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인연의 끈' 2016 김유정 추모문집 수록작품

심봉사(심창섭) 2016. 4. 4. 19:55


     

'수필'

 

인연의 끈

심창섭

* 어느 나른한 오후

무료함을 달래고자 무심히 얄팍한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심심할듯하여 과자 한 봉지도 미리 준비했다. 제목조차 보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시작한 책읽기였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서서히 작품 속에 빠져들었다. 주전부리 과자봉지가 언제 비워졌는지 손은 계속 빈 봉지 속을 더듬거리고 있다. 먹은 기억조차 없는데 과자봉지가 비어졌다. 의도하지 않은 몰입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잠시도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끼니도, 변의조차 누른채 시선한번 떼지 못하며 삼매에 빠져든다. 페이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조바심 속에서 벌써 마지막 단락이다. 아쉬움 속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덮지 못한 채 한참동안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그렇게 그의 작품세계와 인연을 맞는다. 김유정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돋을새김으로 기억하고, 그의 문학세계로 무단 승차했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단순하고 우연적으로 시작되었고 한동안 그의 작품을 탐독耽讀했다. 행복했다. 그 행복감을 구체화 시키고자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헌책방을 뒤져 1968년도에 발간된 그의 전집도 구했다. 오랜 세월의 때가 묻어있고 활자 또한 세로로 편집되어 읽기가 거북했지만 그것 또한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전집의 말미에 볼펜으로 졸업 1974. 1. 16. ()’라고 쓴 낙서가 보인다. 어느 문학 지망생에게 졸업선물로 선물했던 책인 것이리라. 아니 졸업 후에 책이라도 읽으라고 선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필연이었을까. 그가 태어난 지역의 관청에서 근무하며 문화업무를 맡게 되어 그와의 인연이 계속되었다. 1994년 어느 날 김유정이 3월의 인물로 선정되었다는 정부(문체부)의 통보에 따라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는 담당자가 되었다. 김유정 문학성과 족적을 다시한번 재조명하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중 글짓기 공모도 있었다. 사방에 포스터가 나붙었지만 학생부와는 달리 일반인 글짓기공모는 참여도가 극히 저조했다. 사실 그때도 지방언론사에 기념사업회가 있어 매년 추모제를 이끌어 왔지만 일반인들이 김유정에 대한 선호도나 인식이 그리 높지는 않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문학단체에 가입했거나 글을 쓴다는 몇몇 직원들에게도 전화로 응모를 권고했다. 전화선을 타고 손 사례를 치는 그들의 마음을 엿보면서 불쑥 던진 말 한마디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단초가 되었다. 응모를 권고하면서 말미에 글은 뭐 특별한 사람만 쓰나요, 예전의 문학소년 소녀 감성으로 돌아가서 응모해보세요. , 저도 한편 낼까하는데요빈말처럼 던진 말그물에 얽매어 숙직날 밤을 새워 산문 한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설프고 너무 막막하여 출발이 어려웠지만 그 동안의 생각을 깁고 또 짜깁기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곤 며칠 동안 수정과 퇴고 끝에 떨리는 마음으로 생애 첫 응모의 설레임을 맛보았다.

 

며칠 후 암행어사 출두야!”소리가 들려왔다. 달팽이관을 통해 낯선 언어가 요동치며 끝도 없이 메아리쳤다. 장원이라는 뜻밖의 영예에 며칠 밤을 설쳤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길을 가면서도 소리치고 싶었다. 콧노래가 절로 났다. 사업 담당자로서 행사를 좀 더 활성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나의 건방진 문학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상식의 화려함과는 달리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의 상장 한 장과 부상으로 막은 내렸다. 상 한번 타면 문인이 되는 줄 알았던 무지의 소치所致였다. 그래도 내게 숨어 있던 끼를 발견했다는 기쁨에 간간이 습작習作을 끼적이곤 했다. 그 잔뿌리 하나가 키 자람을 시작했다. 문학 동아리를 기웃거리며 발하나를 슬며시 집어넣었다가 권유에 따라 2006년도에 정식으로 등단이라는 절차까지 통과하면서 비로소 수필가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몇 개의 문학단체에 가입하여 의무적으로 일년에 몇 편의 글을 문집에 싣기도 했다. 내 글이 활자화되어 책이 만들어지고 여기저기에서 내 글을 읽었다는 전화가 오기도 했다. 으쓱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 록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느껴졌다. 헛헛함은 더해갔다. 문학단체는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갈증을 해소하려고 동인들을 따라 문학관 순례기행巡禮紀行도 참여했다.

 

이미 우리의 곁을 떠난 작가의 속살을 보기위해서는 학문적인 공부는 아니더라도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작품을 두루 탐독하고, 작품이 탄생한 장소를 찾아 그 곳에 스며있는 땅과 공기의 숨결을 피부로 느껴보거나 작가의 고향에서 그의 문학이 성장한 토양과 바람을 직접 부딪쳐보았다. 아슴푸레 다가오는 작품의 배경 앞에 마주서면 행간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감동과 작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온 문인들은 이름만으로도 친숙하게 다가왔지만 그들의 투철했던 문학의식에 오히려 주눅이 들기만 했다.

 

시대적 추세에 따라 춘천에도 문학촌이 만들어 졌다. 바로 김유정 문학촌이다.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가난과 병마로 생을 마감한 문인 김유정. 스물아홉해의 짧은 생애로 스러져간 작가이지만 불행한 삶 속에서 꽃피워낸 그의 문학 혼은 참으로 경이롭기만 했다. 불과 몇 년 동안의 창작활동으로 이렇게 우리의 가슴속을 파고든 그의 문학성은 과히 천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의 삶은 고되고 아팠지만 그의 뒷모습은 점점 큰 산으로 자리하고 더욱 짙은 향으로 번지고 있다.

 

김유정 문학촌은 이제 춘천의 문화아이콘이자 자존심이 되었다. 아니 한국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문인의 이름으로 역명을 지은 곳이 세계에서 이곳이 유일하단다. 경춘선 김유정 역. 이 또한 얼마나 대견스럽고 멋진 일인가. 외지손님이 오면 자랑스럽게 문학촌으로 안내하며 슬쩍슬쩍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문학촌을 둘러보고 찾는 곳은 당연히 춘천의 별미인 닭갈비집이다. 둥근 철판에 둘러 앉아 그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누군가 농담 삼아 비수를 던진다. 너는 매일 닭갈비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왜, 김유정 선생처럼 좋은 작품하나 못 쓰냐며 일갈했다. 가슴 한복판에 비수가 박힌다. 그래 만약 그가 닭 30마리와 뱀 10마리를 보양만 했더라도 벌떡 일어나 향토의 질박한 감성과 담긴 마치 다큐영화처럼 빛나는 작품을 수없이 탄생시켰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못들은 척하고 찬 소주잔을 기울였다. 짜릿한 아픔이 목줄기에서 느껴졌다. 또 빈소주잔에 원고지를 채우듯 술을 따른다. 글다운 글을 쓸 수 없는 이 무지스러움이 부끄럽고 야속하기만 하다. 곧 취기가 몰려오겠지, 알콜은 내 몸에 봄볕처럼 열기를 뿜어낼 것이고, 병마의 고통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의지로 마지막 문학의 불꽃으로 원고지를 메우던 몸부림의 열기가 이른 봄 동백꽃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