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춘천이야기 - 청평사 공주와 상사뱀 설화 문헌 비교

심봉사(심창섭) 2013. 3. 17. 17:24

 

1, 청평사지(淸平寺誌)

이 전설을 수록한 해방 전 문헌기록으로는 1942년도에 발간된 “유점사본말사지”중의 청평사지 부분에 1915년 강원도 참여관 이학규가 쓴 “청평사역사서”라는 서문에 실려있다.

이 책 청평사지 715쪽에 실린 두편의 상사뱀 전설이 실려 있는데

“당나라의 평양공주가 몸에 상사뱀이 붙었는데 여기와서 가사공덕을 쌓음으로써 뱀의 원한이 풀어졌다. 이에 공주가 이 절을 중창하여 보현원이라 하였다.”

 

2. 춘천풍토기 1935년 일본인 기자가 쓴 춘천의 종합보고서 제8장 “춘천의 명승고적가운데 ”청평사“항목 PP 118~119에 기록된 내용으로

청평사에 영지라 부르는 못이 있다. 옛날 명나라의 공주에게 애인이 생기자 문왕(文王)은 화가 나서 그 애인을 사형에 처했다. 그랬더니 뱀 한 마리가 금방 공주의 온몸을 휘감았다. 공주는 슬퍼하면서도 이 뱀에게 자기의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 영혼을 위로하면서 수도하러 여러나라를 다녔다. 이렇게 떠돌다가 청평사에 이르렀는데 어느 날 이 못에 공주의 모습이 비추자 뱀은 그 그림자를 보고 과연 어느 것이 과연 공주인가 혼동하여 갑자기 못속에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후 공주는 청평사를 안락의 땅으로 정하여 영주하였다고 한다. 또 이 못은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늘거나 줄지 않고 견성암의 그림자가 여기에 비친다고 한다.

 

3. 향토지 서기 173년에 처음 절이 이룩되었을 때는 초가집에 보잘 것 없었고 그저 암자에 지나지 읺았던 것이다. 그 당시 당나라의 공주가 상사병에 걸려서 중국내에 있는 의원을 전부 궁전으로 불러 치료하였으나 그 상사뱀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왕은 딸에게 이야기 하기를 이제는 할 수 없으니 중국에 있는 절을 전부 다니며 부처님께 빌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공주는 아버지의 명을 받고 그날부터 중국에 있는 절을 다니면서 기도를 드렸고 중들도 정성껏 부처님께 기도를 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공두는 활 수 없이 이 뱀하고 같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왕의 딸이 이런 병에 걸렸으니 아버지의 위신을 생각하여 이웃나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정처없이 발길을 옮긴 것이 바로 우리나라였다고 한다. 걸식을 하며 돌아다니면서 절을 찾아 기도함을 잊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청평사로 오게 되어 뱀에게 발하기를 여기 있으면 절에 들어가 밥을 얻어 오겠다고 하고 얼른 들어가 밥을 얻어가지고 나와 보니 그뱀은 벌써 죽어서 만져보니 파삭파삭 말라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주는 어찌나 기뻣던지 그 길로 돌아가 아버지께 고하니 왕은 즉시 신하를 시켜 절을 크게 짓고 기둥에는 금을 올리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층대 및 주춧돌 댓돌을 전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현재 주춧돌 및 댓돌들이 다 국볼 보존되어 있다. 이리하여 청평사는 널리 알려졌고 우리나라에서는 둘째로 큰 절이었다. 그런데 1910년 왜놈이 들어와 절을 구경하고 이런 촌에 너무 잘 지어 놓았다고 하며 불을 들고 다니면서 기둥에다 전부 불로 끄실러 놓고 가는 도중에 그 왜놈은 벌을 받고 기내기벼루에 떨어져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약 왜놈이 불을 지르지 않고 6.25사변만 안이었다면 이고장의 큰 자랑거리인 절이 되었을 것이다

 

4. 춘주지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에 있는 청평사에는 신라 선덕여왕(서기 632~647)과 당태종(서기 627~650)의 재위 시대에 일어난 나당 국제 친선에 청평사의 문수보살 감응과 가사불사공덕을 겸한 유명한 당나라 평양공주와 상사뱀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아득한 옛적 어느날 구룡폭포(현 구성폭포)앞에 당나라의 복색을 한 두 여인이 폭포의 장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들은 이 전설의 주인공인 당태종의 딸 평양공주와 그의 시녀였다.

평양공주는 본국에 있을 때 사랑하던 청년이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청년은 죽어서 상사뱀이 되어 살았을 때 밤이면 찾아가던 공주궁에 들어가 공주몸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공주는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나라 안에 있는 유명한 복술가를 전부 불러들여 성대한 제를 올리는 한편 전 의원들을 불러 치료 하였지만 공주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왕은 최후 수단으로 전국 사찰을 순례하면서 부처님께 지성껏 빌어 보라고 했다.

공주는 부왕의 명에 따라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온 사찰을 순례하면서 빌어 보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이 때 신라에서 간 구법승의 말을 듣고 신라에 건너와 산자 수명한 해동의 산하를 두루 다니면서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그러던 어느 날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다.

두 여인은 그 곳 동굴(후세 사람들이 이를 공주굴이라 함)에서 노숙을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 종소리를 듣고 자기 몸에 서려있는 상사뱀에게 “내가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올 터이니 잠시 몸에서 내려오실 수 없겠습니까? 제 몸이 너무 피로해서 걷기가 힘겨워 드리는 말씀이오니 너무 고깝게 생각지 마시고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라“고 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여태까지 말을 안 들어오던 상사뱀이 순순히 말을 듣고 몸에서 내려오지 않는가? 그때 절에서는 가사불사 법회를 거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주는 지금의 공주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가사에 서너 바느질 뜬 후에 법당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염불을 하고 있었다.

한편 동굴에 남아 있던 상사뱀은 기다리다 못해 공주를 찾아서 절에 올라가 정문을 들어 가려고 하니 별안간 뇌성벽력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져서 마침내 그 돌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문을 회전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주는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법회가 끝난 후 밥을 얻어 가지고 동굴에 돌아 와 보니 의외에도 상사뱀이 죽어 폭포에 떠 있었다. 두 여인은 깜짝 놀랐으나 시원하기도 하고 한편 가련하기도 하여 사랑하던 청년의 화신을 정성껏 묻어주고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당태종은 기뻐하여 재상 저수량(서기598~658서예대가)에게 공주의 혼인 때 쓰려고 비축했던 금덩어리 3개를 주어 보내어 화려한 법당을 세우게 했다.

저수량은 금 한 개로 법당과 공주이궁과 저수량 봉교서비를 세우고 또 한 개는 장차 증건할 때 쓰라고 어디다 묻었으며 나머지 한 개는 후일 공주의 귀국 여비로 주고 떠났다. 공주는 오랜 세월 이 곳에 머무르며 부처님을 조석으로 공야 경례하다가 구성폭포 위에 삼층석탑을 세워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고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이 탑을 후세 사람들은 공주탑이라고 한다.

이 때 신라는 외교적으로 구구려 백제 일본 등에 의하여 고립되어 있어 친당 외고를 모색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신라와 당나라와는 급속도로 친밀해 져서 삼국통일대업에 크게 기여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서기 173년에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가던 도중 청평사를 창건하였을 때에는 보잘것 없는 조그마한 사찰 이었으나 이로 인하여 대사찰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가사불사 공덕의 영험이 많은 사찰로 전해오고 있다.

 

5.  기타 청평사 전설

  *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 소재 청평사에 위나라 공주와 뱀과의 괴기한 러브 스토리가 전해 온다. 상사병에 걸린 당나라 공주는 날이 갈수록 병이 더했고 공주를 사랑하는 뱀은 그녀의 몸에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임금은 나라 안에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모두 불러들여  성대한 제를 올리는 한편 전 의원들을 불러들여 치료를 시켰지만 공주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했고 뱀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딸에게 사찰을 순례하면서 부처님께 빌라고 하였다. 공주는 부왕의 명을 받들고 그날부터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온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지성으로 부처님께 빌었다. 그러나 도시 나을 줄을 몰랐다. 공주는 하는 수 없이 뱀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다고 결심하였다. 한편 공주는 부왕의 위신을 생각해서 멀이 이웃나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산 넘고 물 건너 정처 없는 길을 떠나 발길 닿은 곳이 바로 우리나라였다. 걸식유랑하면서도 절을 찾아 불공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는 춘천에 있는 청평사로 오게 되었다. 배고 고픈 공주는 뱀에게 여기 있으면 절에 들어가 밥을 얻어 가지고 어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여태까지 말을 안들어 왔던 뱀이 순순히 말을 듣고 몸에서 떨어졌다.

공주는 기이한 생각이 들면서도 절에 들어가 밥을 얻어 가지고 나와 보니 뱀이 죽어있지 않은가? 하도 이상해서 뱀을 만져 보았다. 파삭파삭 말아 있었다. 공주는 어찌나 기뻤던지 곧바로 고국에 돌아와 부왕께 이 사실을 아뢰었다. 부왕도 크게 기뻐하였다. 즉시 신하에 명하여

청평사를 크게 짓게 하고 기둥에 금을 올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서기 173년에 이 절이 이룩되었을 때는 조그마한 암자였던 것이 이로 인하여 대사찰로 군림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1910년경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이 절을 구경하고는 이런 촌에 절을 너무 잘 지어 놓았다고 하면서 불을 들고 다니며 기둥을 전부 그을려 놓고 돌아가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은 벌을 받았다고 한다

 

  * 공주를 사랑하다 뱀이 된 총각

옛날 옛적에 중국에서 있었던 일, 어느 미천한 가정의 총각이 가엾게도 임금의 딸 공주를 사랑했다. 비록 그의 가정이 미천하기는 하지만 그 총각의 순박한 진실성에 공주도 마음이 차츰차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임금은 당황했다. 임금은 미천한 총각으로부터 공주를 떼어놓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그 총각이 공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집념은 그만큼 강했다. 이에 임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미천한 총각을 죽여 버렸다.

그후 어느날 밤 공주가 혼자 있는 방에 커다란 뱀이 기어들어왔다. 공주는 놀라서 질겁을 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뱀은 공주의 몸을 아래세서부터 칭칭 감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영영 공주를 풀어 주지 않았다. 뱀은 대가리로 바로 공주의 얼굴 앞에 대고 쏘아보며  혓바닥을 날름날름 놀렸다. 공주가 음식을 먹으려 하면 뱀이 먼저 빼앗아 먹기도 하였다.

공주는 그 뱀이 바로 자기를 사랑했던 총각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임금에게 죽임을 당한 미천한 총각이 죽어서 뱀이 된 것이다. 뱀은 끝끝내 공주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공주는 날로 여위어 갔다. 임금은 나라 안에서 유명한 점장이나 의원들을 불러 보았으나 허사였다. 온갖 방법이 다 허사로 돌아가자 임금은 공주에게 시키기를 중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빌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허사였다.

중국의 명산대찰은 효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공주는 고려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빌기로 하였다. 고려 땅에 들어와서 공주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에 있는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청평사 입구에 이르러 공주는 뱀에게 말하였다.

“절에 들어가 불공을 드리고 올 테니 잠깐만 나를 풀어다오.” 중국에서는 전혀 말을 듣지 않던 뱀이 이번에는 이상하게 말을 잘 들었다. 공주는 절에 들어가 가사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절 입구에서 공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뱀은 아무리 기다려도 공주가 나오지 않으므로 절로 기어들어갔다. 뱀이 회전문에 이르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울리며 폭우가 쏟아졌다. 뱀은 회전문 앞에서 회전하여 물에 쓸려나갔고 공주는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 회전문이 지금도 남아 있고 청평사 계곡의 공주폭포는 그때 뱀이 쓸려간 폭포이다.

 

 

 

 

* 이 글들은 각 문헌의 원문을 가능한 그대로 옮기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일부 철자나 어휘가 표준어와 다를 수 있음을 참고하시기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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