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 자리했던 옛 극장의 추억을 반추하다.
심창섭
*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해를 넘길 때마다 늘어가는 나이의 숫자가 버겁게 다가온다. 처음 나이테의 간극이 너무 멀어 완만했던 세월의 굴곡이 언젠가부터 가까이 다가서며 앞뒤를 돌아볼 틈조차 주지 않는다. 풍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했다. 어제 그리도 신기했고 탄성을 지르던 것들도 오늘에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것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무디어지는 적응력이 무력감으로 이어져 의기소침해 진다. 세속적인 변화의 속도에 맞추고자 새로 구입한 스마트폰이 오히려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빠르게 진보하는 것이나 진화하는 것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우치는 나이가 되었다. 인터넷을 못하는 친구들을 비웃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나 자신도 현대적 기기가 두려워 점차 외면해버리는 기계치가 되어간다. 주변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아니 이미 소멸된 수많은 유무형의 것들이 그립기만 하다. 아이들에게 접해보거나 본적조차도 없는 과거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결코 자랑스럽거나 연륜으로 치부할 수 없음이다. 경험이나 연륜의 지혜는 이미 한물간 과거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나마 고향의 풍경을 잊지 않으려고 가끔씩 뒤를 돌아보지만 기억은 부질없이 희미해만 진다.
디지털시대라지만 아나로그적 기억도 필요할 때가 있다. 문득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버린 수많은 과거들을 위해 잠시 타임머신에 올라탄다. 과거에 연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작은 기억의 되살려 나를 돌아 보고자함인지도 모른다. 너무나 많은 것을 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 나의 행위는 보잘것없는 군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마저의 기억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노파심에 너스레를 떠는 마음의 편린일 뿐이다.
묵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춘천에는 꽤나 많은 극장이 있었다.
대도시 이외에는 극장이 없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 그 당시 문화의 상징 아이콘은 바로 극장이었다. 그때는 영화관이라 부르지 않았다. 극장에 영화보러 간다고 했으니 .극장과 영화관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극장과 영화관은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때는 영화만 상영하는 게 아니라 일년에 서너번은 가수들의 쇼나 정치행사 등도 열렸다. 코미디언들이 공연시작 전 무대 암막 앞에서 재치있는 말솜씨와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웃음조차 귀하던 시절 한참을 웃고 나면 어린나이이었음에도 가슴이 후련해지는 걸 느끼기도 했었다. 또 때로는 창극단 공연도 있었다. 짙은 화장을 한 배우들이 노래와 함께 연극을 보여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한국적 오페라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맛깔스러울 것 같다.
이제는 멀티플렉스라는 대형 복합영화관에 밀려 정겨움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옛 극장을 떠올려 보자. 중소도시인 춘천에 무려 10개의 극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현재 이 극장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안타깝다. 작은 도시에 너무 많은 극장이 있어 경쟁에서 밀려 난 것일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총체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여러 개의 극장이 있었지만 나름대로의 색깔과 특징을 가지고 소위 1류에서 3류로 분류되며 개봉관, 재개봉관, 동시상영관 등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층을 구분하고 있었다.
춘천에는 소양, 제일, 시민회관, 문화, 중앙, 신도, 아세아, 육림극장, 남부 등 9개가 있었고 인근 춘성군 신북면(샘밭)의 쌍용극장까지 모두 10개였다. 소위 1류는 육림, 소양, 문화극장이었고, 나머지는 언젠가부터 모두 2~3류 형태로 운영되다 문을 닫았다. 사실 10개라는 숫자는 무의미하다. 제일, 시민회관은 아주 오래전에 폐관된 극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극장은 1970년대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TV출연으로 인하여 서서히 몰락을 길을 갔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생각해보니 군인극장을 제외하고는 한두번씩 모두 가본적이 있어 지긋이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겉모습을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는 소양과 육림, 그리고 아세아 극장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흔적조차 잃어버렸다. 희미해가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다보니 기억의 실마리에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의 기억을 빌려보려고 여기저기 귀동냥을 해보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관청의 관련부서 담당자에게도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여기저기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기록물과 가물거리는 작은 기억을 모아 더 잊기전에 정리해 보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옛 것에 도취하여 회귀하거나 머물자는 의미가 아니다. 온고지신마음으로 더 의미있는 춘천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1899년 미국인 여행가인 엘리아스 버트 홈즈(Elias Burton Homes)가 고종황제 앞에서 상영한 것이 최초였다고 한다. 또 1903년도에는 서울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가 창고에서 입장료를 받고 일반인들에게 단편영화를 상영해 이 신기하고 놀라운 활동사진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춘천과 극장 ]
① 한국전쟁 이전의 극장
춘천의 극장역사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된다. 1939년 11월 1일자 동아일보에
“춘천에는 오락긔관이라고는 하나도 업든바 봉송승리峯松勝利라는 사람이 지난달부터 춘천극장의 공사를 시작하야 지난 25일에 그 공사가 전부 끗낫슴으로 그날 오후 7시부터 관민 수백명과 춘천주재 각 신문긔자를 초대하야 성대히 락성식落成式을 거행하얏다. 한다”라는 기사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위치는 알 수 없었지만 춘천극장이 최초의 극장 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후 개관한 읍애관이라는 극장에서 1934년부터 영화를 상영한다는 기록과 1938년 12월 7일자 매일신보에
“춘천읍면의 위안기관으로 단 하나의 존재인 상설극장 읍애관邑愛館 에서는 일반고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매월 1일과 15일을 제한 일요일과 축제일에는 주간흥행晝間興行을 하기로 되어 12월 1일부터 실시하얏다고 한다”는 기사로 보아 춘천극장은 상설극장이 아니라 부정기적으로 상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1938년 7월 28일 매일신보에「본보춘추지사주최 제독자우대영화회.춘천읍애관에서 개최」라는 기사로 일제 강점시기 신문구독자를 위한 우대 영화가 상영되었음을 확인 할 수도 있었다. 이 읍애관은 해방이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46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춘천극장 마저 화재로 소실되고 이후 1948년 재건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하여 춘천의 최초 극장은 춘천극장이며 두 번째 상설극장이 읍애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이 시기까지는 필자조차 한번도 들은 바 없었던 기록상 춘천의 극장사이다. 이 극장들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정확한 극장명칭은 알 수 없었지만 이 극장들의 개략적인 위치를 기억하시는 분(구술 1933년 춘천생 김유환)을 만날 수 있었다. 하나는 ‘춘천명동거리 중간(현 아돌드파마 춘천점)쯤에 2층으로 된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다다미로 만들어져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는 말씀과 헐려버린 구 중앙극장 부근에도 또 하나의 극장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사라진 과거를 들쳐볼 수 있는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도시 한가운데 미군부대 비행장이 들어선다. 이 부대를 처음에는 제4유도탄사령부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공식명칭이라며 캠프 페이지(CAMP PAGE)라고 불렸다. 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폐허가 된 춘천이었지만 지리적 여건으로 군사 작전상 주요지역으로 탈바꿈한다. 양구․화천 등 중부전선의 주요 보급로이기에 미군 및 한국군인들이 많이 주둔하면서 춘천에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② 한국전쟁 이후의 극장
전쟁이 끝나면서 춘천은 새로운 환경 속에서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미군주둔으로 인해 폐허 속에서도 부대 주변에 상점이 하나·둘씩 생기고 미군전용 클럽들과 장미촌이라 불리는 홍등가도 들어선다. 미군주둔으로 인한 인구증가 및 급격한 도시의 변화 속에서 문화공간으로 1955년 공사를 시작한 소양극장이 이듬해 개관된다. 춘천의 또 다른 고유명사라 할 수 있는 소양강이름을 차용한 소양극장은 개관당시 700여석의 규모로 자가발전 시설까지 갖췄다.
사실 예전엔 전기사정이 불안정하여 툭하면 정전상태가 발생하던 시기로 영화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전에 대비하여 자가발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 개관된 극장들도 자가발전 시설을 갖추고 정전에 대비했는데 극장 한 귀퉁이에 자리한 커다란 발전시설이 청소년기 또래들이 주로 이용하던 빠방의 루트이기도 했다.
이때는 영화필름을 차량으로 직접 운반해오던 시기였다. 서울에서 영화의 흥행성적에 따라 지체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서울 개봉관과 비슷한 시기에 상영되었다. 소양극장 다음으로 1958년에 신도극장이 개관되는데 예전의 도시형성상 변두리에 속한 작은 규모의 극장이었다. 이 극장은 미군부대 전면에 위치하여 주변 유곽의 양색시들을 절대고객으로 겨냥하고 개관된 재상영관이었다고 전한다.
이어서 어릴 때 들었던 기억이 맞는다면 처음에는 반공회관으로 불리던 제일극장이 개관되고 이어 1959년에 중앙극장이 개관된다. 다시 1967년에 개봉관인 육림극장이 개관되고 이후 남부극장이 개관되었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천일, 동보극장으로 이름을 변경해온 아세아 극장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어린이 집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매표소 등 옛 건물의 외형을 거의 간직한 옛 아세아 극장 앞을 지나칠 때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이곳은 필자가 꽤나 여러번 들락거렸던 극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추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곳을 들락거리던 시기가 1960년대 초등학생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를 보고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특수한 여건상 들락거렸을 뿐이었다. 조실부모하여 친척집에 얹혀사는 처지로 당시에 가난한집 아이들의 기본 부업(?)인 신문팔이 소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다 석간신문으로 학교를 파하고 몇몇 또래들과 지금의 적십자병원 건너편 2층에 있던 동아일보 춘천지사에서 신문을 받아 거리를 돌며 신문을 팔았다.
줄을 선 순서에 따라 보통 20~30부씩 잉크냄새가 물씬나는 신문을 받아 든다. u자모양으로 반으로 둥글게 접어 옆구리에 끼고 우선은 번화가인 소양극장과 명동을 지나 중앙시장까지 “동아일~보오~” 를 연호하며 내달렸다. 퇴근시간 무렵 새 소식에 목말라하는 소위 인텔리층들이 주 고객이었다. 한정된 고객에 비해 신문팔이 소년들이 많았기에 고객을 선점하기 위해 남보다 먼저 달려야 했다. 달리며 소리치고 또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1차로 주요코스를 달리고 나면 그 다음은 다방과 빵집 차례다. 그때 춘천 명동거리에는 대표적 빵집인 거북당과 만나당이 있었다. 또 청탑, 예맥, 심지, 초원, 보리수 등 명동과 요선동일원의 다방을 순회하다 시간이 흐르면 이어서 극장가를 맴돌았다. 중심지에는 덩치 큰 중·고등학생들이 터를 잡아 힘없는 우리 또래들은 변두리의 극장가를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상영 입장시간이 20~30분 지나고 나서 입구에서 표를 받는 기도 아저씨에게 신문 한 장을 상납하면 극장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팔리지 않는 시간을 메우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 미리 밖으로 나와 극장문을 나서는 손님들에게 나머지 신문을 팔아야 했다. 그곳에서도 신문을 모두 팔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가는 코스는 주로 여관이었다. 여관의 객실 앞에서 신문이름을 소리치다보면 어느덧 11시30분 통금 예비사이렌이 어둔 도시의 하늘을 흔들었다. 어쩔 수없이 휴지로 사용할 남은 몇 장의 신문을 흔들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그 시간의 기억이 아직도 눈물겹게 다가온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신문을 파는 신문팔이 소년에서 신문을 돌리는 고학생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신문을 거리에서 파는 것에 비해 한결 양반의 형국이었지만 장마철이나 폭우가 오는 날은 낭패였다. 조금만 배달이 늦어도 눈을 부릅뜨고 소리치는 독자와 으르렁 거리며 발목을 물어댈 것 같은 맹견 또한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당시 모두가 퇴근한 텅 빈 관공서의 불 꺼진 긴 복도를 지나가야 했는데 자신의 발자국 소리에 간이 콩알만 해지곤 했다. 또 바람이 세게 부는 날 도립병원의 영안실 옆으로 지나치려면 창문이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무서움에 자지러지곤 했었다.
그 당시는 넉넉하지 못한 경제적 여건으로 극장은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라디오조차 귀해 여름밤 저녁이면 마당의 너른 평상이나 멍석위에 10여명씩 모여앉아 귀를 기울이고 연속방송극을 들었던 시절이었다. 극장은 명절이나 잔치 등 일년에 한두번 특별한 날에나 들어설 수 있었던 특별한 문화공간이었다. 반면에 빈한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보여주던 가설극장도 있었다.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본 기억은 없고 주로 서커스 공연을 보았었다. 동네의 너른 공터에 말뚝을 박고 천막을 빙 둘러 만든 가설극장에서는 언제나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원숭이 몇 마리가 재롱을 부리고 있었고 환하게 빛나는 전구가 주렁주렁 달려 마치 별나라에 온 듯한 환상에 빠지게 하여 괜히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또 객석은 의자대신 멍석(또는 가마니)을 깔아놓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맨 땅 그대로여서 신문지난 시멘트 포장지를 깔고 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름이나 가을철에 한두번은 시청마당에서 무료 야간 노천극장도 운영되었다. 주로 계몽운동이나 반공 등 국가적 홍보를 위한 것으로 보통 대한뉴스와 계몽영화를 틀고 나서 본 영화를 보여주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좋은 자리를 잡고자 이른 시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체로 가족단위 관람이 많았는데 어린아이들은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냥 뒤에 서서 영화를 보았다. 주변의 불이 꺼지며 한줄기 불빛이 어둠을 뚫고 스크린에서 영상을 만들면 사위가 조용해진다. TV가 없던 시절이라 대한늬우스를 통해 우리는 접하지 못한 나라의 변화 및 바깥세상의 풍경도 보고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또 새로운 다리가 놓이고 도로를 건설하는 활약상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어서 기다리던 '본 영화'가 시작되지만 화면은 계몽영화와는 달리 대체로 비가 오듯 빗살무늬를 만들며 지지직거리곤 했다. 바람이 불면 광목으로 만든 스크린이 온몸을 비틀며 이상한 영상을 보여주며 춤을 추기도 했지만 즐겁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화면이 하얗게 변하면서 필름이 끊어지면 여기저기서 "에이~"하는 소리와 함께 젊은이들은 '휘익 휘익' 휘파람을 불어대기도 했다.
중앙시장 서쪽 입구 쪽에 있던 중앙극장은 1995년 3월 관객감소로 문을 닫은 후 이제 주차건물이 들어서 흔적조차 회상할 수 없게 되었다. 또 가수 문주란 공연 때 관객이 몰려 출입문이 완전히 부셔졌다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는 제일극장 터는 지금의 한국은행 건너편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옛 한국은행이었던 지금의 소양로 춘천농협자리 옆에는 신도극장이 있었다. 3류극장으로 문을 닫은 후 한동안 카바레로 변신해 버티더니 어느 틈엔가 그마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또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이름을 가물거리게 하던 시민회관이 있었다. 중앙초교 앞에서 낙원동으로 올라가는 골목 초입새에 있던 시민회관은 규모가 작은 극장이었다. 1960년대 쯤 이 극장에서 보았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장면이 새삼 떠오른다.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든 영화였다. 초등학생이던 주인공 이윤복(1953~1990)은 가난한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노름을 즐겨하는 아버지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주인공은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며 구두닦이로 연명하면서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했던 일기로 만들어진 실화였다. 그 일기가 담임선생의 호의로 책이 발간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가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도 새사람이 되고, 집을 나갔던 어머니도 돌아와 잘 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영화관람 내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슬픔이 북받쳐 영화가 끝난 후 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훌쩍거렸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당시는 관객을 울리는 영화가 대세였다. 하긴 포스터에도 상투적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라는 문구를 쓰기도 했다. 또 “돌아오지 않는 해병”같은 영화는 국군이 고지를 점령하거나 부상을 입고 죽음 직전에 있던 전우를 구해내면 극장이 떠나갈 듯 박수를 치며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전우를 구하고 자신은 전사하는 장면에서는 또 다시 눈물바다로 만들며 눈물과 환호를 이끌어 내며 가슴을 흔들던 영화에 울고, 웃고, 환호하며 6~70년대를 보냈다.
그 시민회관 건물자리는 후에 술집으로 변신하였다가 사라져 버려 이제는 옛 모습은 물론 이름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전설이 되고 말았다. 또 가장 제일 나중에 개관되었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요절해 버린 남부극장은 지금의 춘천경찰
서 건너 도로변에 소재했었다.
1995년 전후쯤인가 비디오 대여료의 가격파괴, 비디오방 확산, 케이블 TV방송 등으로 관객은 계속 감소하여 운영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극장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부실해가는 경연난 해소를 위해 춘천의 극장들은 변신을 꾀한다. 소양극장은 ‘피카디리’라는 영어이름으로 젊은 고객층에게 세련미를 어필했고 본 건물 뒤편에 소극장 개념으로 ‘아카데미 극장’을 신설했다. 또 문화극장은 건물신축에 따라 문화 아케이트 건물 속에서 브로드웨이라고 개명하고 명맥을 유지하다 다시 명동1번가라는 대형건물이 들어서며 슬쩍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옛 문화극장의 비상구는 예전 중앙시장 쪽 간선도로변에 있었다. 사실 이름만 비상구이지 늘 닫혀있는 형식적인 문으로 외부에서 보면 그저 건물사이를 막아놓은 허름한 나무문에 불과할 뿐이었다. 우리 몇몇은 그곳으로 소위 서너번 빠방을 틀었던 경험이 있었다. 엉성한 나무쪽문을 비집고 컴컴한 통로로 한참을 더듬거리며 잠입에 성공하기까지의 떨림과 두려움 그리고 야릇한 공포를 피부로 느끼며 스릴을 즐겼다. 어느 날인가 잠입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목덜미를 잡는 우악스런 손길을 느꼈고 우리는 미술실(극장간판을 그리는 화공실)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고 빌었다. 학교나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는 다는 조건을 걸은 바다같이 너른 관용(?)에 의해 우리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바지를 내렸고 미술부장은 고추 끝에 빨간 페인트로 예술행위를 실행했다. 페인트가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나면 넓은 아량(?)으로 영화를 보게 해주는 선심까지 베풀었다. 영화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몇장의 종이로 극장의 어둠을 이용해 바지춤으로 손을 넣고 침칠을 하며 페인트를 닦아내던 그 고난의 시간도 덤덤히 떠오른다. 하지만 그 죽을 것만 같았던 치욕과 고통도 다음날이면 자랑스런 무용담이 되었다. 친구들에게 다시한번 바지춤을 내리며 우쭐거리던 시간도 이미 철없는 과거일 뿐이다.
2005년은 춘천의 영화관에 큰 지각변동이 발생한 해이다. 10월 13일 한 건물 안에 6개의 상영관을 가진 멀티플렉스 영화관 ‘프리머스 춘천’이 상륙하면서 주 고객층인 젊은 영화팬들이 우르르 몰려간다. 그러나 1967년 개관했던 육림극장도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3개관으로 스크린수를 늘리는 리모델링으로 다시 재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자본력을 앞세워 큰 규모와 새로운 분위기로 입성한 현대화의 기운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육림극장은 결국 2006년 11월 1일 마지막 영화를 끝으로 30여년의 여정을 접고 역사의 장으로 사라졌다. 극장문에 ‘춘천시민 여러분 그동안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영난으로 부득이 영화 상영을 중단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이 짤막한 인사말로 춘천의 문화아이콘은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2008년 2월 28일 춘천 퇴계동에 12개의 스크린을 가진 ‘춘천 CGV’멀티상영관이 들어왔다. 끝까지 버틸 것 같던 옛 소양극장인 피카디리 극장마저 2011년 휴관이라는 절차를 거쳐 폐관하면서 춘천의 옛 극장은 아쉽게도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처럼 대중적 문화공간이 아니었던 1950~60년대 극장을 간다는 것은 보통사람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절 때 부모나 누나들의 손에 이끌려 가보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기억뿐이다. 그때만 해도 영화관은 부유한 삶과 행복한 가정사와 품위, 여유의 과시장소이기도 했다. 극장가는 날은 옷매무새가 달랐다. 특별한 나들이로서 소위 쫙 빼입고 가야하는 곳으로 당연시 되던 곳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네와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자가 역시 깨끗한 옷을 입은 아이들을 대동하고 모처럼의 가족애를 드러내며 행복지수를 드러내던 곳이기도 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가족은 극장 앞에서 사진 한 장박아 기록을 남기는 센스도 갖고 있었다. 또 대낮에도 마음약한 청년들의 간덩이를 붓게 하던 스킨십의 공간으로, 연애의 온실로 또 첫사랑의 풋풋함이 스며있던 곳이기도 했다. 명절 때 줄을 서는 기다림이 즐겁기만 했던 영화관. 새 문명에 목마른 하이칼라들이 콧방구리처럼 드나들며 배우들의 옷차림은 물론 머리모습과 어투까지 따라하던 선진유행(?)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오지의 버스터미널 매표소 같은 모습을 한 반달형의 작은 공간에서 내미는 극장표를 받는다. 소위 기도라 불리는 검표원에게 표를 내밀고 나야 극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겨울이면 대체로 홀에 커다란 경유난로나 톱밥난로로 난방을 하였는데 그리 따뜻했던 기억이 없다. 화장실도 허접해 특유의 냄새가 복도까지 삐져나왔다. 그래도 극장마다 2층이 있었는데 대다수가 2층을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찌들리고 살아선지 높은 곳에서 지긋이 내려다보는 영화관람으로 욕구를 해소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좌석번호도 없었다. 먼저 입장한 사람이 마음대로 좌석을 차지할 수 있었고 좌석이 차면 가면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볼 수밖에 없기에 먼저 들어오려고 새치기를 하거나 아우성을 치기도 하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이면 머리를 쌍갈래로 딴 십대 소녀들이 어깨띠를 이용해 직사각형의 판에 오징어, 땅콩, 과자류를 담고 객석사이를 돌며 이동판매를 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었지만 극장에서는 한 가지 정도는 사먹어야 영화를 관람했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연인들이나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은 당연히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영화를 관람하곤 했다. 또 껌도 소리를 내며 씹는 것이 유행(?)이었다. 소위 양색시나 술집색시처럼 짙은 화장을 한 여인들이 여기저기에서 내는 딱!딱! 소리가 거슬렸지만 모두들 그러려니 하던 시절이었다.
2, 3류 극장들의 공통점은 우선 건물이 허름했고 의자도 낡고 협소했다. 의자에 붙은 껌 때문에 한 두번은 곤혹을 치룬 일이 있었다. 게다가 스크린은 비가 내리는 듯 빗살무늬 줄이 죽죽 이어졌고 상영중간에 한두번은 필름이 끊어지기도 했다. 필름이 끊길 때마다 여기저기에서 "에이!"하는 탄성과 휘파람들을 불어 제켰다. 하지만 관람료가 저렴하고 시간을 죽이는 데는 이만한 장소도 없기에 백수나 외박이나 외출나온 군인 그리고 저녁에 출근하는 밤의 여인들에게 호평을 받던 곳이다.
오래된 건물, 조도가 낮은 실내조명, 손수 그린 엉성한 그림이 붙어있는 옛 극장은 겉보기에 참 낙후되어 보였지만, 또 그만큼 정겹고 편안하고 순박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이외에도 자동차에서 앉아서 연인과 보던 야외극장도 2개나 있었다. 춘천 삼천동 중도 주차장에 차량 35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춘천씨네’ 자동차 극장과 남산면 강촌 구곡폭포 주차장에 차량 150대를 수용할 수 있는 ‘강촌 시네토리’ 자동차 주차장이 있었다. 처음에는 반짝하는 듯 했으나 얼마 전 현장을 확인한 결과 노천에 있던 스크린마저 철수해 버린 상태였다.
춘천의 극장들은 이렇게 세월의 부침浮沈 속에서 성쇠盛衰의 길을 가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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