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석파령

심봉사(심창섭) 2014. 1. 2. 10:53

 

 

   

                    석파령席破嶺 옛 고갯길에 오롯히 묻혀있는 추억을 따라

심 창 섭

         * 첩첩산중의 높은 낮은 산줄기와 골짜기가 무수히 이어지고 그 가장 낮은 골로 물길이 산기슭을 따라 구불구불

         핏줄처럼 흐르는 강원도 땅.

        그 많은 산줄기에 막힌 답답함에 이웃과 좀 더 너른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진취적인 도전으로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갔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 해도 조금은 낮은 곳이 있는 법, 그곳에 길을 만들어 소통과 타 지역과의 관계를

       꾀한다. 바로 고갯길이다. 그 많은 산보다 더 무수히 많은 그 비탈진 고갯길은 우리를 숨 쉬게 했고, 희망을 갖게 하였으며,

       도전하게 하였다.

          더욱 춘천은 산으로 울타리를 두른 분지盆地이기에 사방으로 고갯길이 아니면 넘나들 수 없는 지역이다.

      그중에서 대표적  고갯길이랄 수 있는 삼악산 석파령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지금처럼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는

      춘천과 한양의 통로는 삼악산 석파령 고갯길을 넘는 산길과 북한강을 오가는 뱃길뿐이었다.

      이제는 아득한 전설로만 전해지는 춘천의 관문이던 산길 석파령席破嶺 옛길을 찾았다.

      이 고갯길은 통행로서의 사실적인 의미와 함께 춘천사람들에겐 한양이라는 입신양면의 출세와 희망적인 의미였으며,

      산 너머의 오색무지개 같은 상징적 고개로 춘천의 서쪽면을 지켜왔다.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을 것 같던 숙명적 이 고갯길의 명성과 영화榮華1915년 서울-춘천간 신작로京春道路 개통과

      함께 무대에서 밀려난다.

      한 순간에 꺼져버린 조명과 텅빈 객석을 바라보며 후미진 무대 뒤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석파령을 연민의 정으로

      마주한다. 이미 분장도 미소도 지워진 채 뒤안길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석파령은 이미 옛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임도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분장한 배우처럼 너른 고갯길은 또 다른 산속의 신작로 같은 모습이었다.

      1528년 우두사의 승려 지희가 처음으로 개통한 이후에도 석파령길은 험난하고 벼랑길이 무서워 선비들조차 말에서

      내려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좁디좁은 산길길이었다. 얼마나 험준했기에 선비들이 천길 낭떠러지라 했고 실오라기 같은

      길이라 표현했던가.

 

      경춘통로의 유일한 도로로서 수많은 발자국과 희노애락을 간직한 그의 역할을 이미 끝나버렸다.

      잊혀지기만 한게 아니었다. 1990년에는 옛길을 비슷하게 따라 숲길林道이라는 비포장의 너른 산길이 만들어 지면서

      옛 모습을 잃은 채 다시 우리게게 다가왔다. 이제 쥐꼬리만큼 남은 옛길은 수많은 나무들에게 잠식당한 채 희미한 흔적

      으로 겨우 길의 모습을 간직한채 남아 있지만 옛 이름 만은 잃지 않았음에 안도할 뿐이다.

 

      괴나리봇짐에 짚신 두어 켤레 매달고 넘나들던 비탈길 고갯길 석파령.

      오랫동안 잊혀져 있던 고갯길이었지만 다시 많은 사람들의 수런거림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산길은 넓어 졌지만 고갯길을 여전히 가파르고 숨차기만 하다.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도 예전과 달라졌다. 울긋불긋 새로운 패션의 등산객들과 산악자전거 부대들이

      떼 지어 오가는 모습이 무척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한때는 전성기를 누렸던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이야기해주는

      길손들이 있어 존재감을 느끼기도 한다.   

       석파령은 해발 654m의 삼악산 북쪽 능선 중 제일 낮은 해발 350m의 고갯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길이 험하고 인적이 드물다보니 도둑떼가 가끔씩 출몰했던 험지였다고 한다.

      한양에서 춘천으로 임명받은 부임하던 샌님관리는 이 험준하고 무서운 고개에서는 계속 가마를 타거나 말로도 갈 수 없어

      간신히 도보로 걸어야만 했었다. 한양에서 부터 수많은 고개를 넘어왔는데 이 험한 또 고개를 넘고 가봐야 한다는 말에

      새로운 부사는 그만 기가 질리고 만다. 더 깊은 산골마을 밖에 없을 것 같은데다가 또 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에 마치 유배길

      같이 느껴져 그만 관직을 포기辭職하고 돌아서 일명 사직고개라고도 회자膾炙되기도 한다.

 

        이 고개의 이름은 고갯마루에서 돗자리를 반으로 잘라 앉은 내용이 유래되어 석파령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새로 부임하는 부사와 한양으로 돌아가는 전직부사前職府使가 이 고개 마루에서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부사가 이런 산골 마을에서 화문석 돗자리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며 갖고 온 돗자리를 잘라 나누어 앉았다고

      (자리 석) (깨트릴 파) (고개 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또 한편은 고갯마루에서 돗자리 하나를 펼 수 없을 정도로 터가 비좁아 돗자리를 찢어 앉아 석파령이란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고개 마루에서 부사들이 업무를 인수인계하는 교구식交龜式 이곳에서 행했다는 근거도 없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 판단된다. 노천의 고갯마루에서 같은 시간에 만나기도 힘들뿐더러 무엇보다도 형식과 권위,

      그리고 명분을 목숨처럼 지키고 살던 양반들이 이런 곳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한다는 각색된 이야기는 소설 속에 나올법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5공화국 시절만 해도 장관의 지방시찰시에도 도계道界나 시계市界에서 영접과 배웅을 하였다.

      또한 도지사가 각 시군 순방 시에도 시장·군수들이 시·군계에서 영접을 하고 배웅을 한 사례를 당연시 하였었다.

      이러한 실례로 보아 떠나는 고을 수령을 위해 지방 유지나 직속관속, 친지들이 이곳 석파령에서 석별을 정을 나누기 위한

      배웅의 장소로 여겨진다.

        또 새로운 수령이 온다는 기별이 오면 지방의 주요관속들이 이곳에서 영접을 위해 기다렸다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석파령은 이별과 만남의 장소로서, 고을수령들의 업무 인수인계가 아닌 배웅과 환영의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춘천을 바라보며 신·구 부사 둘 다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는 춘천의 인성人性과 자연경관을 한마디로

      이해하고도 남게 한다. 새로 부임하는 관리는 이런 험한 산골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서러워 울고, 구관 부사는 살아보니

      정이 든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며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석파령과 춘천을 각인시킨다.

 

 

          “ 예전 한양과 춘천의 유일한 관문이었다는 석파령을 넘는다.

            구불구불 뱀처럼 휘어진 산모롱이엔

            개망초,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예전 신구삿또 돗자리 찢어 앉았던 그 자리 고개 마루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서울로 가는 사또의 마음과

            춘천으로 부임하는 사또도 되어보며

            또 하나의 삶을 넘는다.

            산비둘기 구슬픈 울음소리 깃든

            연초록 풀잎 향기가 싱그럽다.“

             

        사실 석파령에 대한 기 발표된 문헌적 자료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사실을 확인해 보고자 다방면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러나 이미 석파령이 본래의 역할을 잃은 것처럼 아무런 소득도 얻을 수 없었다.

      석파령과 함께 파악하고 싶었던 것은 삼악산과 연계된 역원(安保驛·德斗院)에 대한 내용이었다.

       물론 옛터라고 말해주는 붙박이 노인들이 있어 귀를 쫑긋해 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는 빈터에서

      그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고 말았다. 석파령에 대한 자료를 찾다보니 여기저기에 기 발표된 것들 중 비교적 정리가

      충실한 기 발표 자료를 옮기는 것으로 가름하고자 한다.

 

     옛 문헌 속의 석파령

  

         석파령은 지금의 의암호 일대의 신연교와 신작로가 생겨나기 이전에 춘천에서 서울을 가기 위해 넘어야만 했던 유일한

       육로였다. 춘천의 지명유래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춘천시 서면 당림리와 덕두원 경계에 있는 영마루를 석파령이라 부른다. 옛날에는 춘천에서 한양을 가자면 신연강나루를

      건너 덕두원에서 골짜기를 들어가 석파령을 넘어 당림리로 나갔다. 지금의 경춘국도가 생기기 전의 옛길로 험하고 도둑이

      많기로 소문나 있었다. 지금은 인적이 끊기고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다. 서면 덕두원에서 당림리를 잇는 석파령은 춘천으로

      부임하는 부사와 이임하는 부사가 돗자리를 찢어 깔고 환송을 하던 영마루라 해서 석파령이란 이름이 생겼다.

      지금도 석파령에는 기왓장이 뒹굴고 있는데 당시의 주막과 인가가 있었던 유적이 숲속에 쌓여 있다.

      석파령에는 봄철이면 진달래와 철쭉이 무진장으로 핀다.

 

    1. 산문자료

        1) 승정원일기

             상(고종 : 편자주)이 이르기를,

           “춘천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이니, 옛날 정묘호란(1627) 때는 단지 200명의 정병을 가지고 석파령石坡嶺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뒤에 방략사防略使를 두었고 또 방어영防禦營을 둘것을 의논하였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또한 더러 감영을 그곳으로 옮기자는 의론이 있기도 하였다.

           그 지형이 믿을만한 보루가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남한산성이나 강화도와 차이가 없다.

          이제 이미 진어영鎭禦營으로 되었으니 기전畿甸으로 이속하고 유수留守를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래야만 견고하게 방어하고 미리 대비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신순택은 아뢰기를

          “영제의 변통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입니다. 진어영을 기전으로 이속시키고 유수를 두는 것은 또한

            관제官制와 연관되니 사체로 보아 널리 자문하고 상의하는 것이 옳을듯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고 김홍집은 아뢰기를

            “ 춘천은 고대에 일국의 수도였습니다. 그 지형은 실로 가장 중요한 곳인데다가 이제 이미 영을 설치하였으니

            유수를 두어 그 위상을 중하게 하는 것도 시의적절한 조치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쓰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

          “관문의 방어를 중시하는 것은 울타리를 견고히 하고 방어를 엄격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미리 철저히 대비하고 전담하여 통솔한다면 수도가 견고해져서 위급한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사도四都를 설치한 이유이다. 그 제도가 상황에 따라 생겨나고 명칭이 때에 따라 변통된 것이 또한 여러 번

           있었으니 모두 지형을 헤아리고 시의를 참작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춘천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곳

           으로 유수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진어사는 춘천부유수겸 진어사로 고쳐서 하비하고 기전과 관동부근의 몇 개 고을을

           모두 그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라 그 규례는 한결같이 사도四都에 속읍屬邑을 둔 것을 따르고, 제반제도의 방략方略

          해당 수신守臣이 상고하여 마련하되, 총리대신에게 취의就議하여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2) 만기요람萬機要覽

            영로 : 기락천幾落遷 동쪽 통로. 석파령 서쪽통로. 원창현 남쪽 통로, 보통천, 북쪽통로

 

        3) 강상록江上錄

            10일 아침 일찍 떠나 석파령을 넘었다. 고개가 험준하기 짝이 없는데 걷기도 하고 가마를 타기도 하며 간신히 넘어 왔다. 

            신연강을 건너 부의 남촌에 들어 왔을때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었는데 부수府守 황중근이 우거할곳에서 미리 기다

            리고 있었다. 주인의 이름은 박선란인데 호장戶長으로 상중喪中에 있다고 하였다.

 

         4) 춘성록春城錄

            모르겠다마는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벼슬이 깎이고도 부족해서 방축放逐을 당하고 방축을 당하고도 부족해서 갇히는

            몸이 되었는가. 춘성, 춘천이 아무리 궁벽한 곳이긴 하나 사람을 죽일 수 야 있겠는가. 이때의 기록을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 춘성록이라 한다. 정사년 가을에 방옹(신흠)

 

            “ 백팔 염주 굴리면서 올라갔나니 지금도 꿈속에 휘감기는 구절양장(일백팔반 수상 즉금주몽요양상)”

              이것은 산곡(山谷 宋) 황정견이 남쪽으로 귀양 갔을 때 지은 시이다.

             나는 석파령에 이르렀을 때 그 험준함에 겁을 먹은 나머지 말을 놓아두고 걸어갔는데 바로 아래 낭떠러지를 보고

             무척이나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가 생각하여 보니 이 고개가 오령이나 삼위의 길보다는 나을텐데 오히려

            이렇듯 험하여 걷기가 어려운데 산곡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춘천은 평소 거처할만한 골짜기와 산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집을 지을 터를 잡을 때

            꼭 춘천을 말하곤 하였다. 내가 처음 이곳을 왔을 때에도 거지반 춘천이라는 이름 때문에 끌려 다녔는데,

            막상 가서 보건대 소양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평할 뿐 그다지 기이한 절경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땅도 척박해서 메밀이나 귀리 콩 등을 많이 심었는데 민간에서 밥을 먹는 자는 드물고 죽을 쑤어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땅이 사방으로 막혀 상거래 하기에 불편한 관계로 고을에 호족豪族 하나 없이 순박하고 어리숙하기만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영남지방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근년이래로 이곳의 풍속역시 돈독했던 옛날의 그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

 

          5) 청평록淸平錄

             춘천에서 - 당시 조카 광환光煥이 춘천 부사로 있었다. - 말을 보내어 맞이하려 왔다. 석파령을 넘었는데

            고갯길이 가파르고 비좁아서 겨우 말 한 마리만 지나갈 수 있었으며, 숲은 울창하고 골짜기는 깊어 눈이 어지럽고

            심장은 떨렸다. 기억건데 지난 임진년에 왜구들을 피하여 피난할 적에 온 집안 사람들이 걸어서 이곳을 넘어 갔는바,

            감개가 일면서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신연강을 건넌 다음 봉황대鳳凰臺를 바라보았는데,

            대가 소양강의 서쪽 물가에 있어서 자못 볼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다.

            그러나 몸이 피곤해 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들러볼 겨를이 없었다. 춘천부 안에서 묵었는데 안보역에서 이곳까지는

            30여리이다.

 

          6) 풍악록風樂錄

             22(갑자) 맑음. 아침에 이생 석이 왔고, 최이억도 왔다. 조반을 먹고 출발하여 유군과 함께 봉의루鳳儀樓에 올라가

            보았다. 그 고을 뒷산이 날아가는 봉의 형국이기 때문에 산 이름이 봉산이고 누대 역시 그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을에 모양은 매우 그럴싸 했으나 거민이 100호도 안되는데다 성지城池도 목석木石도 없어 국가를 지킬 요충지는

           못되었다. 만약 삼악산에다 관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보장保障이 될 법했다.

           우리들이 봉의루에 올라 있음을 주수가 듣고 술과 배를 가지고 와 행장에 챙겨 주었다. 외삼촌을 뒤좇아 신연 나룻가에

           와서 만나고 신완申椀과도 서로 만났으며 만호萬戶 반예적潘禮積이라는 자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석파령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깍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까지의 거리는 20여리였다. 거기에서 또다시 20여리를

           더 가면 안보역安保驛에 다다르니 청풍부부인淸風府夫人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있는 재사齋舍가 매우 조용하여

           거기에서 잤다. 저녁에는 나와 강가를 거닐었다.

 

         7) 동정기東征記

           18. 아침 흐림, 때로 비가 내렸다. 저물녘에 날이 개었다. 해가 떠올라 출발하여 석파령에 올랐는데 고갯길이 몹씨

           험준하여 걸으며 말을 타지 않았다. 빗줄기가 제법 굵어 옷이 모두 젖었다. 고개를 내려오니 강이 있었다. 강 건너

           들판이 넓게 보이며 심안이 비로소 편해졌다. 배로 신연을 건너 오후 춘천읍 근저에 이르러 의생醫生 박효철의 집에서

           머물렀다. 부사 남취성이 찾아왔다.

 

         8) 임하필기林下筆記

           이 고개는 춘천 초입에 있다. 가정嘉靖 무자년(1528)에 우두사牛頭寺의 승 지희智熙가 고갯길을 뚫었다.

          우두들에는 옛날에 팽오통도비彭吳通道碑가 있었다.

 

 

      2. 한시자료

        1) 내가 장차 수춘으로 귀양길을 떠나려면서 석파령이 험난하다는 말을 듣고 즉흥으로 짓다[余將貶壽春 聞席破嶺之險 口占]

 

             말 들으니 아련한 석파령 고개 / 迢迢席破嶺

             높은 곳은 하늘 가 우뚝 솟았대 / 高處出雲霄

             수목 늙어 가지는 해를 떠받고 / 木老枝撐日

             강물 비어 언덕이 다리 됐다나 / 江虛岸作橋

             집 나와 돌아갈 꿈 요원하고요 / 別家歸夢遠

             나라 떠난 이 몸이 멀어져가네 / 去國此身遙

             나그네 혼 애닲게 만들지 말라 / 休遣覊魂斷

             대초 글 지을 사람 있지 않을 걸 / 無人賦大招

 

        2) 석파령을 내려가 신연의 강어귀에 머무르다[下席破嶺泊新淵江口]

 

            재를 내려 강어귀 따라가다가 / 下嶺沿江口

            배를 옮겨 옛 성터 들어왔구나 / 移舟入古墟

            낡은 성은 맥국의 자취 남았고 / 弊城存貊跡

            끼친 풍속 진 나라 여파 같다네 / 遺俗似秦餘

            들녘은 먼 외론 산 닿았다면은 / 野接孤山逈

            하늘은 텅 빈 두 강 이어져 있네 / 天連二水虛

            그 누가 알았으리 백 사마께서 / 誰知白司馬

            늘그막에 광려산 의탁할 줄을 / 垂老托匡廬

 

        3) 석파령을 내려올 때의 운을 다시 쓰다[疊下嶺韻]

 

           소양강의 물가에 얼음 풀리니 / 泮氷昭陽渚

           봄기운이 맥국의 옛터에 나네 / 春生貊國墟

           한 백년 구레나룻 짧아졌고요 / 百年雙鬢短

           만사에 몸 하나만 남아 있구나 / 萬事一身餘

           산이 멀어 눈썹이 가느다랗고 / 山遠眉還細

           시내 길어 소리가 절로 조용해 / 溪長韻自虛

           분망한 몸 어느 때 안정되려나 / 棲棲何日定

           간신히 남의 집을 빌려 얻었네 / 辛苦借人廬

 

       4) 적적하여[寂寂]

 

           적적해라 사립문 오래 닫혔고 / 寂寂門長掩

           뉘엿뉘엿 햇살은 절로 기울어 / 依依日自斜

           떠도는 몸 아직도 그대로인데 / 旅遊猶未返

           세상사는 갈수록 끝이 없구나 / 世故轉無涯

           우교에 트인 하늘 가마득하고 / 天闊牛郊迥

           석파령 감돈 강물 아스라하네 / 江回席嶺賒

           해마다 애를 끊는 나그네의 한 / 連年僑客恨

           고향집 그리는 때문만이랴 / 不獨爲思家

 

        5) 소양 죽지가[昭陽竹枝歌] 3

         기일(其一)

           석파령 마루턱에 해가 질 무렵이면 / 席破嶺頭日欲落

           신연강 어귀에도 길손이 뜸하다네 / 新淵江口行人稀

           짧은 돛대 가벼운 노 파도타고 가는 저 배 / 短檣輕枻亂波去

           봉황대 아래 낚시터를 멀리서 가리키네 / 遙指鳳凰臺下磯

 

        기이(其二)

           예 사는 사람들아 난랑곡일랑 불지 말게 / 居人莫唱赧郞曲

           그것 들으면 나그네 애간장이 녹는다네 / 遊子此時空斷膓

           일백하고도 여덟 굽이 그 곳이 어디라던가 / 一百八盤何處是

           자고새 소리 속에 나무들만 푸르르네 / 鉤輈聲裏樹蒼蒼

 

         기삼(其三)

           물이 불어 다리 아래 여울물은 없어졌고 / 水大已無橋下灘

           비에 가려 청평산도 보이지 않네 그려 / 雨昏不見淸平山

           호숫가 주점들이 말 만큼이나 적어 보이고 / 湖邊列店小如斗

           밤중에는 사립문이 물에 푹 잠기었네 / 半夜柴扉純浸灣

 

       5) 석파령席破嶺

 

           동으로 떠나는 길 모두 구불구불해지고 / 驛程東去轉崎嶇

           석파령 높고 높아 한 모퉁이에 솟았네 / 席嶺高高峙一隅

           골짜기 천 길이라 내려다보면 가슴이 떨려 / 濬壑千尋看自悸

           백 굽이 벼랑에 걸음마다 부축받네 / 懸崖百折步仍扶

           촉촉 구절양장 험하다 하나 평지 같을 게고 / 羊腸亦險猶平地

           새도 겨우 지나가니 참으로 두려운 길이라 / 鳥跡纔通信畏途

           세상살이 어찌 혼자만 이렇겠나 / 行路世間何獨此

           몸 기울여 서쪽 바라보며 길게 숨을 쉰다. / 側身西望秖長吁

 

 

      6) 고개 아래서 강을 보다下嶺見江

          여행이 비록 여러 형태라지만 / 行邁雖多勢

          평탄함과 험준함 꼭 두 가지라. / 夷險終二致

          험준하구나, 석파령이여 / 危哉席破嶺

          떨려서 쉬이 넘지 못하네. / 慄慄度未易

          굽이굽이 비탈길에 말을 타니 / 行馬九折坂

          만 길 높이에 몸이 떠 있는 듯 / 疑身萬仞地

          골짜기 아래 숲으로 바람이 불고 / 風吹壑下樹

          떨어지는 누런 잎에 몇 번이고 놀라네 / 屢驚黃葉墜

          의암 험준한 길 다했음을 알려주고 / 衣巖告險訖

          밑에 도착하니 떨리던 맘 가라앉는다. / 低節降忡悸

          서리 찬 하늘 높아 아득하며 / 霜天高無閡

          멀리 강은 허공에 걸려 있는 듯 / 遠江若虗寄

          누가 만 리의 형세를 말하는가 / 誰謂萬里勢

          바로 여기서 한번 말고삐를 돌려야하리 / 直此一回轡

          마치 대량의 들판을 보는 듯하여 / 如睹梁野然

          감히 초몽에 견주어 보련다 / 堪引楚夢比

          번거로움 사라져서 남음이 없으니 / 煩悁暢無剩

         갈수록 오래도록 마음 자유롭구나 / 愈往永以肆

         고운 언덕에 나그네 기분 모이고 / 脩原斂遊氛

         아름다운 경치 명랑한 교태를 빌린 듯 / 欹景假明媚

         경쾌한 배는 물살 일으키며 가깝고 / 輕舟漾且近

         노 짖는 소리 마음에 오래 남는다. / 櫓聲永人意

         처음 감상하며 성급히 한번 떠벌리자 / 初賞急一誇

         닻줄 부리는 소리 뒤로하고 도착하였네. / 弄纜叫後至

 

    7) 석파령을 오르며上席破嶺

        위태로운 돌길 까마득 한데 말에 맡겨 가니 / 危磴岧嶤委馬行

        시야에 천길 산과 구름 나란히 들어오네. / 看來千嶂與雲平

        산새는 짹짹 노래하며 상대하여 지나가고 / 山禽决决鳴相過

        계절 따뜻하니 앞 숲에 나무 찍는 소리 / 時和前林伐木聲

 

    8) 배에서 석파령을 바라보며船上望見席破嶺

        긴 협곡 중간에 작은 하늘이 열리며 / 長谷中開小洞天

        석파령길 허공에 걸렸음을 곁눈질하고 / 傍瞻席破嶺途懸

        산허리 굽이굽이 모두 구름다리인양 / 峰腰屈曲皆雲棧

        산 중턱 희뿌옇게 혹 화전을 일군다. / 崖腹糢糊或火田

        새 한 마리 내리 날아 시야를 벗어나고 / 孤鳥倒飛愁極目

        행인은 실오라기 길을 빗겨서 넘어가네 / 行人斜度細緣邊

        경쾌한 배에 높이 누어 지금 몸 편하니 / 輕舟高卧今身逸

        말을 타고 관문을 다니던 옛날을 추억하네. / 鞍馬間關憶昔年

 

     9) 삼악에서 두보의 오반시에 화답하다[三嶽和五盤]

         높고도 큰 저 석파령은 / 崔崔席破嶺

         대체로 삼악산의 줄기인데 / 是蓋三嶽餘

         비록 아름다운 봉우리는 없지만 / 雖無娟妙峯

         국경의 방비는 꽤 튼튼하겠네 / 捍禦頗不疎

         왕조란 자와 최리란 자가 / 王調與崔理

         공연히 솥 안의 고기가 됨으로써 / 浪作釜中魚

         한 나라 관리가 바다를 건너오니 / 漢吏空越海

         답답하여라 어떻게 살 수 있으랴 / 鬱鬱安能居

         아득한 저 청류관에는 / 漠漠淸流關

         초목의 새싹이 막 어우러졌고 / 草木嫩初舒

         역참 또한 아득히 바라보이는데 / 亭郵杳相望

         우거진 잡초를 누가 제거할거나 / 榛莽誰能除

         옛 성은 끊어진 가퀴만 남았고 / 古城餘斷堞

         부서진 절은 빈터에 부쳐 있어라 / 破寺寄空墟

         이것을 인하여 인간 세상살이가 / 因知人世間

         곳곳마다 여관에 붙여짐을 알겠네 / 處處委蘧廬

 

     10) 석파령石坡嶺

         덕두원은 한창 단풍잎마르고 / 德杜園中楓葉枯

         신연강 너머로 어지러이 날아가는 새 / 新延江外亂飛烏

         때 맞춰 예황倪黃의 솜씨로 / 來時合付倪黃手

         가을 산 행려도를 다투어 그려대네 / 傡寫秋山行旅圖

 

    11) 석파령席破嶺

         쌍 깃발에 다섯말 수레타고 굽이굽이 도니 / 雙㫌五馬引盤紆

         구름에 묻힌 고개에 장엄한 맥국의 도읍이라 / 置嶺雲間壯貊都

         오래전에 중 지희가 고갯길을 내었다 말하고 / 自古開山稱釋智

         지금도 통도비 세운 팽오를 기억하네. / 至今通道憶彭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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