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
기억의 저편을 엿보다.
樂涯 심창섭
[강촌과 출렁다리]
* 구 강촌역 앞을 가로지른 북한강은 춘천시 남산면 강촌과 서면 안보리를 구분하는 면경계이기도 하다. 삼악산과 검봉사이의 협곡을 흐르는 북한강물줄기는 이곳에서 한 굽이 휘어지는 형국으로 물살이 비교적 빠르게 흐르고 곳곳에 너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강촌은 물깨말(강가에 인접한 물가의 마을지칭)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조용한 농촌마을이었다. 경춘선의 간이역이었던 강촌역은 검봉劍鋒 절벽의 중턱 에 위치하여 낭떠러지 아래로는 북한강과 연접되어 있 다. 이곳에서 상류쪽 삼악산과 북한강, 고가도로 등을 바 라보는 조망권이 일품이다.
이곳은 남산면사무소에서 가깝고 또 구곡폭포와 봉화산이 인접하고 있었음에도 접근성이 좋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곳이었다.
구곡폭포는 필자도 60년대 중반 중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마을사람들은 구구리폭포로 불렀는데 강촌 역에서 내려 4~50분간 농로
와 굽이굽이 계곡을 지나서야 폭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높이 40여m의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絕壁 위에서 소리치며 떨어지는 폭포는
말로 장관壯觀이었다. 폭포주변은 숲이 울창하였다.
다래나무덩굴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어 넝쿨을 잡고 타잔처럼 바위를 오가며 놀던 곳이다. 인적이 드물고 계곡이 깊어 오랫동안 머물지 못
하고 돌아선 곳이기도 했다. 또 다른 폭포와 달리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沼가 없는 것도 처음 보는 것이어서 신기했다. 장마철이 아니라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폭포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바람에 날려 이슬비처럼 부셔지며 골짜기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멋진 폭포가 있었음에도 한적하기만 하던 마을에 1972년 12월 다리하나가 놓임으로서 대 변환의 전기를 맞는다. 북한강 강촌역 바로 옆에 남산면 강촌리와 서면 당림리를 잇는 다리 등선교가 놓여졌다. 그것도 국내최초로 트러스트식 현수교였다. 일명 ‘출렁다리’라 불렸는데 희귀성으로 처음부터 언론의 각광을 받기도 했다. 현수교懸垂橋/suspension bridge란 강의 양쪽 언덕이나 높은 기둥에 쇠밧줄을 건너 매고 그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는 방식인데 주로 교각을 시공하기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다리였다.
준공식도 대단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첫 테이프는 강원도지사가 승용차로 건너면서 기관장들 차량이 뒤 따르고 이어서 주민들과 구경꾼들이 다리를 건너며 감개무량해 했다.
당시에 이곳 사람들은 외지로 나가는 교통수단은 물깨마을 ‘둔더리 나루’에서 배로 북한강을 건너 경춘국도를 오가는 완행버스를 타거나, 하루에 서너 번 밖에 서지 않던 경춘선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방법이 있었을 뿐이었다.
경춘선 단선철도는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개통되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서울 성동역 과 춘천역을 오가던 석탄기차로 무려 4시간에서 6시간이 소요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차종 이 디젤기관차로 교체되면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 때만 해도 비둘기호 한가지로 단선 이었던 경춘선 열차는 연착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이후 통일호, 무궁화호 운행으로 시간이 단축되며 수도권인구가 몰려들며 강촌은 젊음의 장소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열차가 개통된 시기에는 역무원이 없던 무인역에서 1961년에 역무원이 있는 역으로 승격되었다.
검봉의 암벽 중턱에 세워진 옛 강촌역은 북한강과 검봉의 바위가 어우 러지는 그림 같은 풍경으로 사랑을 받았는데 출렁다리가 더해지면서 더욱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강촌의 아이콘이자 대명사는 출렁다리 였고, 강촌역이었다.
지난 1995년에는 강촌역과 인접한 검봉에서 바위가 철로에 떨어지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피암터널을 설치하였다. 이 터널의 50여개 콘크리트 기둥에 젊은이들의 사랑과 실연 그리고 추억을 생생하게 흔적을 낙서로 남겨 또 하나의 명물이 되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처음 새로운 공법으로 시공된 현수교는 높이 89m의 교각 2개를 세우고 폭 3.4 m, 길이277m인 등선교는 일명 ‘강촌 출렁다리’라는 이름으로 탄생되었다. 수도권의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은 출렁다리를 기점으로 텐트를 칠 수 있는 북한강변 유원지와 삼악산, 등선폭포, 그리고 남산면의 구곡폭포와 봉화산, 검봉이 한곳에 어우러지는 복합관광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겐 통기타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만원열차 또한 낭만의 요소가 되었기에 아름다운 강 변을 거슬러 오르며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당일 코스 최상의 관광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자연관광지로 경비가 별로 들지 않는 이점利點으로 수도권의 젊은 근로자들이 많이 찾았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조용했던 강촌에 요식업종이 늘어나고 자전거 대여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춘성군청에서 직영으로 북한강변에 텐트촌을 조성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자 강촌에서 등선폭포까지 소위 통통배가 운행되었다. 한 번의 여행에 기차도 타고, 배도 타고, 산도 타는 1석 3조의 관광지로 부각되었다. 늘어난 관광객을 위해 강촌에서 등선폭포까지 4km의 아름다운 강변산책도로를 개설하였다. 경제가 좋아지면서 레저문화가 활성화 되어 관광객들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조건이 어우러지면서 강촌은 대학생 MT장소로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과 연인들이 한번쯤 다녀가야 하는 필수코스이자 젊음의 꼭짓점이었다.
관광 강촌의 시작점인 출렁다리는 작은 승용차와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용도로 만들어 졌으나 비공식적으로 짐을 실은 차량들이 오가고 열차가 도착하면 일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기도 했다. 서서히 양끝의 로프를 잡아 당겨주던 콘트리트 지지대가 균열되면서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또 와이어로프 등이 노후화되면서 과부하로 위험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다행히 1981년도에 바로 옆 상류 쪽에 콘크리트 2차선 다리인 강촌교가 새롭게 준공되어 출렁다리는 차량통행을 완전히 중지시키고 사람만 건널 수 있게 하다가 안전문제로 사람통행마저 금지한 무용無用의 다리로 한동안 존치되고 있었다.
눈요기로 전락한 다리를 놓고 보존과 철거의견이 상충되면서 한동안 대두되었으나 설문조사 등을 거처 1985년 6월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철거작업 중 다리가 붕괴되면서 인사人死 사고가 발생하여 세인의 눈길을 한번더 끌었던 애증愛憎의 다리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출렁다리가 만들어 지면서 북한강변 둔더리 나루에서 3대째 뱃일을 하며 노를 저었던 사공은 실직의 아픔을 겪는다. 당시 뱃삯이 어른 30원, 어린이 20원, 통학생 10원에 불과 했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이어오던 직장이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강촌엔 젊음이 넘쳐난다. 예전의 통기타 소리도, 강변을 밤새 환하게 불태우던 캠프 화이어 불꽃이 사라지며, 순수성과 낭만은 변질되었는지 몰라도 강촌엔 새로운 젊음의 추억이 생성되고 있다.
이곳의 풍경을 작사한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어’의 노래비가 서있어 7080세대들에게 추억 을 떠올리게 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옛 경춘철도를 이용해 신설된 레일바이크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또 올해는 추억의 출렁다리가 30여년 만에 재현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예전의 그 장소 나 규모는 아니지만 양편에 교각을 세우고 케이블로 연결한 폭 2m, 길이 58m의 보행 가능한 관광형 현수교로 강촌은 또한번 전성기를 위한 도약을 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많은 것이 변 했지만 북한강의 아침 물안개는 여전히 환상적으로 피어오르고, 강촌의 추억은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
[공지천 정조正祖도하주교渡河舟橋]
* 춘천 공지천에 놓여 있던 배다리가 생각나시는지요.
불과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배다리가 불쑥 떠오르는 이유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공지천의 볼거리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이 찾던 역사속의 교량이지만 사실은 영화촬영을 위해 제작했던 세트를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 동안 춘천을 배경을 한 드라마나 영화로 첫사랑, 겨울동화, 편지 등 여러 편이 있었다. 촬영한 드라마나 영화가 히트했을 때는 최고의 관광 상품이 되어 많은 내외 관광객들의 방문지가 되기도 한다. 일례로 2002년 배용준과 최지우가 주인공이었던 ‘겨울연가’는 공전의 히트로 드라마속의 주인공 준상의 집은 유료 입장하는 명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명동, 남이섬, 의암호 등등의 촬영지는 내국인은 물론 동남아의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필수코스가 되었었다.
2001년 ‘물의 도시 춘천’을 부각시키고자 대규모 행사인 ‘물심포니’행사를 개최했었다. 물사랑, 물절약, 물보호를 기치旗幟로 많은 행사가 추진되어 조각공원안에 물시계관을 건립하였고 호반의 도시 홍보를 위해 의욕적으로 영화 ‘청풍명월’제작에도 참여했다. 시비 3억 원, 민자 7억원 등 총 10억원을 투자하되 세트로 만들 배다리는 촬영 후 춘천시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영화 ‘청풍명월’ 촬영이 추진되었다.
나무배木船 25척을 연결하여 폭 5m, 길이 188m의 배다리를 완성하였다. 촬영지인 상중도의 고산孤山과 고구마 섬을 잇는 배다리舟橋에서 배우 최민수와 조재현이 주인공으로 열연하여 영화를 완성하여 2003년 7월 개봉되었다.
무협서사극 영화로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조선시대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황폐화되고 피폐화된 조선의 부흥과 태평성대를 바라는 백성들의 바램에 의해 무관양성소인 “청풍명월”이 건립된다. 이 곳에서 최고의 검객으로 손꼽히는 지환(최민수)과 규엽(조재현)은 생사를 함께 하자며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반정이 일어나 규엽은 동료대원을 살리기 위해 스승과 친구 지환과도 대립하는 상황에 놓인다. 두 사람이 결투 중 규엽의 칼에 맞은 지환이가 자신이 만들어 규엽에게 선물했던 목어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5년후 규엽은 “인간백정”이라 불릴 만큼 잔혹하고 냉정한 무관으로 명성을 날린다. 반정에 참여했던 공신들을 노리는 자객들이 나타나자 규엽은 이들을 추적한다. 신출귀몰하며 가공할만한 검객인 자객과의 전투현장에서 “청풍명월”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칼이 발견되자 규엽은 그가 지환일거라는 확신을 갖는다. 진한 우정으로 피보다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가 살아서 돌아왔다. 폭풍의 시대에 엇갈렸던 그들의 운명이 마주치며 싸우는 두 검객의 이야기였다.
“청풍명월” 촬영을 위해 의상과 소품은 무려 1,350여점으로 국제적 규모(무사-의상 400여벌, 단적비연수-의상 600여벌, 비천무-의상 350벌)였다. 디자이너 권유진씨와 중국 무협 미술계의 1인자 꿔빅郭碧茵이 공동작업으로 디자인을 완성하였으며 진검과 가검을 포함하여 약 1,000자루의 칼劍이 제작되었다. 또 채찍, 도끼, 창, 철퇴, 철편, 사슬, 낫 등 다양한 특수 무기들을 선보였고 단역배우extra는 연인원 700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영화였다.
<청풍명월>의 가장 핵심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시도되었던 ‘한강주교어가행렬’의 재현이다. 한강을 배다리로 건너는 ‘어가행렬’의 복원을 위해 전문 학예연구사들의 고증으로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국가적 행사로 접근도로가 건설되고 관련 지역의 병력과 백성들이 총 동원되었던 왕의 궁 밖 행차로 조선시대 왕권의 절대적 권력과 위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두 인기스타의 열연과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청풍명월’은 2003년 야심차게 개봉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춘천시에서는 이 배다리를 공지천으로 옮겨 관광자원 및 시민들의 편의시설로 활용하고자 했다. 다만 유원지인 공지천의 보트 등 선박통행이 가능하도록 배다리 중간부분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배가 오갈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또 다리 양쪽입구에 홍살문 설치와 다리양쪽 난간에 깃발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볼거리를 조성하였다. 공지천 산책로에서 의암공원이나 어린이회관 쪽으로 쉽게 오갈 수 있는 지름길이자 영화 속의 세트로서 한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배다리는 나무배를 이용하여 마치 북어를 꿰듯이 가로로 엮은 다음 그 상판에 나무판자를 까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 배들은 실생활을 위해 제작한 게 아닌 세트로 만들어진 엉성한 배에 불과했다. 더구나 재질이 나무였고 노출되어 있다 보니 쉽게 부식腐蝕되어 보수 관리비가 많이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안전수칙을 무시한 낚시꾼들의 난립 등으로 안전문제가 대립 되는 등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시민들의 여론조사로 2년여 만에 철거되면서 공지천의 명소 하나가 그렇게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도하주교는 조선 22대 정조대왕이 도성에서 어머니 혜경궁惠慶宮 홍 씨를 모시고 뒤주(나무쌀독)에서 비운의 죽음을 당한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소인 모신 수원의 현릉원에 가기 위해 한강을 건널 때 이용했던 다리였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가 히트만 한다면 그 투자비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공의 보장이 없으면서도 각 자치단체에서 영화나 드라마촬영 유치열풍에 빠져 열을 올리는 것은 어쩌면 투기꾼들의 한탕주의와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2년여 동안 공지천의 명물로서 배다리를 건너며 정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묘소로 향하는 효심孝心을 느껴 볼 수 있었던 다리였기에 아쉬움이 크기만 하다. 한 나라의 군주였던 정조는 매년 배다리를 건너 묘소만 참배한 것이 아니라 오가는 행차 시에 많은 민원들을 처리하며 백성들을 돌본 성군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사회도 고령화시대에 진입하면서 미풍양속으로 전해지던 아니 당연한 의무로 생각해 오던 효심이 무너져 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정조의 배다리는 관광자원으로서, 효심의 발로發露로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좋은 본보기였는데…….
[공지천교]
* 공지천은 춘천사람들은 물론 외지사람들이 많이 찾는 춘천의 상징적 유원지이다.
그만큼 많이 알려지기도 했지만 도심에서 불과 10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가 한몫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이티오피아 참전 기념비와 기념관, 조각공원, 의암공원, 안보회관, 구 어린이회관(상상마당)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이기에 사랑을 받고 있다. 또 오리 배와 수상뱃집들로 구성된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형성되고 의암호를 조망할 수 있는 산책로까지 구비된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대룡산에서 발원된 북한강의 작은 지류인 공지천. 동내면 부터 근화동 북한강과 합류되는 공지천까지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석사동 교대 위쪽의 후하교(쌍다리)와 남춘천역으로 가던 다리. 그리고 온의교가 있었고 춘천과 서울을 연결해 주던 공지천교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공지천교의 원조는 현재의 다리 동측에 있는 구름다리이다. 물론 예전의 모습이 아니기는 하나 교각만은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물속에 잠겨있다.
본래의 공지천교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다리였다.
당시에는 최신공법으로 만든 최신식 교량이었지만 교량 폭이 좁아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욱 진입도로 굴곡이 심해 버스 등 큰 차량통행이 불편했다. 이러한 조건으로 1966년 길이 1백5m 폭 11.5m 의 2차선 다리를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춘천의 관문으로 역할을 하던 새 다리의 양쪽 진입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확장되어 도로에 비해 교량이 좁다보니 병목현상으로 교통 체증이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점점 늘어나 늘어나는 교통량을 감당 할 수 없자 다시 교량을 확장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새 공지천교가 준공되면서 구 다리를 철거하고자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상판을 걷어내고 교각 사이사이를 무지개형식의 구름다리로 만들었다. 또 다리 한가운데를 넓혀 팔각정 건물을 세우고 ‘호수의 집’이라는 음식점이 탄생되었다.
이 팔각정은 27년 동안 춘천관광 특히 공지천의 이미지로서 한몫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물이 노후되고 폐수배출 등의 이유로 다시 건물이
철거되어 공지천을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우측사진의 오른쪽에 있던 에메랄드 찻집은 사라지고 이곳을 매립하여 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 이곳이 매년 겨울 전국 빙상경기가 열리던 곳이다. 또 왼쪽에 있는 이피오피아 참전기념탑은 다리확장공사로 현재조각공원으로 이전되었다.
팔각정 건물도 철거되고 구름다리만 남게 되자 건물이 있던 자리에 송어 조형물을 세워 변신에 변신을 거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예전에는 공지천 다리건너 현재 황금비늘 조형물이 있던 자리쯤에 호반의 도시 춘천을 상징하던 「잉어상」이 멋지데 서있었는데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사라지고 말았다.
소양강 다목적댐이 생기기 전만해도 춘천은 해마다 물난리를 겪던 도시였다. 장마철이면 화천에서 내려오는 북한강과 인제에서 흘러오는 소양강물이 범람하면서 소양동, 근화동지역과 공지천지역 일대가 상습적으로 침수되곤 했다. 1970년대만 해도 홍수 때면 물에 잠긴 공지천교를 구경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었다. 공지천 너머 작은 봉우리 이름이 배미산(뱀산)인데 정말 뱀이 많았는지 공지천 범람 시에 뱀들이 유유히 헤엄치며 공지천을 건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퇴계동 과선교]
* 과선교란 철도의 위를 지나는 다리이다. 도로와 철도가 평면 교차하는 철도건널목에서 충돌 사고의 방지하고자 만들어진다. 춘천 퇴계동에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과선교가 존치했었다. 길이 160m의 과선교는 지난 1996년 경춘선 복선전철 도심구간 공사 시에 함께 착공되어 1998년 12월에 준공된 고가다리였다.
이때만 해도 이 과선교는 온의동과 퇴계동을 잇는 도로인 동시에 춘천고속도로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하여 교통사고 및 체증을 줄이고자 건설되었다. 그러나 2010년 12월 경춘선 국철시대가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새롭게 등장한 복선전철이 고가로 건설되고 하부도로가 8차선으로 확장 개통되자 차량의 증가로 오히려 차량의 흐름을 방해하며 출 퇴근 시간이나 주말에는 극심한 지·정체 현상을 빚는 천덕꾸러기 설치물로 전락했다. 굳이 그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는 다리가 되어 결국 2011년 5월에 불과 13여년의 짧은 생애로 철거된 다리이다.
[요선터널]
* 춘천 서부시장과 요선시장은 지척 간에 위치하고 있다. 직선거리로 환산하면 약 300여m나 될까? 게다가 인구수도 많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시장이 있느냐는 어느 지인의 궁금증에 대한 질문을 답변삼아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춘천의 진산으로 불리는 봉의산은 홀로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앉은 듯 도시 한복판에 홀로 서있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의 지맥을 가지고 있다. 그 봉의산의 작은 줄기 중 하나가 현재 도청에서 소양로로 넘어가는 모수물재 고개를 따라 야트막하게 서남향으로 달리다 인성병원 부근에서 도로(금강로)를 만나며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전 지금의 중앙로터리에서 춘천역 방향 4차선도로인 금강로는 능선으로 막혀 있었다. 즉 요선동 인성병원 쪽에서 낙원동 우체국방향으로 구릉이 이어지며 중앙초등학교를 지나고 구 KBS 춘천방송국을 조금 더 지나가면서 서서히 힘을 잃는다. 춘천세무소 앞쪽부터는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공지천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춘천보건소 부터는 평지를 이루는 지형이다.
소양강과 북한강 두 개의 물줄기를 가진 간직한 춘천은 홍수 때마다 물난리를 치르던 곳이었다. 특히 1925년(을축년)에 대홍수가 있었다. 해발 75m인 중도와 상습피해지인 근화동 일대는 수해로 큰 피해를 입곤 했다. 1937년 몇 년에 한 번씩 어김없이 찾아오는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근화동 외곽 소양강변(대바지 강)을 따라 대규모 제방공사가 실시되었다. 이 제방축조공사용으로 이 구릉을 잘라 제방을 쌓음으로서 중앙로터리에서 춘천고교 방향의 금강로가 시원하게 뚫리게 되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이 공사로 홍수예방은 물론 중앙로와 근화동 벌판이 한눈에 열리는 1석 2조의 사업효과를 얻게 되면서 춘천의 지도를 바꾸는 역할을 하였다.
이 도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이 구릉으로 인해 중앙로와 소양로를 오가려면 반드시 모수물재나 사창고개, 송장고개를 통해 넘나들어야 했다. 또한 양구 화천행 시외버스도 도청 옆 모수물재를 통해 넘나들었다고 하니 그때의 불편했을 교통사정이 그려진다.
이렇게 고개를 넘어야 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요선동과 소양로의 상권은 완연히 분리되어 가까운 거리에 두 개의 시장이 존재하는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중앙시장이 형성되기 전 근대까지 요선시장에서 낙원동으로 향하는 길목은 춘천의 가장 번화가로 지금의 명동과도 같은 곳이었다. 양복점, 양화점, 양장점, 총포사, 체육사 등이 즐비해 있었다. 이에 반해 서부시장은 신흥세력인 기와집골 주민들과 강북에서 넘어오는 곡물과 채소류로 각광을 받던 시장이었다.
춘천 명동과 중앙시장 쪽으로 춘천의 상권이 형성되면서 요선시장과 요선동거리는 서서히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또한 새마을운동과 함께 도시가 발전하면서 소양로 주민들의 삶과 교통편의를 위해 요선시장 북쪽 끝 도로를 따라 춘천최초로 도심터널을 뚫는 공사가 착수되었다.
당시에는 많은 시민들이 공사장을 구경 올 정도로 터널공사는 대단한 공사였다. 그 만큼 관심사가 높아 공사가 지체되면 공사중에 터널이 무너졌느니, 양쪽에서 터널을 뚫고 들어갔으나 서로 빗나갔다는 이야기가 간간히 들려 왔지만 현장진입이 불가해 진위는 확인 할 수 없었다.
드디어 1971년 7월. 길이 150m, 높이 16.8m, 폭 12m의 요선터널이 뚫리면서 도시의 생활환경 특히 소양동 주민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고개 너머 마을이 아닌 이웃이 되어 소양로 주민들은 고개를 넘거나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중심지로 접근하며 문화환경을 일신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요선터널의 명패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였다는 사실하나만 보더라도 그 당시 이 터널위상을 엿볼 수 있고 주목받았던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터널은 한 여름철의 피서지라는 또 하나의 기능으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서민들의 집에는 에어컨이란 생각할 수 없는 고가의 사치적 물건이고 선풍기조차 없는 집이 많았었다. 더위가 맹위를 떨치면 냉방장치가 빵빵하던 시중은행으로 피서를 가거나 가까운 소양강을 찾기도 했지만 이 요선터널에서 열대야의 땀을 식히던 장소로도 각광을 받았다.
호사다마랄까. 지금의 기술력으로 보면 길지 않은 터널이었지만 공사를 잘못했는지, 당시의 토목기술이 미약했는지 균열과 누수현상이 여기저기에 나타났다. 특히 누수로 전등이 계속 고장 나고 어둡고 음습하여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1990년에 춘천시에서 안전도 검사를 실시했다. 구조적으로는 양호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터널부위가 화강암 풍화토로 토압이 진행되고 배수공이 불안전하여 누수와 균열이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특히 20여 년 동안 관리부실과 통행차량 증가에 따른 진동으로 균열 및 파손부위가 확대되고 있어 보수가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예산이 요구되고 터널관리에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자 차라리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도 터널위쪽 구릉에는 좁은 비탈길 골목을 따라 고만고만한 판잣집 67채가 어깨를 맞대고 형성된 서민가로서 존재하던 곳이었다. 가옥 및 토지 보상협의와 해체공사를 병행하면서 1993년 철거를 시작하여 춘천유일의 도심터널은 사라지고 이듬해 1994년 7월 29일 관통도로가 개설되었다.
이후 소양로 재건축사업이 착수되어 구릉을 평탄하고 좌우로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만년 소외지역이었던 지역의 면모가 완전히 달라졌다. 이곳에 터널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워진 풍경이 되었다. 다만 주변에 터널기름집, 터널수퍼, 터널불고기 등의 상호가 전해지고 있어 예전 이곳에 터널이 있었음을 상기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예전 서부시장이 형성되기 전에는 이 일대가 뽕나무 밭이었다고 들었는데 터널이 사라지고 고층아파트가 자리한 변화를 보면서 문득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려 본다.*
(2015 ‘춘천의 기억 2’ 수록분- 문소회)
* 사진은 제외하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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