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새삼 느껴 본 登仙溪谷의 6瀑 1潭
심 창 섭
등선폭포는 춘천의 대표적 명소임에도 불구하고 전해지는 기록은 아주 미비하다.
이름조차 경천폭境川瀑, 삼학폭三鶴瀑, 삼악폭三岳瀑, 등선폭登仙瀑으로 불리나 이름이 지어진 시기나
작명 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이에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리지에도 삼악산과 석파령, 삼악산성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 보이나
등선폭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좀 더 많은 시문류詩文類를 살펴보고자 했으나 소장 자료의 한계로
근년에 발간된 역사서를 통해 등선계곡의 기념비의 내용을 토대로 6폭 1담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1997년 발간된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의 금석문 편에도 이 비석의 존재가 거론되지도 않을 정도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기념비였다. 이 비문의 전문과 해제가 발표됨으로써 다시 한 번 관심이 증폭되는 단초가 마련되었다.
또한 춘천역사문화연구회에서 이를 근거로 폭포마다 암각 되어 있는 폭포이름을 재조명하며 등선 8경을 선정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지역사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 등선폭 기념비는 등선계곡 입구의 작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측 바위벽에 위치하고 있다. 뒷 판에는 큰 글자로 등선폭登仙瀑이라
가로로 쓰고 다시 세로로 기념비記念碑라 한자로 각자하고 전면판에 폭포에 대한 기록을 나열했는데 높은 위치에 있어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그런대로 볼만하나 지면에서 비문을 읽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토씨는 한글로 쓴 국한문 혼용 비석으로 이 등선계곡에 소재한 폭포의 이름을 짓고 그 경위를 적은 유일한 기록문이기에
이 비석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글세대의 일반인들에겐 한자비석은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설사 읽을 수는 있다 해도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보니 무심하게 지나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필자도 오래전에 이 비석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얕게 음각된 한자 비문을 촬영한 사진을 확대해 나름대로의 풀이를 하고자 했지만
글자 판독도 힘들었지만 어려운 한자에 막혀 포기하고 말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에도 탁본을 하여 주변 지인들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였다.
늘 마음이 찜찜하던 차에 이제라도 전문을 읽게 되어 답답했던 마음은 다소 해소되었지만 막상 내용을 열고 보니
또 다른 궁금증은 더해만 진다.
예전 강원도장관 이규완과 참여관 이학규가 폭포 이름佳名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폭포를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아니었기에 그 이전에도 분명 이곳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불려 지던 이름이
분명 존재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 비경에 비해 이름이 적합하지 않았거나,
계곡안의 폭포를 그저 대명사 격인 ‘경천폭境川瀑’으로만 불리는 것이 타당치 않아 새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우리의 선조들은 새로운 사물에 대해 첫 이름을 부여하는 것을 풍류가 있는 선비들의 특권으로 누려왔다.
더욱 고위관직을 가진 관료들은 측근의 아부성(?)으로 이러한 일을 부추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이전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폭포명인 경천폭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그 어원이나 시기, 작명 자는 확인 할 수가 없었다.
다만 1926년 경천폭포로 소개된 동아일보 신문기사와 1930년 별건곤 잡지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별건곤'잡지에는 삼학폭포 또는 경천폭포라 소개한 뒤 '그 다지 장쾌하지는 못하지만 위치가 원래 춘천의 명산인 삼학산 중에 있어
계곡이 기절유수奇絶劉秀하다'고 표현했다‘라고 기록으로 보아 1926년까지는 등선폭포 이전의 명칭으로 경천폭포를 꼽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먼저 소장도서와 근대자료를 검색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도 서 명 |
발행처 |
년도 |
폭포명 |
내 용 |
비고 |
한국지명총람2 (강원편) |
한글학회 |
미상 |
경천폭境川瀑 |
(등선폭, 등선폭포) 높이 15척 |
p 455 |
별건곤 31호 |
개벽사 |
1930 |
경천폭 |
경천폭, 삼학폭 |
|
강원요람 부록 |
강원도 |
1926 |
경천폭 |
강원도 명소·구적편 소개 |
P 18 |
동아일보 12. 1 기사 |
동아일보사 |
1926 |
경천폭 |
내 고을 명승고적 폭포소개 |
|
춘천풍토기 |
하야만세 |
1935 |
등선폭 |
제1폭 높이 1장 5척 1933년 도로개수 |
P 109~110 |
강원도지 상권 |
강원도 |
1959 |
등선폭포 |
제1폭 높이 50척 5폭까지 소개 춘천서에서 등산로 개척, 등선각 소개 |
P 728 |
강원문물 |
강원도 |
1973 |
등선폭포 |
제1폭 높이 6m, 5폭까지 소개 |
p 91 |
강원총람 |
강원도 |
1974 |
등선폭포 |
삼악산과 등폭 |
p 1266 |
춘주지 |
춘천시 |
1983 |
등선폭포 |
계곡과 폭포 소개 |
P 203 |
강원도사 (현대판) |
강원도 |
1995 |
등선폭포 |
대소 5개의 폭포 제1폭 높이 14m |
p 1137 |
춘천백년사 (하권) |
춘천시 |
1996 |
등선폭포 |
제1폭 높이 10m 5폭까지 소개 |
P 2023 |
지금은 교통과 접근성이 좋아 등선계곡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접근이 쉽지 않은 험준한 곳이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제2폭 위편의 철제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등선 제1폭포에서 계곡 안쪽으로는 접근이 거의 불가했을 것이다.
다만 신흥사주변의 진입로를 통해 계곡 쪽으로 접근한 후 계곡을 따라 내려와야 다가설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근년에 발간된 여러 종류의 향토지에도 이 폭포는 관광자원으로 소개되었으나 명칭, 제원 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경춘 도로 개설시기(1911~ 1915)에 등선계곡 입구의 다리 명을 경천교라 한 것을 보면 이전까지는 경천폭포 로 불리다
1930년대에 비로소 등선폭이란 새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동안 등선계곡의 폭포와 담潭에 대해서는 간단하나마 등선 제1폭 제2폭 등의 순서에 의한 나열식 이름으로 불려왔다.
폭포마다 제각각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임에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무심하게 폭포를 보고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등선계곡의 기념비를 수차례 보고 지나치면서 그 내용을 헤아리지 못했던 무지의 소치가 부끄럽기만 하다.
1980년 말쯤 우연히 최영식화백의 글을 읽고 등선계곡을 수차례 답사하여 보물찾기하듯 하나하나 암각자를 찾아내며
희열에 빠지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후 수필을 통해 등선계곡의 폭포이름을 알리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자 했으나 별 소득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등선계곡의 각 폭포와 담의 주변에 이름을 새겨놓은 귀중한 자원이 전해지지만 아직도 관청에서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관광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귀중한 자원을 훼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례로 비룡폭의 비飛자와 주렴珠簾 폭포의
암각자는 보행로 구조물로 가려져 볼 수없는 상태가 되었다. 필자도 오래전 이 암각자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찾을 수 있었지
일반 관광객들은 전혀 볼 수없는 상태이다. 그 외의 폭포나 담 명칭도 한글로만 된 안내판을 세워 놓았을 뿐 암각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관광객의 안전과 편의가 우선이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안전과 편의는 물론
이 자원까지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담당부서의 안목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 1957년 10월에 건립된 등선폭 기념비를 통해 각 폭포의 명칭과 주변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등선계곡의 폭포와 담에 대한
이름은 1910년대 강원도백이었던 이규완과 참여관 이학규가 지었다고 기념비에서 밝히고 있다. 다만 등선계곡 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폭포와 담의 명칭을 이들이 지은 것인지 지역의 의견 수렴 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작명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또 이 기문에서는
폭포이름이 입구로부터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지 않고 승학, 백련, 비룡, 주렴과 옥녀담까지 다섯 폭포로 기록하고 이를 묶어서 내등선이라
칭하여 혼선이 따른다.
다만 김장흥 도백은 제1 등선폭포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하여 그 안쪽에 있는 모든 폭포와 담을 내등선폭포라 총칭하고 등선폭포
오른쪽 위쪽 암벽에 화강암 판으로 내등선폭포內登仙瀑布라 크게 새기고 말미에 년도와 직명, 이름, 시기는 작게 음각하여 암벽에 부착하였다.
또 승학폭은 폭포전면의 독립된 자연석 바위 면에 음각자한 후 말미에 날자와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외에 폭포와 담은 주변 암벽에 그저 폭포 명만을 음각한 상태이다. 또한 각자된 글씨체가 비룡폭을 제외하고는 한사람의
서체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현재 제2폭으로 불리는 가칭 비선폭포飛仙瀑布는 기문에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도 않고
암각자도 이곳만이 빠져있다. 이는 제1 등선폭의 연장선으로 보았거나 이들이 이곳을 탐방할 때 갈수기로 계곡물이 별로 없어 폭포대열에서
제외시킨 것으로 생각해 볼 수 도 있다. 접근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으나 내등선폭포 석각문을 부착하기 위해서나 제2폭 위의 철다리를
놓을 때 이곳을 분명 보았으리라 판단되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기만 하다.
이 등선폭포내의 폭포명 암각자 중 말미에 김장흥의 이름을 부기한 것은 내등선폭포와 승학폭포 뿐이나 ‘백련’ ‘옥녀담’ ‘주렴’도 서체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모두 김장흥의 글씨로 보인다. 다만 ‘승학’은 말미에 김장흥의 이름이 부기되어 있으나 서체의 분위기가 앞의 것들과 조금은 상이하다.
다만 ‘비룡’폭 각자는 초서체로 주변바위에 각자기刻字記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서체로 보인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필자는 1980년대 이 폭포가 소재한 춘성군청에서 홍보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때 등선계곡의 이 이름 없는 제2폭포에 대해
망설이다가 풍문으로 들리던 비선飛仙이란 이름을 아무런 여과 없이 사용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사실 이 폭포를 가만히 보다보면 이곳의 그 어느 폭포보다도 은밀한 곳에 숨어 있고 물줄기로 인해 보드랍게 파여진 바위 면이
마치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를 자연스럽게 연상시켰다. 게다가 폭포수의 물줄기가 마치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이
비선이라는 이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사용하였고 그 후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1폭의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면 길이 좌우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좌측 물길 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1폭의 상단부분이자 제2폭이 있는 전면공간이다.
사실 이곳에서 등선계곡 입구 쪽을 바라보면 흙 한 점 없는 바위 협곡의 먹빛 실루엣과 그 계곡의 끝에 서구식의 빨간색 지붕의 건물인 등선각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어찌보면 계곡의 위용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높이로 실망스런 제1 등선폭포보다는 바로 이곳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계곡의 백미白眉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비선폭포에 가로막혀 물길을 따라 더 이상 진입은 불가하다. 다시 두 갈래의 길에서 오른쪽 계단을 오르려면 윗편 암벽에 내등선폭포라
음각한 석판을 보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계곡사이에 놓인 길이 8.43m 폭 0.9m의 철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한 굽이 돌아서면 예상외로
탁 트인 너른 공간이 나타나 잠시 긴장감이 풀리는 듯하며 지금까지 이어온 협곡은 끝이 난다.
위편 좌측에 돌로 벽을 친 비선식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건물이 보인다. 그 건물 전면의 좁은 계곡을 건너 우측으로는 등산로가 이어지나
좌측 계곡수를 따라 약 10여m를 들어가면 바로 세 번째 폭포가 자태를 드러낸다. 웅장하지 않은 작은 폭포지만 여인의 살결처럼 보드랍게
닳은 바위 면을 타고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물줄기에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이다.
마치 학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고 하늘로 오르는 듯 한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바로 세 번째 승학乘鶴폭포다.
이곳은 폭포 입구를 초병처럼 막고 있는 하나로 독립된 큰 바위 경사면에 세로로 ‘乘鶴’이 큰 각자와 그 하단에 세로로 두 줄의 작은 글씨를 음각
했는데 한글로 단기라 쓰고 다시 한자로 우측에는 년도를, 좌측에는 아호와 이름을 새겨 넣었다.
이곳에서 다시 등산로를 따라 경사를 조금 오르면 다시 승학폭포 바로 위편이 된다. 바로 다른 폭포는 도로에서 접근이 쉬우나
네 번째 백련폭포는 보호철책을 넘어 다시 계곡사이로 들어가야 폭포하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른 폭포와 마찬가지로 웅장하지는 않으나
하얀 물줄기가 너른 바위의 경사면을 타고 내리는 모습에서 하얀 연꽃을 떠올려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본다.
사실 이 폭포는 외형적으로 누운 폭포臥瀑에 가까우며 수량이 많지 않아선지 그리 멋진 모습은 아니나 폭포 전면 우측의 움푹한 석실로 들어
가서 보면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폭포경사면 우측면에 백련白蓮이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낙엽이 쌓여 밑에서는 보이지가 않았다.
다시 등산로로 올라가 폭포상류에서 계곡의 바위 면을 타고 내려와 낙엽을 제거하고 세로로 음각한 글씨두자를 접견할 수 있었다.[사진 4]
백련폭포 위쪽은 다시 너른 공간이다. 그 상단 끝 쪽에 숨어 있는 듯 한 모습의 옥녀담玉女潭을 만난다.
옥같이 뽀얀 피부의 여인이 조용히 목욕을 하는 모습을 그려보면서 물가에 앉는다. 예쁘고 작은 욕조를 연상시키는 담에 차마 세속에 찌든 발을
담글 수가 없어 옥녀담이라 음각한 바위 하단의 물가에서 잠시 탁족으로 휴식을 취한다. 이곳의 석각은 등석계곡안의 각자 중 가장 큰 글씨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너비 159cm. 높이 58cm이나 각 글씨는 가로31~42cm, 세로36~58cm 크기이다.[사진 5]
잠시의 달콤한 휴식을 접고 옥녀담 바로 위에 있는 다섯 번째 비룡폭포와 마주한다. 예전과 달리 등산객 들의 편의를 위해 철제로 기둥을 세우고
나무 널로 바닥을 깔아 관람환경은 좋아졌으나 주변경관은 오 히려 반감되고 말았다.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비룡폭 포의 자태는 정말 근사하다.
폭포아래의 담(소)은 이 계곡 중에서 가장 깊은 검푸른 물색을 띠고 있다.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깊음과
한 마리 이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을 듯한 모습이다.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때문인지 선녀탕이란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비룡폭의 물길이 소沼를 흔들며 빠져나오는 양쪽 언덕을 자세히 보면 왼쪽에는 비飛 오른쪽에는 룡龍이라 초서草書 글씨를 볼 수 있다.
[사진 6-1. 6-2]
그러나 다리橋梁모양으로 만든 보행로 널판 때문에 왼쪽의 글자飛字를 보려면 아래로 내려가거나 다리에서 엎드려야 볼 수가 있다.
비飛자의 실측결과 가로 22cm 세로 25cm의 작은 글자였다. 또한 대체로 각자 말미에는 쓴 사람의 이름과 년도를 적는데 이곳 비룡폭은
소沼의 물이 넘치는 좌우에 글자 한자씩을 각자한 것도 특이 했지만 각자기刻字記를 폭포전면 별도의 바위에 적었다.
“정유 가을 영동인 최심천丁酉 秋永同人 崔深川"이라 얕게 음각하였는데 최심천이 누구의 이름인지 호인지 알 길이 없다.[사진 7]
답답한 마음을 누르며 다시 철다리를 통행로를 따라 협곡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전면 좌측으로 2단으로 구성된 폭포가 모습을 나타낸다.
이 계곡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폭포인 주렴珠簾폭포이다.
예전에는 지면에서 가슴 높이의 암벽에 있던 글자였으나 고가통행로 설치로 인해 이곳의 각자를 보려면 안타깝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철제통행로 아래로 내려서야 한다. [사진8] 가로로 구슬 주珠자와 발 렴簾자를 썼으니 폭포수가 마치 옥구슬 처럼 이어지며 떨어진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수량水量이 적어 옥구슬 문발을 연상하기에는 조금 미비했지만 작명자의 감성과 안목 그리고 시적인 멋을 진득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이렇게 등선계곡의 6폭 1담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안목이 높지 않아 문학적인 내용보다는 사실적인 내용으로 기술하였다.
또한 개중에는 비룡폭의 소沼를 또 하나의 담潭으로 보아 6폭 2담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폭포수가 떨어지며 생기는 웅덩이는 사실 폭호瀑壺이다.
이 계곡에서 이렇게 폭호를 형성하고 있는 폭포는 등선폭, 비룡폭과 승학폭 뿐이다. 나머지 폭포들은 와폭臥瀑에 가깝거나 떨어지는 수량水量이
많지 않아선지 폭호를 형성하지 못했거나 토사에 묻힌 것으로 판단된다.
늦은 감은 있지만 관광부서에서는 이제라도 이러한 인문학적 자원과 자연자원을 접목시켜 품격 있는 관광자원화로 격조를 높여 봄이
어떨는지 모르겠다. (2013. 문서총서 5집 수록내용 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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