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춘천이야기- 그 이름을 떠올리다.

심봉사(심창섭) 2015. 12. 4. 12:36

 

 

향토사

그 이름을 떠올리다.

 

樂涯 심 창 섭

 

*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어느 것보다도 부침浮沈이 심한 것이 상업이다. 물물교환에서 시작된 원시적 상거래가 터를 잡으며 상가가 형성되고 또 집단적으로 시장이 들어서고 특성화 거리가 형성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자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진 상호는 얼마나 많았던가. 생계를 위해 혼신을 다해 벌렸던 상점들이지만 그 여닫음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한때는 밑져도 밥은 먹을 수 있다는 계산아래 수만의 식당들이 기몰起沒의 수순을 거쳤고 지금도 그 대열은 계속 진행 중이다. 어떤 이유로 그 상호를 만들게 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아직까지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연륜을 느낄 수 있는 묵은 춘천의 상점을 대상으로 하였다. 물론 상호는 그대로지만 주인이 이미 바뀌거나 대를 이어 계승되는 상점도 있었으며 주인은 그대론데 세류의 바람에 상호를 달리한 점포도 있었다.

 

기억의 한계로 모든 것을 떠올릴 수는 없었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상호가 떠올렸다. 본고는 필자가 개인 생활환경을 통해 접근한 것이기에 춘천전체를 아우른 것이 아닌 주관적인 기억을 나열하였을 뿐이다. 분명 더 오래되고 더 중요한 상호를 누락시킬 수도 있고, 상호를 잘못 기록할 수 있음도 부언한다. 급격히 변해가는 시대의 변화를 묵묵히 감내하면서, 사양길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켜오거나 오랜 연륜을 원조라는 이름으로 성황을 누리는 상점도 있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상점이나 상호는 먼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한다. 믿을 수 있다는 절대적인 신용과 낮 익은 친근감 그리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어 우리의 시선을 끌고 단골손님의 지위를 유지하게하며 다시금 찾게 한다.

 

지면상 그들의 모습을 상세하게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현시점에서 다시 한 번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반추反芻하며 아직까지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어쩌면 구닥다리 같은 옛 상호를 지키고 있는 것도 춘천을 지탱하고 있는 힘이 아닐까?

오래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묵은 것은 흔적을 남긴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까지 보이지 않는 나이테를 만들며 시간의 흔적을 남긴다. 오래된 것은 진부함이라는 등식 속에서도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기치를 걸고 보고, 느끼고 혼자 생각했던 고향의 옛 흙냄새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시간과 젊음을 소비하면서 만들어진 사건들은 하나하나의 기억이 되고, 때론 추억이 되지만 우리의 기억회로에는 한계점이 있어 서서히 사라져가는 수많은 생몰의 존재를 기록이라는 매체를 통해 남기고 있다.

 

춘천에서 태어나 몇 년간의 타향살이 이외에는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지만 솔직히 내가 아는 춘천의 질량은 얼마나 될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보는 방법이나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그 해석은 완전히 다를 수 있는 것인데 나의 기억이 얼마나 객관성을 띨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저 가물거리는 기억하나로 태어난 곳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귀소본능으로 물길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나는 한국전쟁 직전 해에 춘천 요선동에서 첫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운이 없었던 것인지 부모님들이 복이 없으셨던 건인지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태어난 미운 오리새끼였다. 간난아이였기에 전쟁의 총성이나 피난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한 점도 떠오르지를 않는다. 그것 또한 행복이라 생각해본다.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 어떻게 놀았는가가 대부분이지만 좌우간 놀이시설이라고 아무것도 없던 50년대 동네또래들의 놀이터는 주로 봉의산이었다. 봄볕이 따사하면 민둥산이던 봉의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잎을 따먹으며 춘천시가지를 내려다보곤 하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도시너머로 소양강과 대바지강이 보였고 멀리 서쪽울타리로 가로막고 있는 삼악산을 막연히 바라보았다. 또 여름이면 봉의산 기슭에서 풍뎅이를 잡는 일로 하루를 소비했고 가을이면 겨울양식을 준비하는 다람쥐 마냥 열심히 도토리를 주웠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향교를 지나 말탕개미 고개 너머 한우물이 있는 이선길댁 연못에서 왕잠자리(호투)잡기에 열중했다. 겨울철 눈이 내리면 도청 앞에서 춘천경찰서가 있던 지금의 한국은행까지 비탈길을 푸대를 깔고 미끄럼을 탔다. 차량이 별로 없던 때였지만 경찰들의 단속을 피해 썰매를 타는 스릴도 즐겼다. 장갑조차 변변치 않고 손등이 트고 콧물이 흘러도 개의치 않고 해질 무렵까지 뒹굴다 보면 저녁 먹으라는 엄마들의 소리침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놀이터라는 공간이 없던 시절 그때는 그게 다였다. 요선동에서 7살 때 할머니를 잃고 이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가을에는 또 어머니를 잃는 비운悲運을 겪었다. 어쩔 수 없이 당시 세무서 앞쪽 소양로에 사시던 고모 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활동무대는 봉의산을 잃고 대바지강과 배미산, 곰짓내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곰짓내는 얕고 맑은 여울물이 흘렸다. 빨래터이기도 했지만 고무신만 있으면 송사리, 탱가리, 버들치 등을 잡거나 멱을 감을 수도 있는 최상의 놀이터였다. 고학년이 되면서 곰짓내에서 좀 더 넓고 강물이 깊은 대바지강으로 활동범위를 넓혀 나갔다. 지금의 세무서 밑에는 전매지서와 전매지청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전매지청 끝 부분부터 곰짓내 뚝방까지는 복개되지 않은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춘천중학교 담장과 시외버스 주차장이 마주보고 있었다. 당시 춘천중학교 부근은 논밭과 미나리 농사가 주를 이루어 개구리와 메뚜기 등을 잡으러 오가던 곳이었다. 경춘 철도 뚝방터널을 빠져 나가면 다시 논밭이었다. 여름철 대바지강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길을 오가야 했는데 주변 밭에 심은 토마토, 당근, , 오이 등이 우리들의 간식거리였다. 오이나 당근 한 두개를 뽑아 우적우적 씹으며 대바지강으로 향했다. 강 위편에는 지금은 없어진 육군 제3보충대가 있어 훈련병들이 집단으로 목욕을 하고 식기 씻은 물이 내려오긴 했어도 참으로 깨끗하고 맑았다. 강은 급류로 흘렀지만 가장자리 쪽은 비교적 잔잔해 우리들의 수영장으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뽑아온 무나 당근을 물위로 던진 뒤 개헤엄으로 떠내려가는 야채를 잡아 한입씩 베어 먹으면서 즐거움과 배고픔을 해소했다. 또 강주변이 검은 개흙덩이가 있었다. 온몸에 그 보드라운 개흙을 바르고 검둥이가 되었다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백인이 되는 놀이에 심취하곤 했다. 대바지강에서 서면 금산리까지 가려면 4개의 물줄기를 건너야 했다. 둘째 강은 얕은 여울이었는데 달팽이(다슬기)가 많았고 셋째 강은 깊고 유속이 있어 나룻배를 타야했다. 마지막 넷째 강에는 조개(재첩)가 있어 어린 시절 두 어번 친구들과 조개를 잡으러 갔던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때 대바지강은 의암댐이 생기기 전이라 지금처럼 호수가 아니었다. 강 건너의 중도는 모래땅으로 참외, 수박, 땅콩 등을 많이 경작하였는데 이곳이 우리들의 보물창고였다. 다만 이 곳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다. 다행이 양 가장자리를 빼고는 그리 깊지 않았지만 물살이 급했다. 우리는 도착지보다 약 70m이상을 상류로 올라가서 물살에 몸을 맡기고 걷고, 헤엄을 치며 떠내려가는 형국이었다. 어렵사리 강을 건너 발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강돌을 밟으며 참외 밭이나 수박밭까지 접근한다. 밭 한가운데 높다란 망루 원두막의 거동을 실루엣으로 살피며 낮은 포복으로 뜨거운 백사장을 기어 한 두개씩의 과일서리를 했다. 무사히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억세게 운이 없는 날은 주인에게 잡히기도 했다. 그 뜨거운 햇살아래서 무릎을 꿇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무조건 용서를 빌었다. 그때만 해도 서리는 도둑질이 아닌 철없는 아이들이 벌리는 해프닝happening이자 일종의 애교적 행동이었다. 혼이 나면서도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해 본적이 없었다. 강을 다시 건너와야 하기 때문에 많을 양을 욕심내지는 않았으나 급하게 따다보니 익지도 않은 과일을 땄다가 버리곤 했기에 밭을 망친다며 이유였다. 사실 서리는 스릴이 있었다. 뙤약볕아래 뜨끈뜨끈해진 과일이었지만 왜 그리도 맛있고 맛나던지…….

생각해 보니 모두가 먹고 노는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절박했고 가장 큰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서리행위는 다음날 학교에서 멋진 무용담으로 재탄생하는 재미를 버릴 수가 없었음을 솔직히 고백해 본다.

이른 봄. 달작지근한게 당기면 삽을 하나씩 들고 논밭두렁을 헤쳐 메를 캐다가 농부들에게 걸려 혼쭐이 나기도 했다. 또 칡을 캔다며 곰짓내를 건너 야산(삼천동 안보회관)을 하나 넘어 지금의 상상마당(어린이회관) 주변에서 캔 칡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던 추억도 있었다. 그렇게 칡을 캐고 산딸기를 따먹던 이곳이 이제는 도시의 한복판에 서있는 형국이 되었으니 세월이 많이도 지나쳤나보다.

 

이외에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 몇 개 더 있었다. 장남감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지만 상급생이 되면 딱지나 구슬놀이는 너무 평범했다. 당시 중앙로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장난감 딱총용 화약을 편편한 돌멩이 위에 올리고 다시 넓적한 돌을 덮어 놓는다. 차량이나 우마차가 그 위로 가다보면 마찰에 의해 화약이 딱! 소리를 내며 터진다. 소리에 놀란 운전기사나 우마차꾼이 차를 세워놓고 바퀴를 살펴보는 그 행위를 숨어서 보며 숨죽여 낄낄거리던 개구장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십 원짜리 지전(종이돈)에 가는 낚시줄을 묶어 구멍 난 판장벽 뒤에서 지켜보다보면 길 가던 아이들이 웬 재수냐며 주을라 치면 잡아당겨 겸연쩍은 표정을 짓게 하던 악동의 시기도 있었다. 더 화끈한 놀이로는 예전 남춘천역 주변 옛 군부대 있던 공터에서 캔 화약(라이타 돌의 5배 쯤되는 크기로 구멍이 숭숭 뚫렸는데 대포화약이라고 불렀다)으로 불꽃놀이를 즐겼다. 화약 한주먹을 박카스 병에 넣고 땅에 주둥이가 보이게 묻은 후 불을 붙이면 불꽃이 하늘로 마구 피어오르는 불꽃놀이로 밤늦도록 심취하기도 했다. 아니 그 정도는 약과인지도 모른다. 큰못을 철로위에 놓고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납작해진 못으로 칼을 만들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이 놀이를 즐기다가 억세게도 재수가 없어 혼자 기관사에게 잡혔다.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지만 경찰서에 넘기겠다는 엄포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어 신남역(김유정역)에서 풀려났다. 어린 시절 두 정거장의 먼길을 두려움에 떨면서 집까지 돌아오던 그 막막했던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 끝도 없을 개구쟁이 시절의 그만그만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30여 년간을 춘천의 관청에서 문화관련 업무로 근무한 덕에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곳을 다녔으며, 꽤나 많은데 관심을 가졌었다고 자부해 본다. 조용한 도시로 변함이 거의 없다고 말들 하지만 가만히 돌이켜 보면 춘천도 많이 변했다. 아니 참으로 소중한 유·무형의 많은 것을 잃었다.

 

춘천을 바라보기 시작한건 어린 시절 봉의산에서 내려다본 풍경만이 아니었다. 춘원국도인 원창고개 마루에서도 춘천은 한 눈에 다 조망되었다. 돌아보면 모두가 산뿐이었다. 도시 한가운데 혼자 솟아오른 봉의산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진 산들과 움푹한 분지 안에 오밀조밀하게 보이는 동네가 춘천이었다. 오늘도 원창고개에서 내려다본 춘천은 옅은 안개로 덮여 있다. 구불구불 돌아야 오를 수 있었던 옛 원창고개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멀미라는 신고식을 선사하곤 했다. 급커브를 돌아가는 차량에서 초면의 옆 승객에게 기대어야만 했고 그도 내게 몸을 기대곤 했다. 시외버스를 타면 옆자리에 젊고 예쁜 여자가 타기를 기도했던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시골출신들이야 이 정도의 굽은 도로는 이겨낼 수 있었지만 초행길의 도시인들은 어김없이 욱! ! 거리며 멀미를 해대던 고갯길이었다.

 

1965년 춘천댐을 시작으로 1967년 의암댐, 1973년에는 소양강댐이 준공되어 1개 소도시에 3개의 댐을 가진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게 된다. 그중 의암호 담수로 춘천은 호반의 도시이름으로 치장하게 된다. 3개의 인공호수에서 뿜어대는 안개로 춘천은 안개의 도시라는 별칭도 갖게 되었다.

 

3개의 댐 중 잊히지 않는 건 단연 의암댐 준공식 때였다. 수문을 닫으면 물이 빠진수문 앞 웅덩이에서 고기를 마구 주을 수 있다는 정보(?)을 듣고 3살 아래인 고종사촌 동생과 1시간이상을 걸어서 댐에 도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족대와 투망을 가지고 수문아래쪽에 몰려있었다. 손으로도 건질 수 있다는 엉터리 제보에 빈손으로 온 우리는 막막했지만 수문이 닫히는 동시에 물이 빠진 수문 앞으로 달려갔다. 여기저기 물웅덩이에서 고기들이 튀어 올랐고 족대를 가진 사람들은 쉽게 고기를 건져 냈지만 빈손으로는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다. 다만 남들이 잡은 고기 망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동생을 달래던 생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 전 얼추 20여년 만에 35년의 전통을 가진 옛 단골집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반갑게 맞아주는 낯익은 주인의 젊음모습은 간곳이 없지만 친절한 미소는 물론이고 상들 리에, 인테리어와 소품들도 거의 그대로였다. 또 옛 추억의 음식 맛에 잠시 향수에 빠지게 했던 함지경양식집이었다. 특별한 날에 칼질이나 하자며 찾았던 곳이었고, 귀한 손님접대나 생일날에나 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보니 주변에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한 추억의 장소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성장하면서 관심에서 멀어진 어린 시절 소소한 장난감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 뒤란에 묻어 두었던 손때 묻은 구슬과 종이로 접은 딱지도 있었고, 터운 국어사전 책갈피에 고이접어 두고 보던 선데이 서울표지도 몇 장 있었는…….

막상 돌아보니 이미 많은 것들이 변형되었거나 사라져 버렸다. 낯설음 속에서 그 파편들이 그리움으로 떠오르지만 하나하나의 의미를 반추하기엔 기억의 용량이 너무 작기만 하다.

 

핑계 김에 단편적으로도 생각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를 생각했다. 옛 춘천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적 상호를 떠올려 보면서 오롯이 추억여행을 떠나본다. 50대 후반이상의 춘천사람이라면 잊히지 않는 그리움의 아이콘이 될 수 도 있지 않을까.

 

사실 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춘천의 주요상권은 요선동과 명동 그리고 중앙시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별한 추억이나 이해관계는 없는 곳도 있지만 오랫동안 붙박이로 그곳에 있던 상점들을 떠올려본다.

 

명동의 터줏대감 격이었던 거북당, 그리고 고려당과 만나당, 해금강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중·고생들에게 다방과 극장은 출입이 금지된 장소중의 하나였다. 고교 상급생이나 대학생들은 미팅장소로 빵집을 이용할 때였다. 찐빵, 만두 그리고 옥수수 빵이나 붕어빵이 주류를 이룰 때여서 입안에서 살살 녹는 고급빵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는 값비싼 간식이었다. 생과자도 있었지만 팥빵, 소보로(곰보빵), 크림빵이 대명사였다. 이어서 집집마다 맛과 분위기에 특색을 가지고 있던 뉴욕제과, 콜롬방(아이스케키), 풍미당(짜장면), 대륙붕(전골, 한식), 처갓집(통닭), 왕만두, 금선식당(순대국), 고모집(백반), 진아의 집(토스트), 삐삐스 넥(칼국수,쫄면), 봉운장(갈비), 유일관(불고기), 삼화정(불고기), 아네모네, 양파(동그랑땡), 중국 요리집으로 래빈각, 만리장성, 북경도 생각나고, 힐타운(술집), 코스모스(술집)과 미군들의 전용빠이던 레인보우, 빅토리, TW ENTY-ONE도 있었다.

 

또 귀금속과 시계, 전축, TV, 선풍기, 석유곤로 등을 판매하던 백금당, 덕흥사, 금보당, 수정당, 보석당, 경화당, 보성당 등과 세계양행, 동광양행, 은성사의 밝고 환한 진열대는 언제나 사람들을 시선을 끌어 모았었다. 그리고 청구서적, 학문사, 서울서점에는 주인의 눈치를 보며 신간서적의 책장을 넘기며 마음을 달래던 가난한 고학생들의 참새방앗간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낙원동 골목을 지켜오던 헌책방 경춘 서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헌책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들어서기조차 힘든 좁은 미로 속에서도 귀신같이 원하던 책을 골라주던 그 책방아저씨의 손길도 생각난다. 부모님을 졸라 받아낸 돈으로 헌책을 구입하고 그 차액으로 용돈을 대신하던 시절, 헌책방의 참고서나 사전류의 책은 우리의 가벼운 주머니를 해결해 주던 오아시스 같은 곳이기도 했다.

 

또한 몇몇의 친한 친구끼리 모여 우정을 잊지 말고 간직하자며 폼을 잡으며 기념사진을 촬영했고 졸업사진, 소풍기념사진을 인화하던 미미사장, 예그린, 일광사. 천일사, 명동사장, 아리랑사장, 고바우사장, 천광사, 태양사, 할렐루야 등 수많은 사진관도 각인된 춘천 풍경중의 하나이다.

 

그 시절 양복은 맞춰 입어야했던 시절이었다. 조악하고 몸에 착 달라붙지 않는 기성복은 싸구려로 인식되던 때라 체형과 개성에 맞는 옷을 재단하여 사람의 외모를 완전 다르게 변신시키던 재단사는 예술가였고 양복점은 성인이 되는 필수코스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기성복으로 옷 문화가 바뀌면서 전통의 양복점들이 모두 사라지고 있다. 양복점에서 가봉假縫통해 몸에 맞는 양복이 만들어지듯 교복을 벗고 양복을 입음으로서 비로소 성인이 되는 절차이기도 했다. 그 기억속의 양복점들이 바로 미도라사, 신도라사, 럭키라사, 시대라사, 로즈텔러, 파리양복점, 서울양복점, 컨티넨탈, 코코라사, 대우라사, 가나다 양장점 등이 있었으나 이젠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상호이다.

 

또 하나 우리의 비망록備忘錄에 절대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기억은 바로 연탄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연탄과 쌀, 그리고 김장이 겨울나기 준비물의 최우선이었다. 그 시절 연탄불을 갈아본 경험이 없거나, 연탄가스에 살짝 중독되어 김칫국물 한번 안 마셔본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을 자격조차 없다. 교체시간을 못 맞춰 꺼져버린 연탄불을 쉽게 피워주던 번개탄의 화약 냄새가 언제나 달동네를 감싸고 있었지만 언제나 따뜻한 방을 만들어주었고 다 타버린 연탄재조차 겨울철이면 미끄러운 비탈길을 해결해 주는 고마운 물건이었다.

많은 연탄가스 사고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석유나 가스가 일상화되기 전에 연탄만큼 시린 겨울을 이겨내게 해주던 고마운 연료는 없었다. 그런 연탄공장이 춘천의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육림, 한일, 삼천리, 삼덕연탄공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석탄들이 기계를 빠져 나올 때마다 연탄으로 변신되곤 했다. 탄가루로 범벅이 된 검은 얼굴에 두 눈만 반짝거리던 인부들이 내뿜던 하얀 입김이 겨울 내내 공장에서 머물렀다. 지게와 리어커로 연탄을 배달하던 수고로움이 아직도 어깨와 허리의 통증으로 전해지고, 새끼줄에 매달려 달동네 언덕길을 오르던 19공탄의 무게가 아직도 손목 끝에 흔들거림으로 남아 있다.

 

또 작은 도시임에도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1년에 한두 번 들락거리던 극장도 꽤나 많았다. 시민회관, 소양극장, 문화극장, 중앙극장, 제일극장, 아세아극장, 신도극장, 육림극장, 남부극장에서 활동사진을 보며 웃고 울고 환호하던 영화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샘밭에 군인극장으로 불리던 쌍용 극장이 하나 있었지만 그곳에서 영화를 본 기억은 없다.

 

또 춘천에는 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학교가 많아 군사도시이자 교육도시라고도 불렸다. 그중에서도 사라져 버렸거나 이름을 달리한 강원농대, 춘천대, 성심여대, 춘천간호전문대학이 있어 지성의 상징이었던 사각모 인텔리를 양성하던 도시였다. 또 보인고, 제일고, 춘성고, 춘천농고, 직업전문학교의 이름도 이미 과거의 기억이 되고 말았다.

 

내친김에 사라진 병원이나 약국이름도 떠올려 본다. 지성병원, 춘광의원, 도립병원, 장외과, 오약방, 성모약국, 모범약국, 최약국, 안생약국이 있었다. 하지만 문턱 높고 돈이 많이 드는 병원은 쉽게 갈 수 없던 때라 그저 바늘 끝으로 손끝을 따거나, 소화제, 진통제, 활명수와 요오드(아까징크)정도만 있어도 웬만한 아픔과 상처를 아물게 하던 시절이었다.

 

그 외에도 국일관, 약사동 형무소, 이선길댁 연못, 신남역, 의암역, 103보충대, 강촌출렁다리, 시민회관, 어린이회관, 전매지청, 고려체육·총포사, 수구동검문소, 강촌검문소, 소양1교 검문소, 춘천댐 매운탕, 난초촌, 장미촌, 개나리촌, 곰짓내, 대바지강, 개골, 춘성군청, 인구탑, 잉어상, 공지천 팔각정, 녹향소주공장, 앙고라실크공장, 동방제사공장, 주물공장, 제지공장, 강원봉제공장, 인구탑, 실내체육관, 충혼탑, 덜덜이와 깽깽이, 요선터널, 옥수제빙냉장냉동공장, 중앙로터리 반공탑 우와! 기억의 깊은 연못에서 연이어 떠오르는 이름들. 아직도 그 상호가 떠오르다니 스스로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러나 향수의 단어가 모두 사라진 것만은 아니었다. 아직도 질긴 끈을 이어가는 독일제과, 대원당, 봉운장, 부안막국수, 샘밭막국수, 유포리막국수, 실비막국수, 퇴계막국수, 남부막국수, 금선식당, 진양식당, 가보자식당, 라이트사, 함지, 갯마을, 정선달, 우두식당, 유일면옥, 평양냉면, 태화관, 중화루, 회영루, 달팽이, 종암족발, 충북집, 강원해장국, 인성병원, 바라카페 등이 옛 이름을 꿋꿋이 지켜 나가고 있었다.

 

또 막국수, 닭갈비, 경춘선, 안개, 공지천, 문화예술, 호수, 소양댐, 춘천댐, 의암댐, 강촌, 구곡폭포, 등선폭포, 구성폭포, 남이섬, 청평사, 상원사, 흥국사, 봉의산, 삼악산, 구봉산, 금병산, 대룡산, 용화산, 안마산, 고산, 우두산, 봉화산, 구봉산, 드름산, 검봉, 추곡약수, 유인석, 이소응, 박항, 이정형, 신숭겸, 이자현, 김유정, 소양강문화제, 의암제, 마임축제, 인형극제, 소양강 처녀, 소양정, 문배마을, 콧구멍다리는 자연스럽게 춘천을 연상시키는 단어가 되었다.

 

낚시꾼이 작은 미끼 하나로 물고기를 잡아내듯 상호 하나로 탑승한 행복한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새로움을 지향하는 발전도 좋지만 전통을 지켜나가는 끈질김 또한 이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커다란 바탕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쯤에서 바닥난 생각을 접는. * (향토사 춘천의 기억 2’ 수록분- 문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