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골목길 단상

심봉사(심창섭) 2015. 12. 4. 12:32

 

 

수필

골목길 단상

樂涯 심창섭

 

* 우산을 펼치고는 지나칠 수조차 없는 좁고 굽은 골목길에 진득한 가난함과 옹색함이 배어있다. 담장안쪽에서 달그락거리는 부엌의 분주한 손길이 느껴지고 낯선 발자국 소리에 상투적으로 짖어대는 맹견(?)의 목소리조차 한가롭게 들려오는 골목길이다.

 

예전처럼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도, 구멍가게 앞 평상도 모두 사라져 버린 그저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한 골목길 풍경이었다. 페인트가 각질처럼 벗겨진 철대 문이 빠끔히 열려 있거나 입을 굳게 다문 사자 문고리가 골목길을 무료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 어느 도시보다 발전이 늦다고 했던 춘천이었지만 옛 스런 모습을 간직한 마을과 골목길은 불과 서너군데 일뿐이었다. 계속되는 재개발과 재건축의 소식에 이제 얼마 후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고 말 것이다. 내친김에 기와집골을 시작으로 소양동 골목길과 약사동 골목길을 찾았다.

 

재개발이 시작된다는 뉴스에 멜랑꼴리한 마음으로 미로 같은 골목길을 누볐다. 사람 사는 모습과 사람사는 냄새를 마주하고자 했지만 이미 온기를 잃어버린 텅 빈 골목길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한줌 햇살이 골목길을 지키고 간혹 길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담장머리를 장식한 녹슨 철조망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려낸 유리병의 파편이 경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골목길로 삐죽이 돌출된 낮은 슬레이트 지붕과 축 늘어진 전깃줄이 행인의 고개를 숙이게 하지만 연탄가스 배기 굴뚝과 문패만은 아직도 텃세를 부리듯 번듯하게 자리하고 있다.

 

골목길을 누벼대던 아이들의 뜀박질도, 재잘거림도 무지개꿈 따라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을 따라 떠나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의 슬픈 눈망울을 떠올리게 하는 키 작은 보안등 알전구가 한낮에 눈을 뜨고 졸고 있는 가슴 먹먹한 풍경이 겨우 존재하고 있었다. 이미 골목길은 재개발이라는 단맛에 빠져 빈집들이 늘어가고 떠나지 못하는 몇몇의 사연들이 주름진 피부에 문신처럼 남아있다.

머지않아 사라져 버릴 골목 안 풍경이다. 올망졸망한 작은 집들, 키 낮은 담장너머로 마주하며 함께 하던 이웃들이 떠나고 있다. 좁은 골목으로 운반이 어려워 조금 큰 가구는 마음 놓고 들여 놓을 수도 없는 사치품에 불과했다. 좁은 비탈길 양손의 새끼줄 끝에서 흔들거리던 19공탄의 무게가 아직도 느껴지는데 골목길은 그저 적막일 뿐이다. 도시전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성형수술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인공의 아름다움 이면에 조금은 남아있을 골목길 풍경을 찾는다.

 

술래잡기의 원점이던 전봇대와 낙서로 얼룩진 시멘트 담벼락엔 아직도 어린 시절의 온기가 느껴지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수다를 떨던 그곳에는 아직도 거미줄이 얼기설기한 가로등이 버티고 있었다.

 

기와집 골과는 달리 이곳은 정말로 좁은 골목길이며, 낮은 담장들이다. 예전엔 판잣집들로 시작된 빈민가였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골목길의 정취는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이다. 햇살아래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야할 하얀 빨래도, 지붕위에 널려 있을 것 같던 빨간 고추도, 작은 평상에 몇몇의 노인들과 강아지가 나른하게 졸고 있는 모습도, 담장너머 보라색 라이락 꽃 짙은 향기도 만날 수 없었다. 그저 낯선 기척에 앙칼지게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만 골목길을 메우고 있었다.

춘천의 골목길 안에는 이름난 부자동네가 있었다. 농경이 우선하던 시기에 너른 전답이 부자의 척도였다. 지난 2005년에 철수한 미군부대Camp Page자리는 20여만평의 너른 농경지였다. 논밭 가까운 곳에 백석꾼(곡식 백 석을 수확할 수 있는 땅을 가진 부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신흥 부자촌이 바로 기와집골이었다고 생각된다. 봉의산의 기점으로 앞뒤에 너른 뜰이 있다. 뒤편의 너른 곳이 후평後坪(뒤뜰·뒷두루)이고, 앞쪽 지금은 근화동으로 불리는 전평리前坪里(앞뜰·앞두루)이다. 바로 기와집골 앞쪽에 위치한 전평리의 너른 농경지로 백석百石 소출을 올리는 큰 농사꾼(백석꾼)들이 가까운 곳에 터를 잡기 시작하여 형성된 마을이라는 설과 또 하나는 이곳에 흰돌白石이 많다고 해서 백석동이라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을 百石洞 또는 白石洞으로 부르며, 모두 전통기와로 집을 지어 기와집 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기와집들을 우리의 전통 기와집으로 알고 있지만 건축학적으로 살펴보면 전통방식을 조금은 빗겨난 퓨전기와집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양식에 대한 필자의 상식에 무리가 있을 수 있으나 알기 쉽게 흔히 서까래라고 불리는 연목椽木 구조로 구별해 보고자 한다. 처마는 둥근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單檐 홑처마 끝 부분에 각재角材 서까래인 부연浮椽을 더 달아 처마를 밖으로 내민 겹처마重檐로 구별한다. 궁궐이나 사찰 등 중요건축물은 겹처마로 짓고 단청丹靑 하여 위용을 드러내지만 일반 민가의 건축물은 홑처마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건축의 기본이랄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소위 권력이나 경제력있는 부자들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겹처마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후 일반서민들도 기와집을 겹처마로 짓는 것이 전국적으로 유행을 되면서 만들어진 기와집들이다. 이곳 기와집 골의 가옥들도 모두 겹처마 건축물들이다. 사실 춘천지역에 전통기와집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아쉽게도 거의 불타버렸다. 다만 동면 노루목의 고가옥을 비롯 서너채가 겨우 남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회오리 속에 이곳 전평리의 사유지가 징발徵發되면서 1952년 미군비행장 활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58년에 미군들이 주둔하게 된다. 농토를 잃은 백석꾼들이 하나둘 떠나자 부촌富村으로 인식되던 곳이라 신흥부자들이 들어서면서 기와집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곳의 기와집들이 겹처마로 건축된 사례를 보아 한국전쟁 이후에 지어진 가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기와집 골의 도로가 지금은 골목길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구획을 나누고 반듯하게 지어진 곳이었다. 기와집골 윗편 모수물재 도로가 2차선이 채 안되었는데도 화천, 양구행 시외버스가 오가던 곳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현재의 골목길은 대단히 넓게 만든 길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도시의 발전이 중앙로 일대로 집중되고, 미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이곳은 쇠락衰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본래의 모습마저 잃고 소외된 마을이 되었지만 춘천에서 많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유일한 마을이다. 시멘트 주거환경에 실증이 난 도시민들이 사람 냄새나는 곳을 찾는다며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기와집골이 부각되면서 그 가치를 인식하며 보존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특히 이곳에서 촬영한 겨울연가라는 드라마의 국제적 히트로 이곳과 춘천일원에는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건축물이 노후되고 좁은 골목과 문화시설이 없는 여건으로 삶의 온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골목길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고 인적마저 드문드문하더니 결국 재건축의 절차를 밟고 있다.

 

이미 시한부 판정을 받은 기와집 골은 몇 년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곳주민들의 삶과 경제적인 가치로만 생각한다면 잘된 일인지 몰라도 춘천은 또 하나의 명소를 잃는 셈이다. 너무 아쉽다. 그리고 곧 이곳이 그리워지리라. 도시의 발전과 쾌적함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흑백사진처럼 바래가는 과거의 흔적에 매달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제는 잊어야할 풍경이며, 그리워야할 풍경일 뿐이다. *

                                                                                                                                                                                          (2015 '춘천의 옛 풍경' 수록분/문소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