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춘천이야기 - 춘천의 시장(2014 문소회 총소 원고)

심봉사(심창섭) 2014. 11. 30. 11:54

 

 

 

춘천의 시장을 넘보다.

 

심창섭

[서언]

* 시장은 순수 우리이름으로 저자라 불리며 예로부터 우리의 삶과 불가분한 관계를 맺어왔다. 단순한 물물교환의 시기를 넘어서면서 장터는 길가에 늘려놓은 노점상의 형태였다가 그 세가 확장되면서 점포가 들어서 저잣거리 또는 장거리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또 노점상들이 늘어나고 점포가 형성되면서 좀 더 너른 공간을 만들면서 장터라는 용어로 변천되어 온 것 같다. 그 형태나 모양은 지속적으로 진화해 가면서 새로운 형태로 변신해 나가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의 삶과 떠날 수 없는 인연으로 함께 하였다.

 

15세기 후반에 처음 시작된 장시場市16세기에 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정기시장으로 자리를 잡아나간다. 성종실록에 전라도 지역에서 흉년이 들자 자구책으로 시포市鋪를 열고 장문場門이라 칭하는 교환교역기구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비로소 우리나라의 최초 시장기록으로 보인다.

 

장터는 민중의 마당이었다. 고정상점이 없던 시절 장터는 누구나 서로의 물건을 바꾸거나 사고 팔 수 있는 유일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어우러지지고 생동감 넘치는 흥청거림이 있었다. 장꾼들의 밀고 당기는 흥정과 다툼, 노천식당의 무럭무럭 김이 나는 국밥, 넘칠 듯이 부어주는 한 대접 농주와 야바위꾼들의 농간마저도 흥겹기만 했다. 건립꾼들의 풍물과 장터의 소란 속에서도 휴식과 즐거움을 동시에 충족하던 장소였다. 힘든 농사일로 허리를 펼 수조차 없던 농민들에게 장날은 어린애들의 소풍 날 만큼이나 기다려지는 생기의 날이었다. 또한 바깥세상의 소식은 물론 새로운 문명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이기에 별 볼일이 없는 사람에게도 일탈의 장소로서 활력소를 불어 넣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춘천의 시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잠시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필자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부분은 기존의 발표문, 그리고 이제는 구술자조차 기억나지 않는 주변분들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이라 어럼풋 기억은 나지만 정확도가 떨어지는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나열하고자 한다. 전문적 논술문이 아니기에 잊혀져가는 과거 춘천의 모습을 가벼운 마음으로 회고하고자 했다. 먼저 춘천의 시장을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구분이 필요했다. 여기서는 과거의 전통적 오일장과 우시장. 그리고 상설시장, 양키시장, 반짝(번개 또는 새벽)시장을 주 대상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지역의 시장은 지역에 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을 반영한다. 또한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반영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민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보려면 시장을 찾아야 보라고 했다. 그 속에는 서민들의 애환과, 포장되지 않은 순수의 생활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

 

1. 전통 오일장

 

* 춘천은 태백산맥의 지맥이 남동부와 북서부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분지형 지역이다. 대부분 산지로 평지 농경지가 많지 않고 경사가 가파른 지형을 가지고 있다. 또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모진강, 자양강)과 인제 설악산에서 발원한 소양강 두 물줄기가 옷깃처럼 하나를 이루며 모여드는 일대에 형성된 강마을이다. 수운과 연계되어 소금배가 서해로부터 거슬러 올라오고, 물줄기를 따라 뗏목이 한양으로 향하던 물자유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지리적 여건으로 조선시대에는 강원 영서지방의 물류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기지 역할을 하던 소양강창이 있었다. 이곳에서 고을의 전세田稅를 세곡稅穀으로 수납하여 한양으로 올려 보내던 곳으로 소양강가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재의 비석군 앞쪽 아래강변에 1940년대까지 커다란 창고건물이 있었다는 노인들의 구술에 따라 이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조건은 자연스럽게 장터가 형성되는 조건을 만들게 된다. 조선시대 장시에 관련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기록에 의하면 1770년대 전국에는 1,064개의 장이 형성되었고 강원도에도 68개의 장이 있었다.

 

1770년대 당시 춘천 행정구역에는 춘천 읍내장(2.7일 요선동)과 북중면장(1.6, 현 신북읍 천전리, 일명 샘밭장)이 대표적 장터였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 의하면 1830년경 강원도 전체 장시의 수가 감소하였음에도 춘천의 부내장(읍내장과 동일 2.7), 샘밭장(3.8)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조선후기까지도 큰 변화가 없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변화가 나타나는데 당시 춘천군에는 춘천 읍내장(2.7), 샘밭장 (3.8), 옥산포장(1.6, 신북면 사농동), 광판리장(남산면 1.6), 창촌장(남산면 5.10), 서오지리장(1.6,사북면 지촌리)이 개시되어 1830년대와 비교할 때 4기의 새로운 장이 새로 개설되었다. 다시 1941년에는 창촌장이 사라지고 북산면에 내평장이 새로 생겨 춘천에는.샘밭장(1.6, 신북면 율문리), 내평장(5.10, 북산면 내평리), 신포장(1.6, 사북면 신포리), 광판장(1.6, 남면 광판리)이 유지되고 읍내장은 상설시장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부터 서서히 각 지역별 오일장들은 춘천의 상설시장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나갔다.

 

1936년 소양1교가 건설되면서 강북지역의 주민들이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상설화된 읍내장을 이용하면서 춘천의 대표적 전통 오일장이던 샘밭장은 서서히 쇠퇴되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1956년경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다 20048월부터 면사무소 옆골목을 이용하여 사라졌던 전통 5일장(4, 9)을 복원하여 운영중이나 예전의 명성을 찾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춘천은 한국전쟁 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완전히 초토화된 도시이다. 다시 수복이 되면서 지역 시장도 재편되는 과정을 밟는다. 1947년에 춘천읍이 춘천시로 승격되면서 중앙시장, 서부시장, 요선시장 등 상설시장이 열리고, 춘성군 동산면에 위치한 동산장(5.10)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결국 일제강점기 춘천주변에 개설되었던 샘밭장, 내평장, 신포장, 광판장 등 전통 오일장들이 상설시장 등장으로 차례로 소멸되고, 춘천의 3개 상설시장이 새로운 시장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다시 1950년 후반기에 요선시장은 대화재로 쇠퇴하면서 중앙시장이 중심 시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교통이 불편하여 유일하게 유지되던 광판장마져 1991년에 사라져 버리며 진정한 오일장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 도포로 본 춘천의 시장>

년대

시장명

개장일

구 분

비 고

5일장

상설

1770년대

읍내장

2. 7

*

 

동국문헌비고참조

북중면장

1. 6

*

 

1830년대

부내장

2, 7

*

 

읍내장과 동일

천전장

3, 8

*

 

북중면장, 샘밭장과 동일

1912

(6)

읍내장

1, 6

*

 

강원도상황편람참조

샘밭장

3, 8

*

 

 

옥산포장

1, 6

*

 

1830~1910년사이 옥산포, 광판리, 창촌리, 서오지리장 신규 개시

광판리장

1, 6

*

 

창촌장

5, 10

*

 

서오지리장

1. 6

*

 

1926

(4)

천전리장

2, 7

*

 

시가지 상권

1912년 개장되었던 옥산포장,

창촌장, 서오지리 3개장 소멸

광판장

2, 7

*

 

1929

(5)

창촌장

3, 8

*

 

조선시장 경제

창촌장 : 1930년대 후반 소멸

신포장

3, 8

*

 

천천장

3, 8

*

 

광판장

1, 6

*

 

1941

(5)

읍내 가축시장

2, 7

 

 

* 1930년대 춘천장이 제일공설

시장이 되면서 상설화

제일공설시장

 

*

 

신포장

1, 6

*

 

광판장

1, 6

*

 

내평장

5, 10

*

 

1963

(3)

요선시장

 

 

*

샘밭, 내평, 신포, 광판장 소멸

중앙시장

 

 

*

 

서부시장

 

 

*

 

1970

춘천 가축시장

2. 7

*

 

 

동산장

5. 10

*

 

1980년대 소멸

우시장(샘밭)

1. 6

*

 

 

광판장

2. 7

*

 

1991년 소멸

 

2. 춘천 오일장의 기억 

 

* 1950년대 말 필자는 어머니의 급작스럽게 어머니를 잃고 9살 때부터 10대 말까지 친척집에서 더부살이 삶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고모부께서는 1950년대에는 요선시장에서 큰 주류도매업을 하셨고 1960년대에 중앙시장에서 의류점을 운영하시던 전형적인 춘천의 상인이셨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의류점을 접고 중앙로 3가에서 미곡상을 시작하셨다. 그 위치가 현재 농협강원도지회 바로 위편에 군용물품을 팔던 소위 군복시장이라 불리던 허름한 건물이었다. 벽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고 단순하게 나무로 만든 삼각 구조물을 얹고 지붕도 얇은 판자를 얹은 후 루핑으로 마감한 약식건물이었다. 이 건물의 도로변쪽 전면을 반으로 갈라 2개의 미곡상이 형성되었는데 아래쪽은 고모부님이, 윗편은 조씨네가 미곡상을 열었다. 바로 윗편(현재 정형외과 건물)에는 서울행 직행(삼용)버스정류장이 있던 곳이다. 그 윗편으로 다시 경상도 아줌마가 운영하는 미곡상과 그 바로 위에 쌀 판매를 주로 하던 서울상회가 있었다. 이렇게 여러개의 곡물상이 몰려있었지만 서울상회를 제외하고는 간판도 달지 않고 경상도집, 조씨네, 그리고 고모부의 별호이던 흰머리 아저씨네(백대가리) 등으로 불렸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필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에서 일을 거들었다. 주로 곡물들을 취급하였는데.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상도 집 앞쪽에 지금처럼 버스정류장(지금은 시내버스 정류장이나 당시는 시내 시외버스가 모두 정차)이 있었다. 농촌주민들이 보따리에 곡물류나 채소류를 들고 나와 이곳에서 대부분 하차하는 바람에 언제나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면 이곳은 흥청거리기 시작한다. 대다수 아낙네들에 의해 거래되던 농산물류를 선점하기 위해 중개인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보따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양끝을 잡고 실랑이하는 모습이 매일 재연되기도 했다. 당시 이곳의 곡물상들은 주변(창촌, 강촌, 의암, 팔미, 덕두원, 명월리, 마삼래, 방곡 등)마을과 춘천근교의 오일장터(광판장, 동산장과 홍천장)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 졌다. 오일장이던 홍천장과 동산장은 주로 완행시외버스를 이용하였다.(검문관계로 급행버스도 동산지서 앞에서 정차했지만 요금이 비싸 대개 짐을 실을 수 있는 완행이용) 정기 버스노선이 없던 광판장은 도로건너편 또 다른 조씨네 곡물상에서 운영하던 쓰리쿼터가 유일했다. 천막으로 포장을 덮은 적재함에 먼저 짐을 실은 후 그 나머지 공간에 사람들이 웅크리고 닭, 토끼 등과 함께 실렸다. 오전에 춘천에서 출발한 차량은 장이 파하고 나서 오후 네 다섯시쯤이면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는 짐이 달라졌다. 장꾼들이 판 물건은 줄어들었지만 반대로 장꾼들이 사거나 교환해온 곡물 등 농산물이 사람들과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의 곡물상들이 이때부터 활기를 띤다. 장꾼들이 사온 곡물을 각자의 거래처로 나르고 다시 이곳에서 계량(곡물은 말, 되 등으로, 고추 등은 커다란 대저울을 이용)하여 중간마진을 챙겼다. 이때 우리 가게로 들어오던 4~5인의 장꾼들의 특징에 따라 대체로 별명을 불렀는데 빨간모자, 코주부 등으로 불렀다. 빨간 모자 아저씨(당시 30대 중반)는 꼭 부부가 함께 다녔는데 해병대 출신이라며 항상 빨간색 해병대 모자를 썼다. 또 코주부 아저씨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분으로 코가 큼직하여 코주부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또 부자지간에 함께 다니던 분이 있었는데 아저씨는 60대 정도였고 아들은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 외에도 몇 분이 더 있었으나 십대초중반의 일이라 생각이 가물거린다. 이들이 위에 나열한 3개장을 순회하는 전업 보부상으로 춘천장꾼의 마지막 시대를 풍미한 분들이다.

 

그러다 어느 날 고모부께서 갑작스럽게 지병인 고혈압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모와 둘이서 곡물상을 운영했다. 당시 필자가 너무 어려 감당하기 어려워하자 고모님이 곡물상을 접는 바람에 그 이후의 장꾼들의 행적을 잊고 말았다. 그러다 몇 십 년이 지난 뒤 당시 그분들 중 한두분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저 반가움에 안부만 묻고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춘천의 오일장에 대한 산증인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렇게 놓쳐버리고 말았다.

 

잠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필자가 장날에 맞추어 현지를 가본 건 동산면 조양리에 있던 동산장이 유일했다. 그것도 단 두 번에 불과했다. 동산장터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던 이종사촌형이 한 분 계셨기 때문이다. 사실 장터라는 이미지는 흥청거림과 북적거림이 연상되지만 1960년대 후반기 춘천주변의 장은 사실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춘천에 상설시장이 활성화되는 시점까지 광판장이 그래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불모지였기 때문이었다. 정기노선이 쓰리쿼터라는 화물차에 불과했기에 존립이 가능했었다. 오죽하면 광판리에서 콩 세말지고 나온 놈또는 광판리에서 마늘 한 접 지고나온 놈이라는 용어가 최고의 촌놈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장꾼들이 3개장을 순회하며 돌다보니 사실 매일 장터로 나가는 형식이다. 대체로 우리 곡물상과 거래하던 장꾼들은 장터로 곡물을 가지고 나온 농민들에게 돈을 주고 물건을 매입하여 마진을 먹고 곡물상에 되파는 중간상인이었다. 나중에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현장에서 사는 곡물값이나 되파는 값의 차이점은 별로 크지 않았다. 이들과 거래품목은 주로 옥수수, , 팥 등 밭작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매입 시 곡물을 계량하는 방법인 말, , 저울 등에서 소위 장난질(?)로 조금 후하게 받는 것으로 중간마진을 대신하는 형태였기에 사실 큰돈은 벌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장터의 고객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서로의 신뢰가 없이는 단골거래처를 만들 수 없기에 작은 이득으로 영업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들이 다섯가마의 곡물을 사왔다면 곡물상에 넘길 때 계량을 해보면 5가마 1말 정도로 늘어났던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곡물은 모두 지금처럼 포대가 아닌 짚으로 만든 가마니를 사용했다. 이러한 먹이 사슬관계로 곡물상에서 다시 계량을 할 때의 서로의 기싸움이 대단했다. 장꾼들은 더 많은 이익을 내기위해 곡물상간의 경쟁심을 유발하였고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상에선 인간적인 거래를 요구하며 계량기술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도 하였다. 장꾼들에게 어쩌다 시세 변동으로 생각지도 않게 이익을 올릴 때도 있었지만 그건 하늘의 별 따기였고 오히려 소소하게 고사리, 마늘, 들깨, 참깨, 메밀, 찹쌀, 기장 등 수요가 많지 않아 가격이 어두운 품목에서 이익을 얻었던 것 같다. 이렇게 그들이 넘긴 곡물은 미곡상에서 다시 서울로 보내는 유통과정을 거치며 장꾼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다.

그 후 1980년대 춘성군청(후에 춘천군이 되었다 다시 춘천시와 병합되면서 없어진 관청)에 근무하면서 이미 폐쇄된 광판장과 동산장터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이미 흔적을 잃고 파장된 이름만의 장터였지만 비로소 광판장터를 접하면서 혼자 감개무량해 했다. 이미 동산장터는 주변에 주택이 들어서며 모습을 거의 잃었고 홍천장은 관외지역이다 보니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나 광판장터는 지금까지도 큰 변화가 없어 장거리의 옛 모습을 상기 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소설 속이나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마치 세트 같은 모습이 정겹기만 했다.

 

광판장거리는 약 100m 정도인데 차 한 대가 드나들만한 너비의 골목 양편으로 줄지어 고만고만한 점포들이 도열하듯 이어져 있었다. 비록 지금은 문이 닫히고 용도가 변하기는 했어도 아직도 옛 모습을 상기해 볼 수 있는 구멍가게, 이발소, 철물점 등도 남아있어 옛 장터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장날하면 지게에 나뭇짐이나 곡물을 지시거나, 소를 끌고 가시는 아버지들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또 해가 어슴하게 기울 무렵 지게에 비린내 나는 생선 한 마리와 고무신을 사들고 고갯길을 넘는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난다. 또한 하얀 무명 치마저고리로 깔끔하게 차리신 어머니가 짚으로 엮은 계란 몇 줄과 지난 봄 마련하신 산나물을 이고 울 밖으로 떠나시는 어머니가 아직도 장날의 풍경으로 떠오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장터야 말로 농·산촌 주민들이 늘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의 탈출구이기에 장터는 언제나 정겨움이 넘친다. 무거운 지게를 풀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신 후 거친 손으로 입가를 쓸어 내시던 아버지, 힘들어도 자신을 기다릴 가족을 생각하며 조금 불콰해진 모습으로 고갯길을 비틀거리시며 실루엣으로 넘어 오시던 아버지상이 아련히 떠오른다. 춘천 오일장의 전통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도시가꾸기(불법노점상 철거) 사업이 시작되었다. 1989 중앙시장과 명동 등 도심지의 많은 노점상을 약사천 복개지로 집단 이주시키면서 풍물장터란 새로운 이름으로 오일장이 태어났다. 본래 시장이란 소비자와 생산자가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지만 이 풍물장은 정돈되지 않은 도시미관을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터라 초기에는 고객이 없어 개점휴업의 상황에서 이주상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처음에는 시청에서 공무원들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풍물장을 이용하게하는 등 힘들게 시작되었다. 저렴한 가격과 싱싱한 물건을 직거래 할 수 있는 장점으로 서서히 춘천의 새로운 명소가 되며 활기가 넘쳐나며 약사풍물장터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의 청개천 복원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춘천에서도 약사천 복원사업이 시행되면서 201011월 또 다시 강제적으로 이전을 해야하는 여건이 된다.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약사풍물 상인들의 반대가 커지만 우여곡절 끝에 온의동 춘천-서울간 고가전철 교각 밑에 143개의 작은 점포들로 새로운 장터를 조성되었다. 상인들의 우려와는 달리 전철을 이용하는 외래인들 늘어나면서 약사천 시절보다 더욱 많은 장꾼들과 고객들로 넘쳐나고 있다. 2. 7일 오일장과 주말장터가 만들면서 평소에도 고객이 찾는 새로운 풍물장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

. 3. 전통 우시장

* 전통오일장과 더불어 아직도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 우시장이다. 물론 이제는 가축시장이라 불리며 예전처럼 농우가 아닌 비육우 위주로 거래되는 장터지만 예전에는 주로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인 농우를 팔고 사는 진정한 삶의 터전이었다. 예전 한우는 기계화영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시기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던 일꾼이자 큰일이 생겼을 때 금방이라도 돈으로 환금할 수 있는 유일한 유동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쯤. 아직도 사위는 어둠이 그득하다. 소를 실은 차량들의 불빛들이 하나 둘 늘어나며 어슴푸레한 새벽녘을 밝힌다. 장터 한구석에 어둠을 깨우는 모닥불도 보인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허허롭던 우시장은 활기를 띠우기 시작한다. 어둠을 가르고 트럭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소울음 소리와 소장수들이 걸쭉한 대화들이 오가며 분위기를 달구어 나간다. 이제는 예전처럼 고삐를 잡고 소를 몰고 오는 농민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차량들이 뒤엉키며 차량에서 소를 끌어 내린다. 여기저기에서 소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흥정소리로 장터가 소란스럽다. 춘천시 퇴계동에 위치한 퇴계동 우시장의 풍경이었다. 1980년대 몇 차례 다녀온 기억으로 이미 사라져 버리고만 우시장을 기억의 풍경으로 떠올려 본다.

2, 7일에 개장하던 춘천 퇴계 우시장은 새벽 5시에 개장하여 오전 9시경에 폐장했다. 그러니 장터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보려면 개장시간에 맞춰 가야만 한다. 250kg는 될 것 같은 우람한 황소도 있고 한쪽에서는 송아지가 거래되기도 한다. 때로는 아직 젖도 못 뗀 송아지가 함께 나와 그 와중에 어미소 젖에 매달리는 풍경도 보인다. 들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으며 울던 소울음소리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한우를 가운데 놓고 불룩한 전대를 차고 있거나 뒷춤에 지전을 한 움큼 들고 흔들며 흥정을 나누는 중계상인들이 보인다. 또 한편에서는 ,소의 입을 벌려보고 엉덩이를 까보며 값을 흥정하는 풍경 또한 색다른 볼거리였다.

순하디 순해 보이는 그 커다란 눈을 꿈벅거리며 자신을 두고 떠나는 옛 주인을 향해 울음아닌 울음으로 작별을 고하던 그 소의 촉촉한 눈망울이 아른거린다. 한국인에게 특히 농민에게 ''는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가장 큰 재산임과 동시에 가족이자 정직한 일꾼이었다.

 

춘천 우시장은 몇 차례의 장터 이동이 있었다. 1976년 개장된 춘천 퇴계 우시장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지금의 효제초교 입구에 있었다. 도시개발에 밀려 당시에는 도시 변두리였던 이곳 퇴계동에 3,300평의 면적으로 개장되었었다. 하루 평균 2~3백두가 거래되며 추석이나 설날 명절에는 4백두까지 거래되던 전국 규모의 우시장중 하나였다고 한다. 도내와 인근 경기도 가평은 물론이고 멀리 충청도 업자들까지 왕래하고 있었다. 춘천 우시장이 이렇게 활성화 된 것은 춘천이 영서 내륙과 사통팔달로 연결된 교통망이 좋기도 했지만 도농도시로서 농축가들이 상당수 있었고 바로 우시장 주변에 도축장(이성산업)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화되는 시간 앞에 영원한 강자는 없는가 보다.

도시가 다시 확장되면서 변두리였던 우시장부근의 논밭이 사라지며 고층아파트단지가 하나 둘 들어서더니 금방 도시의 중심지처럼 변신을 시도했다. 전통 우시장터의 감성이나 분위기보다는 우시장 주변 주민들의 삶의 질이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거세어 졌다. 결국 인근에 있던 도축장이 먼저 홍천으로 이전되고 결국에는 우시장마저 2004년 신북면 율문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영서지방 최대 규모였던 춘천 퇴계우시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빼곡히 둘러싼 아파트와 골프연습장 사이에 위치했던 우시장터는 주변이 복토되면서 움푹한 빈터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몇몇 식당들의 간판마저 초라하고 을씨년스럽게 다가온다. 사람냄새와 동물냄새가 뒤엉키며 따뜻함을 풀어내던 이곳 우시장 빈터에서 잠시 회상에 잠겨본다.

 

4. 춘천의 재래시장

 

* 재래시장의 사전적 해석은 예전부터 있어오던 시장을 백화점 등 물건판매 장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개설 허가된 시장 중 1980년 이전에 개설된 시장으로서 시설이 노후화되어 재개발 및 근대화의 필요설이 있는 시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춘천에는 중앙, 요선, 서부, 남부, 동부, 제일, 토우, 후평1동을 비롯 8개의 상설시장이 있다. 2000년대부터 대형 슈퍼가 들어오면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지만 불과 얼마전만 해도 재래시장은 우리의 삶과 불가결한 관계로 이어왔다. .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원주에서 임시 도정을 꾸렸던 도청이 1953년 제자리로 돌아오고, 도시에는 먼저 1955년 춘천지방법원(현재 브라운 상가 위치)건물이 지어진다. 이어 1954 년 죽림동에 중앙시장이, 1956년에는 요선시장이 들어선다. 1957년에는 현재의 춘천 시청사가 준공되는 등 도청소재지로서의 위상을 찾으며 도시가 정비되어 나갔다. 이어서 1957년에 서부시장이, 1963년에는 제1공설시장(현 제일백화점 )이 차례로 개설되었다.

 

이후 인구증가 및 도시의 변화로 고객의 편이와 상권이 분산되면서 남부시장(1981), 동부시장(1988) 토우시장(1988)이 형성되었다. 1985년에는 청과물시장이었던 제1공설 시장이 제일시장으로 거듭나고 서부시장도 1988년 허름했던 상가를 헐어버리고 주상 복합 건물(신동아 아파트)로 신축하여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서부시장은 예전 1960년대 기와 집골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때는 활발한 상거래로 호황을 누렸었다. 그러나 주변에 기지촌, 인근 미군부대의 비행기 소음, 상권의 변화와 요선동으로 직행할 수 있는 요선 터널이 뚫리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외에도 후평시장, 사농동 농산물도매시장 등이 있으나 조사기간의 부족과 자료의 한계로 춘천의 대표시장이랄 수 있는 중앙시장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중앙시장은 1952년 미군들에 의해 지금의 시장같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긴 했지만 이 일대에 595개의 작은 점포들이 만들어 지면서 시작되었다. 1954점포가 추가로 건설된 후 1960년 당시 상인들이 시장 활성화를 위해 땅을 구입하여 정식으로 주식회사 춘천 중앙시장을 만든다. 지금까지도 중앙시장은 그 동안 수차례 옷을 갈아입으며 변신을 거듭 해 나가고 있다. 이미 1세대 상인들은 거의 손을 놓고 대물림을 했거나 새로운 점주들이 자리했지만 상인들의 연령대도 높고 보통 3~40년 이상을 지속해 온 분들이 많다. 점포 수는 중앙 통로의 노점을 포함해 총 282개로. 의류점을 비롯 수선집 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초기에는 잡화와 군수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주축을 이루며 발전하다가 1960년대 화재 로 1960년대 말 현재의 모습으로 건물을 신축하였다. 중앙시장은 1970년대 명동 거리와 함께 춘천시민 뿐만 아니라 춘성군,화천군, 양구군 주민까지 찾는 가장 활성화 된 춘천의 대표적 명소였다. 고객들이 넘쳐 나며 춘천 유행문화의 중심역할을 했다. 그 당시에는 빈점포를 볼 수도 없었고 중앙통로 노점도 성업으로 많은 프레미엄이 붙여졌기도 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춘천지역에 대형 슈퍼마켓(새시대 체인 등)이 들어오고 제1공설시장이 제일백화점으로 변신하는 등 상설시장은 변화와 쇠퇴기를 맞으며 상권이 약화되기 시작 했다. 침체를 벗어나고자 2010년 재래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외관을 그럴싸하게 화장 하고 춘천 낭만시장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부활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상설시장도 어느덧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은 세월. 이제는 재래시장이 갖던 어둡고 쾌쾌 함이나 정리정돈이 안된 불편함 그리고 무뚝뚝함이 연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차장이나 쾌적함 그리고 다양성에 비해서는 경쟁력이 떨어져 가격이 저렴함에도 젊은층들에게는 외면을 당하는 실정을 부정 할 수 없다. 그러나 재래시장은 규격화 되지 않아 계량할 수 없는 인간적인 푸근함과 넉넉함이 어우러지며 향수를 자극하게 하는 곳이다. 아직도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모습이지만 그 안으로 흐르는 인간적인 정과 소박한 인심에 끌려 우리는 아직도 가끔씩 장터를 찾아 향수를 달래고 있는 것이리라.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에는 자주 시장을 가야했다. 시장을 가면 여인네들은 모두 군대의 전선줄(BB)로 얼기 설기 만든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보던 풍경이 떠오른다.

'재래시장'이라는 이름은 대형마트 등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불린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서민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기능을 하는 장소였다. 대형마트의 마케팅이나 편의제공 등 경쟁력에 밀려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있는 재래시장은, 정말 얼마 후면 예전의 5일장' 처럼 추억의 장소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정찰제라는 명분하에 십원짜리 동전 하나까지 주고받고, 봉투값도 따로 내야만 하는 대형마트와는 전혀 달랐다. 말만 잘하면 덤이 후했고 가격도 깍아 주고 때론 외상도 가능하던 공간이 바로 재래시장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춘천사람들의 일상과 함께해온 곳 사람냄새가 물씬 배어있는 곳이 바로 재래시장이었다.

대형마트의 쾌적함과 편리함을 쫒다보니 정겨운 풍경이 사라져 가고 있다. 자꾸 현대화라는 허울을 쓰고 대형마트화되는 재래시장을 바라보며 아직은 정겹게 다가오는 이 풍경을 남기고 싶다.

 

중앙시장 약사

년 대

내 용

비고

1954

- 미군의 지원으로 점포건설 및 개설

춘천의 근대적인 상설시장으로는 최초개설

 

1960. 7

19607월 중앙시장 주식회사 설립

중앙로 242-18

1962

개축공사 시작

 

1965

건물완공(점포수 335개 연면적 1,336평 목조 함석건물)

 

1966

대화재 발생

 

1960년대 말

-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재개축(대지면적 12,402)

지상 3

점포수 282

1980

- 시장 현대화 추진

 

2002~06

- 주 통로를 아케이드arcade화하여 현대화모색

 

2010

- 중앙시장에서 낭만시장으로 명칭변경

 

 

 

 

5. 춘천 양키시장

*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CAMP PAGE)와 많은 한국군 부대들이 춘천에 주둔하면서 군용물품이 뒷거래를 통해 시민들에게 나오기 시작했다. 정식 루트가 아닌 불법거래였다. 요선시장, 서부시장 중앙시장 등 상설시장이 발달하면서 또 한편에서는 미군부대와 한국군부대에서 비공식적으로 나온 물건들을 팔고 사는 군수물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쟁이후 모든 물자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물건의 질이 형편없던 시기라 튼튼하고 질긴 군복 등 군대물건을 선호하면서 거래품목이 늘고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시장은 당초에 지금의 농협도지부 바로 위 도로변에 있었다. 당시 서울-춘천간 직행버스 차부(삼용직행버스) 옆에 나무판자로 집을 짖고 지붕은 루핑을 덮은 정말 단순한 건물 안에 여러 개의 좌판을 늘어놓은 노점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군복을 구입해 검은색으로 염색을 한 뒤 파는 것으로 시작되어 껌, 초콜릿, 설탕, 커피, 땅콩, 군화, C-레이션, 군복, , 오렌지, 과자류 등이 주류를 이뤘다. 점차 거래품목이 다양하게 형성되고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비슷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상설화되었다.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몇 년 후 지금의 중앙시장 한편에 미군물품을 파는 소위 양키시장이 형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앙시장속의 또 다른 이색시장 양키시장은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소위 돈있는 사람들이 주로 찾는 고급 이미지를 가졌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해도 미제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다못해 국산 껌은 씹다보면 입에 콩알만큼 작아지며 향도 처음에만 단맛이 나다가 사라졌다. 미제 껌은 향도 좋고 단맛도 오래가 저녁 잠자리에 들 때는 벽에 붙혀 놓았다가 다음날 아니 며칠 동안 씹어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가지고 놀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이라 주로 술래잡기, 자치기, 구슬치기, 종이를 접어서 만든 딱지놀이가 주였다. 그때 새롭게 시작된 것이 껌딱지(포장지)였다. 국산 껌 딱지에 비해 미제 껌 포장지는 몇 배나 높은 품격을 갖고 있어 당시에 미군부대주변과 버스주차장 등에서 껌 딱지를 주으며 희희낙락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새삼 떠올라 얼굴이 붉어진다.

 

6. 반짝시장, 번개시장, 도깨비시장

반짝·번개·도깨비, 새벽시장으로 불리는 시장들은 상설의 의미를 갖고는 있되 개장과 파장시간이 짧은 사이클cycle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시장은 상점의 개념이 아닌 노천露天과 노상路上에 벌리는 좌판형식을 취한다. 대형마트와는 달리 좁은 골목길이나 차로옆에 있어 주차하기도 힘이 들고 카드는 물론 영수증 발급도 환불도 어렵다. 더구나 중국산을 국산으로 둔갑하여 파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문상점보다는 할머니들이 직접 농사지어 보따리에 이고지고 가져온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제철 농산물을 값싸게 구입하고 흥정하는 볼꺼리로 향수에 젖는 노인층이나 옛 풍경이라며 호기심으로 찾는 젊은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춘천에는 현재 2개의 반짝시장이 성업 중에 있다.

소양로 번개시장.

지금은 횟집으로 변한 구 소양로 파출소를 끼고 들어가면서 시장은 시작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에 두부집과 야채와 건어물집, 농약사, 약초상, 반찬가게, 기름집, 참숯과 번개탄을 파는 가게도 눈에 띈다. 이쯤에서 작은 네거리가 형성되는데 이곳에서 우측 서남향으로 좁은 골목길이 이어진다. 이곳이 바로 바로 반짝시장이다. 옷가게, 기름집, 닭집, 채소집 등등이 모인 상점을 따라 50m 정도 가면 우측으로 100평도 안될 것 같은 작은 공터가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여명을 흔들어 깨우며 새벽부터가 아침 9시 정도까지 형성되는 번개시장 장터이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장터는 상인들의 화톳불가에서 시작된다. 4월초순의 날씨치고는 아직 쌀쌀함 때문인지 작은 드럼통에서 불꽃을 날리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곁으로 상인들이 부나비처럼 모여든다. 왜 이리손님이 없냐고 묻자 4월 중하순부터 5월초는 되어야 각종 푸성귀가 나와야 촌로들과 고객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상인들은 짐 보따리를 푸는 등 부산히 움직이지만 아직 손님들의 발길은 볼 수 없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양지쪽에서 웃자란 푸성귀인지,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푸성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비닐봉투마다 초록이 넘쳐난다.

 

지금의 번개시장은. 예전 정미소와 연탄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1981년 그 앞 공터를 시장으로 개방하면서 뱃터 주변의 로상에서 지금의 장터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번개시장이 된 이유는 아낙네들이 농산물을 새벽에 가지고 나와 팔고는 학교가는 아이들 아침을 해 주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잠시 동안만 장이 섰다 파장이 되는 까닭이었다. 마치 번개처럼 순간에 반짝하고 사라진다하여 번개, 도깨비, 또는 반짝시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장터의 주인공들은 주로 서면의 신매리. 금산리, 방동리, 월송리의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아낙네들이었다. 박사마를로도 불리는 서면주민들의 근면함이 그리고 농사의 대물림을 피하려고 가진 높은 교육열과 그 부모들의 노고를 보면서 향학열을 불태운 부모와 아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박사마을은 최근 이곳 출신 박사 100여명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마을이다. 서면 금산과 신매(오미)나루 그리고 중도에서 출발한 첫 통통배가 뽀얀 새벽 물안개를 헤치고 소양2교 주변 선착장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저마다 이고 지고 온 크고 작은 보퉁이와 광주리를 채웠던 농산물들이었다. 선착장에서 멀지않은 공간이나 길가에 풀어놓고 거래를 시작한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침에 아이들이 등교시간 전에 물건을 팔고 다시 집에 돌아가 아이들을 챙겨야 했다. 이른 새벽녘에 밭에서 뽑아오거나 최소한 하루 전에 마련한 농산물이기에 일반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싱싱했고 직거래라 물건 값이 저렴했다. 뿐만 아니라 인심도 후했기 때문에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인간냄새가 난다고 할까 전문상인들이 아니기에 약삭빠른 셈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 소비가 있으면 당연히 생산자나 판매자가 따르는 법 기존의 작은 시장은 이렇게 활기를 띠우며 소양로 번개시장 혹은 반짝시장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상추, 호박, 열무, 고추, 감자, 배추, , 산나물 등 다양한 건강 먹거리가 주 거래품목이 되었다.점차 고객이 늘어나면서 보퉁이와 광주리에서 외바퀴수레나 리어커로 규모가 커져갔다. 처음에는 아낙이나 할머니들이 주 판매자였으나 거래량이 커지면서 남정네들도 합세하기 시작하며 매스컴에서도 시장을 소개하며 외래인들까지 새벽시장을 찾았다.

싸고 싱싱한 물건을 살수있자 춘천시내의 채소점이나 식당주인들이 몰려 장터는 더욱 활발하게 붐비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의암댐을 돌아오는 국도 이외에는 선박만을 이용하던 교통오지에서 2000년 서면 신매리와 사농동을 연결하는 길이 660m 4차선 신매대교가 개통되면서 주민들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지만 오히려 번개시장은 쇠퇴기를 맞는다. 소규모로 운반되던 농작물들이 차량으로 운반되고 사농동에 농산물시장이 개설되고 후평동 롯데마트 진입로 주변에 또 다른 새벽시장(반짝시장)이 형성되면서 약화일로를 걷고 있다. 최근 상가활성화를 위해 장승을 세우는 등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지만 미지수이다.

 

후평동 번개시장

이곳에 반짝시장이 개설된지는 불과 15여년에 불과하다. 아니 그때는 반짝시장이 아닌 몇몇 여자노인들이 등산로 입구에서 농산물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지금의 만천리방향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뚫리지 않았던 시절 지금 도로 입구(사거리)는 바로 애막골 등산로(산책로)의 시발점이었다.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많은 주민들이 새벽에 왕복 1시간 이내 거리의 나지막한 능선으로 이어진 산길을 이용했다. 처음 한두사람의 노인들이 등산로 입구에서 손수 기른 오이, 호박, 푸성귀 등을 가지고 나와 파셨다. 이 산책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가지고 나온 농산물들이 바로바로 팔리면서 소문이 나자 이어서 손두부, 쑥떡, 과일 등 판매종류가 늘어나면서 지금의 롯데마트 길을 따라 약 100m의 노점시장이 형성되었다. 주 고객들이 인근 아파트주민들이라 출근을 하는 사람들은 새벽에 산책로를 이용하는 시간대로 두세시간 동안 시장이 열렸다. 그러나 남편 출근과 아이들을 등교시킨 주부들이 다시 산책길을 찾다보니 좀 더 늦게까지 장이 형성되고 특히 주말에는 정오까지 장이 이어지기도 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 장이 활성화되면서 인근의 대형마트에서 항의가 들어와 오전 10까지만 개장을 허락했다고 한다. 다만 도로주변에 장이 서다보니 고객과 상인들의 주차수용이 어려운 교통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애막골에서 만천리 방향으로 도로가 새롭게 뚫리면서 이 반짝시장도 새 도로 안쪽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다. 길이 약 300m정도가 이어지는 장터는 낮 11시 정도까지 개장된다. 이제 애막골시장에는 이제 예전처럼 직접 농사를 짓거나 산과 들에서 채취한 농산물을 가지고 나오는 촌로들보다 과일, 김밥, 두부 등 전문상인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도심 속에서 옛 장터의 감성을 느낄 수 있어 볼거리, 살거리, 먹거리로 충만하다. 다만 주차문제가 조금 심각하지만 춘천의 명물이 된 것 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도표로 본 춘천의 재래시장

중앙시장

소 재 지

춘천시 중앙로 242-18

개 설

1960. 8

건물구조

철근 콘크리트 지상 3

점 포 수

335

대지면적

12,402

 

서부시장

소 재 지

춘천시 소양로 2172-1

개 설

1957

개 축

1992. 9

건물구조

철근콘크리트 주상복합건물

대지면적

3,497

 

제일시장

소 재 지

춘천시 죽림동 32번지

개 설

1963

개 축

1984

건물구조

천근 콘크리트 지하 1층 지상 3

점 포 수

189

대지면적

4,028

 

동부시장

소 재 지

춘천시 운교동 183번지

개 설

1988. 9. 19(개축)

건물구조

복합주상건물

점 포 수

130

대지면적

3,375

남부시장

소 재 지

춘천시 효자동 684

개 설

1982. 9

건물구조

철근콘크리트 지하 1 지상 3

대지면적

3,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