이르러 더욱 징험徵驗 할 수 있다. 오호라! 옛적에 단사丹砂를 만드는 재료를 구루句漏에 가서 구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산수의 소굴巢窟을 주재主宰하면서 요선의 승경을 독점하였으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산은 높으면서도 맑은 정기가 산의 구비마다 충만해 신령스러움을 자아내고 물은 맑아 청숙淸淑한 기운으로 온자하고 신령한 정기가 모여 들었으니 불사不死의 약藥과 장수長壽의 떡이 이곳에서 아니난다 하리오. 내 장차 비결秘訣을 전하여 더 이상 늙지 않고 하늘을 나는 신선神仙과 어울려 즐거이 놀고 가슴에 밝은 달을 품은 채 오래오래 살려고 하니 요선의 즐거움이 구루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더 훌륭할런지는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어 문소각文韶閣은 봉의산 아래 요선당의 동쪽에 있다 부사 엄황시절에 문소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봉의鳳儀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라고 기록되었고
□ 춘천읍지(엄황), 관동지(1820년), 강원도지(1940년) 이민구 의 문소각기문에
“우리 동방東方에서 바다를 끼고 군현郡縣이 설치된 곳 중에서 산수가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으나 영동嶺東과 영서嶺西 에 위치한 여러 고을은 더욱 기이奇異하고 수려하다는 칭송이 있어 다른 도道에 비해 으뜸이다. 그 중에서도 수춘주壽春州가 단연 제일이다. 치소의 그 동쪽으로는 봉의산이 있는데 빼어남이 하늘로 날아 들어가는 듯하고 소양昭陽, 장양長楊 두 강이 봉의산의 서쪽에서 만나 빛나게 맑은 물결을 이루며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대체로 동방 산수의 아름다움은 영동과 영서가 최고요 그중에서도 영서의 수춘주가 제일이다. 이는 정자亭子와 누대樓臺가 있어 모든 경치를 한곳에서 집중 시킬 수 있다. 관청과 공해公廨는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는데 각기 그 땅의 형세를 참작하여 건물들을 영건營建한 까닭에 공관에 기거하는 이는 봉의산이 있음을 알면서도 소양강과 자양강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요선당에 서는 소양과 장양은 알지만 봉의산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는 왼편에서 볼만한 것이 있으면 오른편에 것을 빠트리게 되고 앞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뒤에서는 반드시 잃는 것이 있으니 서로 간에 서로 가려져 한곳에서 그 아름다운 경관을 완전하게 볼 수 없는 까닭에 양쪽 모두를 보려는 이들은 항상 늘 아쉬워하였다.
이제 부사 엄황嚴惶이 고을을 다스린 지 3년만에 위로는 고을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아래로는 화목함을 도모하는 가운데 공관과 요선당邀仙堂사이의 땅을 살펴 작은 누각樓閣을 창건하고는 문소라 이름했다. 누각이 자리한 지세가 다소 높아서 남북으로 한길丈이 넘는 구릉丘陵이 막히지 않고 사방이 넓게 탁 트여서 두 가지 즐거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곧 봉의산 서쪽으로 소양과 장양의 동쪽에 바위산 봉우리가 평평하여 면목面目을 드러내고 드넓은 강물은 금대襟帶를 잡아당기는 듯하다. 구름과 안개는 생겼다 없어짐을 반복하고 배들이 모여드니 사계절의 경관과 기상의 변화를 모두 바라볼 수 있다. 수고스럽게 걷거나 애써 찾아다니지 않아도 안석案席에 기대어 곁눈질하는 사이에 모든 극진한 미관美觀이 눈으로 들어온다. 이는 마치 페르시아의 큰 부자가 온갖 보물들을 소유한 채 결코 상점으로 보내 매매하지 않고 혼자서 이방異邦의 진귀한 보배들을 마음껏 감상하며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 춘주의 봉의산과 소양, 장양은 당연 우주가 생긴 이래로 있어 왔겠지만 이곳에 언제부터 치도治道가 구현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땅에 고을살이 온 인사人士가 얼마만큼이나 현달顯達했는 지를 알 수 없다. 하늘과 땅이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산천이 은밀하게 형용形容해 낸 것을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남김없이 다 드러낸 것이니, 어찌 엄황부사의 장심匠心만이 신묘神妙하며, 하늘의 주재主宰만이 심원深遠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첨상瞻相의 경영은 사람의 힘이 미치는 바가 아니므로 귀신과 이물異物이 실로 묵묵히 그 일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조물주 또한 만물을 개폐開閉함에 있어 조금이나마 통어通御함이 없었겠는가? 산을 봉의라 이름한 것 또한 오래되었다. 봉황鳳凰은 반드시 소韶를 기다려 거동하는 법인데 소韶가 없이도 봉의로 일컬어진 것은 아마도 오늘을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인조 13년 즉 1635년 가을에 안절按節로서 수춘에 이르러 공관에서 공무를 보고 저녁에는 요선당에서 유숙留宿한 적이 있다. 이때는 이른바 아직 문소각이라는 것은 없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옮가면서 살펴보는데 태만하여 왕래한지 14년만에 이 문소각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를 상기하며 간략하나마 대강大綱을 기록하여 엄부사의 요청에 부응하는 바이다“라고 되어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수록된 박신朴愼의 한시
‘요선의 좋은 경치 오동吾東의 제일이라
물색物色이 삼라森羅하여 사망四望이 같도다
궂은 비 내리니 가을 물은 멀어 보이고
단풍이 다지니 저물녘 구름도 공허하구나
학鶴은 삼악산 흰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은 중란重欄 밝은 달 속에 있구나
우개난참羽盖鸞驂이 대기하고 있는 듯
계화桂花의 향기가 하늘바람에 떨어지누나.‘
□ 관동지(1820년대), 춘천읍지(1831년), 관동읍지(1871년) 구상具庠의 기記에
“한양의 동쪽은 협곡峽谷지대이다. 묘적妙積으로 부터는 뱀처럼 구불구불해져 가면 갈수록 험준하다. 80리 산길을 걸어 춘천의 경계에 들어서면 혹은 협소하여 담장같고 혹은 회합會合하여 옥屋과 같다. 깊은 것은 강이 되고 얕은 곳은 여울이 된다. 평평한 곳에도 돌이 많고 험하며 길은 산등성이에 희미하게 나 있다. 또 70,80리를 가면 갑자기 너른 들과 길다란 섬 그리고 언덕과 구릉이 보인다. 멀리 비치는 곳에 서남쪽 가까이로 뻗어 나온 산이 있는데 곧 봉의산이다. 그 아래에 있는 이른바 문소각은 관부官府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음악 중에서 그 성하기로는 소韶를 능가하는 것이 없다. 주나라가 쇠퇴하자 공자께서도 이를 아셨으니 만약 서경書經의 “봉황이 와서 춤을 추네”라고 한 것이 흥감興感의 이치理致는 오히려 황망함 속에 있음을 특별히 말씀하시 것이라면 문소각으로 명칭한 까닭은 무엇인가? 천하에서 지극히 정정하기로는 산과 같은 것이 없고 지극히 동動하기로는 악樂과 같은 것이 없다. 산은 인仁에 가깝고 악樂은 지智에 가까워 우禹임금께서 평토平土할 때부터 반드시 악嶽,독凟을 우선적으로 구별하였다. 대개 국도國都에서 군현郡縣에 이르기까지 진산鎭山이 아니던가? 봉의鳳儀는 곧 봉산鳳山의 이칭異稱이다. 시경詩經에서는 주나라의 아름다움을 송축頌祝하여 ‘기산岐山에서 봉황이 울었다.’라고 했으며, 사기史記에서는 ‘영천潁川의 치도治道가 군현에 이르렀다.’고 했으니 이 모두는 만물의 감응은 덕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소韶에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물로서의 산은 정靜한 것이다. 따라서 악樂의 이치처럼 흔적도 없이 유산流散되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다시 얻으려 한다면 마찰과 소란이 없을 수 없으니 어찌 반드시 울음소리에 가탁假託한 뒤에라야 소韶라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산의 가운데는 높고 양쪽이 낮아 마치 봉황이 훨훨 날아오르는 듯 하여 봉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라고 한다.
□ 관동읍지(1871년) 오수채吳受采의 문소각 중수기문에
‘수채受采는 어릴 적에 선군자先君子의 문소각文韶閣 제영題詠을 읽고 이 고을의 명승이 영서 10개 고을 가운데 으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춘주와는 서로 가까운 부양斧壤에서 벼슬살이 하면서 강산의 미관을 죄다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번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이는 한유가 등왕각藤王閣에 오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왕래하는 가운데 가슴속에는 이곳에서 여유롭게 머물면서 세사世事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련이 있었다. 지금의 춘천부사 상산商山 김제미金濟美는 나의 벗이다. 하루는 글을 보내오기를 ’문소각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퇴락하였습니다. 이제 내가 중수하고자 하니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주십시오‘ 했다. 이는 나도 일찍이 한번 주목하였지만 이루지 못한 것이었기에 충분히 나를 분발시킬만한 일이었다. 아! 문소각을 처음으로 건립한 사람과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봉의산 자락에 지어진 누각樓閣이 어찌하여 문소聞韶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가? 산의 형상이 마치 봉황鳳凰이 와서 춤을 추는 듯 하여 소韶를 들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는 하나, 나는 산 이름이 소韶에서 유래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또 소韶를 들을 수 없는데 누각의 이름을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면 무망誣妄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나는 자첨씨子瞻氏로 부터 한 마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에 의하면 “소韶는 곧 없는 것이다. 사라짐이 있는 것은 존재하는 법이니 이는 일찍이 일월日月, 한서寒暑, 회명晦明, 풍우風雨와 더불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함께 행하여져 온 것이다. 무릇 형체가 있고 소리가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경관포현磬管匏絃이다. 오호라! 이는 지자知者와 더불어 논의할 것이어라. 대체로 이 땅을 다스린 이들은 능히 성인의 교화를 부양敷揚하고 인풍仁風을 선도하여 한 구역을 크나큰 화평和平 속으로 융합함으로서 사람들은 호수와 산이 백리에 펼쳐진 땅에서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니, 강하江河의 토탄吐呑, 초목의 부앙俯仰, 조수鳥獸의 오호嗚號, 중규衆竅의 호흡呼吸 모두가 아침과 낮으로 헌미軒楣의 아래와 준석樽席 사이에서 모양을 달리하는 것은 어디를 가나 소韶가 아닌 것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은택恩澤이 극진하지 못하여 백성은 궁핍해지고 기운은 어그러져 화禍를 초래하여 원망과 저주의 소리가 들판을 가득 채워 우리 백성들이 즐겁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상실하게 되고 산천초목마저 참담하고 쓸쓸하게 만든다면 격부擊拊와 축어祝敔를 매일 같이 이 누각 위에서 울린다고 하더라도 이른바 소韶는 끝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아! 소昭가 어찌 구할 수 있는 기물器物이겠는가?
제미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근신近臣의 직책을 버리고 춘천부사로 나온 지 1년만에 이미 왕의 덕의德意를 선포宣布하고 정령政令을 이루자 백성의 즐거움이 백방으로 드러났다. 누각의 수리를 시작하여 공사를 마치고 빈객賓客, 관속과 함께 낙성落成을 보게 되었다. 낙성하는 날 고연高筵을 열고 술을 준비하여 대부인大夫人께 헌수獻壽하였다. 또 고을에서 나이가 많은 연로자에게도 술을 올리면서 연모燕毛의 예를 행하였다. 이러한 일대 행사는 춘천사람들로 하여금 효도와 노인을 노인답게 여기는 도리를 알게 하였으니 재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춘천을 다스리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할만하다. 이에 일방一邦의 사람들이 효도하고 공손하여 풍속이 순미淳美해지고, 흡족히 서로 더불어 왕의 은택에 흠뻑 젖어들게 되었다. 제미가 이곳에서 노래하고 술 마시는 취지는 오로지 성주聖主께서 내린 은혜를 춘천의 부노父老들과 공유함에 있다 해도 과장은 아닐지니, 비록 소韶를 듣지 못했다고들 하지만 나는 반드시 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병들고 노쇠하여 단 한 번도 노를 저어 산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지 못했다. 제미와 더불어 난간에 기대어 고상하게 시를 읊조리며 술잔을 들어 서로에게 권하면서 손으로는 소양강의 달을 어루만지며 함께 소소蕭韶의 음을 품평하였다 또 자첨씨의 뜻을 보다 넓혀 다시 선친의 제영 아래에 나의 이름 자字를 더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기문 짓고 시를 덧붙이기를
“ 맥국의 옛터에 예전부터 누각이 있었으니
우뚝하니 백년 만에 새롭게 서까래를 갈았네.
누각의 위 아래로 그윽한 경치 뚜렷하니
봉의산의 구름과 소양강의 달빛일세
태수太守는 마음이 맑아 다스림도 깨끗하네
아득한 옛적부터 춘천은 발디딜만한 곳이었네
억년의 세월 속에 소韶는 이미 사라졌건만
황홀한 희음希音은 허공에 가득하네
노래 한 곡 지으니 문소곡聞韶曲이라
길이 강산을 경하하며 한 구절을 띄워 보내네“ 라고 했다.
또한 요선당과 문소각에 대한 한시漢詩도 많이 전해지는데 그중 당호堂號가 정확하게 표현된 것만 발췌해 보면
* 이준李埈(조선중기의 문신)의 시詩
“춘주의 풍경은 누대에 제일이라
이제 보낸 뱃머리 언덕에 닿네
수재守宰는 마땅히 고을 백성을 근심하고 부서가 어찌 청재를 해롭게 하리오
두강은 멀리 은하수에 닿고
첩첩이 솟은 산봉우리는 한 장의 그림같이 펼쳐져 있구나
지난 날 이첩을 쫒은 것이 생각나나니
비단 옷에 싸여 옥잔을 잡을 것을“
* 이명한李明漢의 시詩
“소양강 물은 기름같이 푸르르니
동짓달 중순도 한가위 같구나
어찌 병든 몸이 힘들지 않으련만
강머리에 풍상을 피한 누각이 있구나“
* 오숙吳䎘의 시詩
“넓은 땅 높은 하늘 만상萬象이 헛되니
나그네 정취 시詩의 재료 어디서 구할꼬
산뿌리 세찬 기운 물속에 잠겼고
넓은 들 순풍은 예맥穢貊의 여풍이라
날을 듯 한 서까래 새들을 맞이하고
한가로이 떠도는 저 구름 멀리 떴다
옹기종기 모여 사는 너른 우두의 승경을 살펴보니
바로 이곳이 내가 살만한 곳이로세“ .
* 이준李埈의 시詩
“춘주春州의 풍경은 누대樓臺가 제일이라
이제 보낸 뱃머리 언덕에 닿네
소간宵盰은 정당正當 어린이를 근심하나
부서簿書가 어찌 청재淸才를 새롭게 하리요
두 강은 멀리 은하銀河에 접했고
많은 산은 한 장의 그림과 같이 퍼졌구나
거듭 지난날 이첩吏牒에 쫒은 것이 아깝다.
비단옷에 싸여 옥잔을 잡을 것을“
* 이명한李明漢의 시詩에
“소양강 물은 기름같이 푸르르니
지월至月의 중순도 한가위 같구나
어찌 병든 몸이 힘들지 않으련만
강 머리에 물정을 피한 누각이 있구나“
* 홍이상洪履祥의 시詩에
“수춘壽春 별계別界라고 일컬어지니
길 뚫은 팽오彭吳가 생각나네
이곳의 제도 이제 진鎭이 되어 있는데
산하山河는 도읍 세워질 때 그대로 일세
황량한 대대에 봉황鳳凰 보이지 않고
안개 낀 물가에 물고기만이 노니네
난간에 기대어 천고千古를 생각하니
흥망이 일 탄식 속에 묻어 나오네“
* 박태보朴泰輔 시詩에
“어지로운 산속에 들판 넓게 열려 있고
두 물이 어우러져 한 물 되어 흐르네
날아갈 듯 한 누각 세속 벗어나 빼어나고
청아한 유람 기쁘게 우후牛後의 청량한 때를 만났네
물결은 지는 해 머금고 붉은 가마를 뒤흔들고
바람은 떠도는 구름 이끌고 그림 같은 다리를 건넌다.
사흘 동안 머물러도 그윽한 흥취기 흡족한데
백년토록 이곳에 등람登覽한 이 얼마나 될는지“
* 오도일吳道一의 시詩에
“옛 뜨락 황량한 터에 수목이 짙푸른데
안개 속 우거진 수풀 보고 있자니 산새가 높이 나네
하늘에 비 멎어 처마 산색 맞이하니
창가에 강빛 비쳐 들어 여름날이 시원하네
밝은 달 그림 같은 난간에 에둘러 있고
무수한 밤 먼지 다리 위에 떨어지네
고금을 유련留連하다 보니 화려한 일 무성한데
누대 밖 여울에는 물결이 세차다“
□ 관동읍지 누정조에 “24칸이다. 기사년(1869년 고종 6년)에 새로이 건축하였다.”
영초潁樵 김병학金炳學의 중건기重建記에
“각閣은 춘주의 봉의산 아래에 있으니 문소라는 이름은 대게 이러한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옛적 내가 노닐던 곳으로서 그 규모와 형체, 조망되는 경치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앞에 있는 듯 선하다. 지금 춘주의 지부知府는 나의 사촌종제從弟인 증유仲游로서 문소각이 무너진 것을 새로이 중건하는 까닭에 경사京師로 와서는 내가 한마디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 예전 경진년에 취정공께서 의성현義城縣을 다스릴 때 말씀하시기를 산이 있으니 구봉九鳳이요. 루가 있으니 문소聞韶라 한다”라고 하신 적이 있다. 문소는 일찍이 중수가 되었었는데 춘산공春山公이 선임자에 이어 중수하였고, 중수가 완료됨에 성풍고공成楓臯公이 그러한 일을 기록하게 되었다. 저 주현州縣의 루는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그 이름한 것이 양 지역 모두 똑 같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할 만하다 하겠고 그 새롭게 함이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중유仲游의 집안 양세兩世에서 이루어 졌으니 이것이 또한 기이하다 아니할 수 없다. 하물며 물物의 영靈으로는 봉황만한 것이 없고 악樂의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소韶만한 것이 없는 것이니, 천길이나 되는 날개짓은 그 덕을 보고자 하는 것이오. 구성九成의 음音은 그 다스려짐을 찬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즉 보고 듣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한다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또한 중유의 집안만큼 하는 것이 없다. 중유는 취정翠庭의 아들이요. 풍호의 손자이며, 춘산春山의 재종조카이다“라고 되어 있다.
□ 관동읍지 김병륙의 중건문소각기重建文韶閣記에
“관사官舍의 서북쪽 모퉁이로부터 수십무 떨어진 곳 밖에 홀로이 우뚝 솟은 정대亭臺가 있으니, 멀리 사방의 산이 서로 마주보면서 빙 둘러 서있고 강이 그사이를 흐르며 연운烟雲이 아득하니 밝게 깔려 있고 백사장이 드넓게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것이 모두 바라보인다. 즉 이른바 문소각이라 하는 것이니, 과거의 요선당이다. 당堂의 건립은 황명皇明 융경隆慶년간(명나라의 연호 1567~1572 사용)에 있었으나 누차에 걸쳐 흥해지고 폐해짐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읍이 쇠퇴하고 성함이 또한 있었다. 이상을 통해서 보건데 누각의 경영을 읍이 소홀이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기사년 봄에 동창同昌으로서 이 읍의 수령직에 제수되어 장차 떠나게 됨을 귤산상공橘山相公에게 고하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문소각이라는 것을 아는가? 이것은 영서嶺西에서 등림登臨하여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제일인 곳인데 서울로부터 이틀거리에 있소. 만개의 물과 천개의 산이 서로 엉키어져 있고 그 사이로 벽돌로 깎아 놓은 듯 한 편평한 곳이 간혹 있는데 대령大嶺 아래의 험준한 곳을 지나가게 되면 갑자기 비파와 같은 강빛과 넓은 들이 편평하니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이오. 그중 봉의鳳儀라는 한 산이 공중에 치솟아 서 있는데 날아갈 듯 한 모양으로 강가에 임하여 있소. 만가萬家의 연화烟火와 천개 산의 푸른 빛깔이 항상 책상머리에 앉아 있어도 모두 감상할 수 있소. 그런데 누각을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아 지금은 폐하여진지가 오래되었소. 그러니 그대가 그곳에 머무르면서 신모神謀로서 중건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 영건하는 것의 어려움을 들어 못하겠노라고 말하였다. 관아에 부임하는 날 관館에서 조회를 보고자 회랑을 지나가다가, 전문殿門 밖에 지붕이 기울어지고 기둥의 주칠이 거의 벗겨지고 담장의 회가 반이나 떨어져 나갔고 탱주撐柱가 위태로워 얼마 버티지 못하게 되어 있어 이 각閣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내 비로서 굉장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골이 송연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비단 유람하는 곳만은 아니라 전우殿宇의 외헌外軒일지니, 이를 중수하기 위해 빨리 서둘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널리 공장工匠을 불러 황폐하여지고 더러워진 곳을 다듬어 깨끗하게 하고는 그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을 변통할 방법이 없었다. 이에 읍중邑中의 크고 작은 사민士民들이 각자 형편 닿는바에 따라 즐거이 힘을 보태었는데, 가난해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들은 직접 스스로 와서 돌과 목재를 날랐다. 공사를 시작하여 수리하고 바꾸어 갈아 끼고 하여 중신重新하여서는 소루小樓를 지었는데, 남휘당覽輝堂과 통하게 하고는 구성九成이라 편액 하였다. 이게 강산이 더욱 정채로와지고 경관이 극미亟美하여졌으니 반드시 오늘의 이루어짐을 기다린 것이라 하겠다. 또한 누에 올랐다가 우연하게도 물린 대들보 중에 강희康熙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해는 오는 중건한 날로부터 3회갑回甲인 180년이 되는 해이다. 아!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이 앞서 정해져 있던 것이니 오늘의 이름은 또한 기운이 회창回昌하였기 때문일 것이로다. 이때 역민力民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더니 말하기를 ”태수太守께서 상공相公의 면계勉戒가 없었다면 태수께서 어찌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이에 상공에게 돌아가 이러한 말을 고하니,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않도다. 오늘을 돌아보건데 성명聖明께서 임금의 자리에 계시어 뭇 일이 바로 잡아지고 백폐百弊가 일신되어 모든 것이 흥하여짐에 이 각閣 또한 그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감히 스스로 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 김병륙金炳陸의 시詩
“어느 해 봉새가 떠나갔는고
강산에 누하나 하늘에 서있네
삼주갑이 돌아와 운운이 창성하니
소소가 이루어져 봉황이 다시 돌아왔네
강희康熙로 부터 삼주갑 이미 되어
이 누각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네“
□ 관동읍지 이유원李裕元의 구성루기九成樓記에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권아시卷阿詩에 선유先儒가 계繫의 날에 봉황이 동방의 군자의 나라로부터 날아오네”라고 하였는데 장무선張茂先이 ‘그 나라 사람은 예양禮讓하기를 좋아하는 군자다.“라고 주를 달았다. 우리나라 관동의 수춘현壽春縣에는 봉의산이 있는데 군자곡과 가까이 있다. 내가 을축년에 군자곡을 지나 문소각에 오른 적이 있은 즉, 이곳은 태수가 소요하는 곳이다. 각閣은 봉의산의 한 지맥을 깎아내어 대臺를 만든 것인데 산과 전殿이 그 뒤에 특립特立하여 있는 것이 마치 기러기가 앞에 있고 순록이 뒤에 있는 듯 하며 날아가는 듯 한 형상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큰 들이 펼쳐져 있는데 맑은 강물이 둘러 있다. 눈앞에 보이는 여염집과 경치가 모두 내가 그려놓은 것으로부터 나온 듯하다. 내 말하기를 ’하룻밤 유숙할만하구나‘라고 하고는 여장을 풀고서 머물렀다. 그 후 5년 뒤에 김승선, 김병륙이 이 부府의 수령으로 보임되었기에 문소의 승상勝賞됨을 들어 권면하였더니 어러움을 말하였다. 그러다가 겨울에 지부知府가 글을 보내서는 말하기를 ’각이 이미 새로워 졌고 누樓 또한 흉기胸起 되었습니다. 그대가 나를 위해 기문을 지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고는 ’여러번 생각한 뒤에 부탁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각閣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나 누樓는 어찌되었던간에 지붕을 얹었고 각閣의 북쪽사이에 의지하여 세칸을 만들었는데 온돌煖炕을 깔아 두었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것으로 지부知府가 새로이 만든 것이다. 소韶를 취하여 구九를 이루었으니 이름을 구성九成이라. 내가 삼가 이름을 짓고는 말하기를 ’소韶는 성인의 음악樂이고 봉鳳 또한 성인의 단서이다. 지금 돌아보건데 성명聖明의 세世로서 많은 일들庶事이 바로 서고 새로워 졌는데 지부가 옛법에 따라 누각을 만들고자 여러 방면으로 비용을 조달한지 4개월 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노역이 고되다고 여기지를 않았다. 지부가 이루어 놓았을 때 난새와 봉새는 싫다하지 않고 빠르게 깃들 것이다. 이 군郡을 다스리는 것은 집을 다루는 것과 같으니 지탱하는 기둥이 지붕을 받쳐줌과 같다. 때맞추어 보수를 하였으니 옛사람들이 군郡을 잘 다스렸다고 할만하다. 지부는 예전 나와 함께 각閣의 북쪽을 두루 살핀 적이 있기에 그 치리治理의 다름과 기둥을 받치고 구조를 개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당시 나와 함께 가오장嘉梧庄에 머무르면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부친이 홀로 연주하는 비파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누각 곁에는 이름난 샘이 있어 묘정妙井이라고 한다. 그 흐르는 소리가 냉랭한 것이 마치 가곡珂曲의 절중률折中律 이 우는 것 같다. 지부로 하여금 성음聲音의 현묘함을 통하게 한 뒤, 내 장차 루에 올라 바라보고자 한다‘ 라고 되어 있다.
□ 관동읍지 규장각 신석희의 문소각기에
“ 각閣이 수춘壽春에 있은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오래도록 머물면서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수사修事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게을러 부지런하지 못함이 있고 때에 따라 굽혀 남음을 드는것이 있은 즉 다巳多에서 마침이 있을 따름이다. 춘추春秋시대로부터 교량橋梁과 정관亭館의 닦여지고 허물어짐을 가지고 백성들이 나라를 어떻게 보느냐를 짐작하였다. 수춘은 옛적의 맥국貊國인데 당唐나라 때 발해渤海의 군郡에 속하였다. 발해의 땅은 사방이 오천리로 5경京 15부府 62주州가 있었고 대씨大氏들이 왕위를 서로 전하기를 13세世 하였으니 예禮와 악樂과 물物의 번성함으로 마침내 성국成國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천년의 세월이 지나 그에 방불할만한 것을 구할 도리가 없으니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각이 중건되자 영의정 영초穎樵 김공金公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귤산橘山 이공李公이 기記를 남겨두어 문헌에 크게 남아 있다. 어진 후侯가 이미 노고를 하고 힘써서 두 공公의 문장을 받아 두었으니 수춘의 그 전하여짐이 비유하건데, 발해가 연몰 되어 징험할 길이 없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한다. 이 각閣에 오르는 사람은 어진 후侯가 때의 번거로움을 가리지 않고 생각을 부지런히 하여 이루어짐에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음은 옛적에 양숙자羊叔子가 양양襄陽의 수령직을 버리고 강한江漢의 사이에서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낸 것과 같음이 있다. 이 각이 다듬어짐을 어찌 글로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석희錫禧는 수춘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거듭 현후賢侯가 남긴 사랑에 감사를 느끼며 이에 글을 쓴다.” 라고 되어 있다.
□ 관동읍지(1871년) 조성하의 문소각 상량문上樑文에
“ 엎드려 생각하건데, 소韶가 이미 이루어진 후 자리 잡게 되어 대개 해가 뜨고 달이 뜨며 춥거나 더우며 바람 불고 비 내리는 것과 함께 병행하였음에 각각이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이에 기둥과 두공, 보를 만들고 짜 맞추어 설치하게 되었노라. 그리하여 성대하게 충만 시켜 저리 빛나도록 개관하였다. 생각건대 큰 고을이 강의 상류를 점거하였으니 저 이름 난 구역을 이루어 동국東國에 경개를 자랑하게 되었다. 맥예貊隸의 남긴 자취는 진한辰韓의 성야星野에 아득하고, 팽오彭吳가 세운 옛 비석은 황한皇漢의 풍교風敎가 먼 옛적에 미쳤음을 나타내 주네, 연기 사라지고 안개 개이는데 중국과 고려의 군사들이 싸우던 때 언제인가. 산은 높고 물은 길으니 진락공 이자현이 은거할만한 곳이었네. 이 문소각을 돌아보건 데 옛적의 요선당이네 융경隆慶 초년에 웅걸 차게 지어져 새가 날아가려고 마악 발돋움 하는 모양을 하고서 진鎭을 넓게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있네, 수춘壽春의 일성一城에 봉황이 날아와 거동하였으니 정사政事와 서로 통하게 되어 진선진미함을 이루게 되었고, 그 명칭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보니 악樂이 연주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는 이에 이르르게 되었음을 알겠네, 건물의 서까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점차 변하여가 구름만이 많이 얽혀져 있는데, 고명高明한 거처에 조감됨이 있으니 이로부터 기수氣數가 멀리까지 뻗쳐져 있네,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이치가 무상하나 아마도 조물주의 회롱함이 아닐까 하네, 잘 장식된 용마루 기울어지니 유노遺老들의 한탄 잦아지고 화편華扁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어 옛 사람들의 제영題詠을 간신히 찾을 수 있네. 부사 출충하고 자태가 아름다우며 자태가 아름다우며 경남梗楠의 재질을 갖추고 있고 깃들인 신神 충허冲虛하여 오랫동안 승명承明의 청쇄靑鎖를 싫어하였네, 피리소리에 회포를 실어 흘러 보내니 구루의 단사를 물어오네, 살구꽃 피는 마을에 농사를 권장하고 흐르는 물소리 가운데 공사公事가 있네, 소나무와 계수나무 있는 현縣에서 글을 읽으니 산골짝 깊은 곳에 장관長官이 있네,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것이 그윽한 곳에서 잔물결을 일으켜 마음에 미세한 생각을 갖게 하네, 수폐修廢 거추擧墜함에 무성하게 풀이 자라 있는 작약紅藥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근심을 지으니 절로 탄식이 나와 푸른 벽과 붉은 절벽을 돌아다보네, 명하니 한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오늘이 있기에 바래었네. 신神과 함께 도모하여 여전히 옛과 같은 것을 어떻게 하였는가? 땅이 아직 옛적 그대로 변하지 않았음에 마침내 봉록을 덜고 서로 일하여 이에 일을 성취하여 공로를 나타내었다. 달 밝게 비추고 바람 불어 우두牛頭의 좋은 경치 실어 나르고, 이슬이 자리 되고 무지개가 두공斗栱되어 용머리의 높은 기둥을 가성架成하였네, 앞의 궤적을 쫓아 백개의 담장이 모두 흥기하니 이에 힘입어 구실아치들 열심히 작업을 잘하여 놓았네. 새롭게 중건하고는 아울러 구성이라 이름하였으니 어찌 귀신이 만들어 놓은 조화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금벽金碧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울 속에는 하늘이 담겨있으며, 단확丹雘은 찬란히 빛나니 그림속의 경계로다. 높은 대臺 넓은 곳에 뚜렷이 자리하고 있어 풍이馮夷의 궁宮의 살펴보고, 별관別館이 서로 이어져 호흡하고 있어 태청太淸의 자리에 가깝다. 아름답도다! 이 각閣의 현판 이름이여, 기뻐함이 대악大樂이 혼을 되돌리는 것 같도다. 영사欞塮에는 관경筦磬의 음이 머물러 있고 구름 낀 산에는 베개와 대자리가 깔려져 있는듯하여 각 角의 운韻을 발하고 불러들이니 돌과 샘이 어찌 단부單父와 같이 되지 않겠는가? 명금鳴琴은 모든 인간계에 쟁적箏笛을 깨끗하게 하고 상수湘水의 신령스러운 북과 슬瑟은 천상계의 생소笙簫이네, 모든 재능을 끌어내어 삼가 아랑兒郞의 송頌을 짓는다.”
이렇게 춘천부사를 역임한 유경종, 엄황, 김병륙의 3편과 중앙관료로서 요청에 의해 글을 쓴 구상, 오수채, 김병학, 신석희, 조성하, 이민구의 6편 그리고 문소각과 관련이 있는 이유원의 구성루기 등 총 10편의 중건기 중수기문, 기문을 살펴보았다. 춘천부사는 당연히 건물에 대한 관리와 중건 또는 중수를 직접 집행한 인물이기에 기록물의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중앙의 인물이 쓴 글은 춘천과 어떤 인연이 있었거나 당시 부사와의 막역莫逆한 인물로서 청탁에 의해 지어진 글이기에 대체로 현장성보다는 미시적인 내용으로 일관되거나 문헌 또는 귀동냥으로 습득한 지식에 의해 지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에 춘천부사를 역임했던 인물의 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펴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요선당은 1573년(선조 6년)에 처음에는 작은 규모의 모정 건물로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1582년(선조 15년) 부사 심충겸이 규모를 넓혀 중건하며 지은 한시漢詩에서 비롯되어 요선당이란 현판을 달았으나 불과 10여년만인 1592년(선조 20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만다. 다시 1611년(광해군 3년) 부사 유경종이 중건했으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25년(인조 3년)에 부사 민형남이 중건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건물의 존폐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1646년(인조 24년) 부사 엄황이 요선당 주변에 건물을 신축하고 문소각이라 명명한다. 이후 1871년대에 발행된 관동읍지에 춘천부사 김광세의 청에 의해 1734년에 작성된 오수채의 문소각기부터 요선당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오수채는 중앙의 관료로서 춘천에 온 적이 없는 인물로 문소각의 창건이 누구에 의해 창건되고 그 시기조차 알 수 없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기문의 정확성이나 사실성에 부족한 점이 많은 곳으로 나타난다.
다시 문소각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강원도지에 1940년도에 화재로 없어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강원도지에 이궁離宮이란 명칭으로 “1890년(고종 27년) 유수留守 민두호에게 명하여 창건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은둔隱遁할 일이 있을 때 몽진蒙塵 할 것을 대비하였기 때문에 이궁이라 하였다. 지금 일부의 건물을 도청사道廳舍로 사용하니 즉 문소각이다” 라고 되어 있다.
결국 이 건물은 요선당, 문소각으로 이어지다 조선 말기에는 고종의 이궁離宮으로 변천을 거치다 사라져 버린 우리고장의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돌아봐야 될 것은 이 건물들이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건물이 추가되었는데 그중 관동읍지 이유원李裕元의 구성루기九成樓記에 “문소각의 북쪽에 의지하여 3칸을 만들고 온돌을 깔았다.”라는 기록을 볼 수도 있다. 또한 문소각과는 별도로 봉의루鳳儀樓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유경종의 요선당 중건기를 살펴보면 이 건물의 용도는 부사가 주로 소요逍遙 하는 휴식공간이며 간혹 관아를 찾는 손(문인)들을 쉬게 하는 공간으로 서민들은 이용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위치를 비정하여 보면 앞쪽으로 향로봉이 있고 왼쪽엔 대룡산이 오른쪽 오동나무 숲은 봉의산 서북쪽 자락을 말하는 것 같다. 소양강과 북한강 그리고 고산이 조망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원도청 우측 지금의 도의회 전면 주차장쯤에 있었던 건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춘천을 찾은 선비들의 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대표적 명소로 소양정과 봉의루 그리고 이 요선당(문소각) 건물의 한시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보아 춘천의 대표적 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실 소양정에서는 북동쪽의 월곡리 자락부터 서쪽의 삼악산까지의 탁 트인 경관을 볼 수 있지만 서남쪽은 바라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요선당에서는 서면쪽의 소양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를 비롯하여 고산, 삼악산, 향로봉, 금병산 등을 비롯해 춘주의 시가지 그리고 동쪽으로 대룡산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어 전국으로 알려졌던 명소이다.
현재 요선당 옛부지 아랫말 이름이 요선동要仙洞이다. 당초에는 신선을 초대한다는 뜻의 요선邀仙이었는데 왜 신선을 원한다는 뜻인 요선要仙으로 한자가 변해버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가 없다.
원고를 마치는 날 언론에서 문소각과 관련된 건축물인 우두산의 조양루朝陽樓와 위봉문 威鳳門이 제자리인 강원도청사내로 이전될 것이라는 기분좋은 기사를 마주한다.
조양루는 관아官衙를 지키던 문루門樓였음을 모두가 인지認知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엉뚱한 장소에서 마치 선비들의 문화공간이었던 루각樓閣이나 정자亭子처럼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채 멀뚱하게 서 있있다. 위봉문 또한 도 청사 내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리를 옮겼어도 문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마치 찻집의 얼굴마담식으로 자리를 지켜오지 않았던가. 이제 몇 년 후 두 건물이 옛터로 옮겨지고 나면 문소각의 그림이 아니 옛 관아의 모습이 더욱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조양루가 문루의 성격을 망각妄覺하고 관청의 휴게공간으로 변질되지 않기를 노파심老婆心에 군걱정을 해본다.
<2011 문서총서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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