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전의 항쟁사를 품은 봉의산 순의비 앞에서
- 진산鎭山이라 불리는 봉의산鳳儀山을 한 가운데 놓고 높고 낮은 산들이 마치 강강술래를 돌아나가듯 둘러있는 분지안쪽에 형성된 도시가 춘천이다. 예전 어느 외국 선교사는 춘천의 모습이 마치 한 송이 꽃 같다는 시적인 표현을 하였다. 중심부에 놓여있는 봉의산을 꽃술로 보고 외곽의 산들을 꽃잎으로 본 것이다.
남쪽 방향에서 봉의산을 보면 마치 한 마리 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에 상서롭고 고귀하다는 봉황鳳凰의 이름을 차용하여 봉의산鳳儀山 또는 봉산이라 불렀다. 불과 해발 301.5m의 작은 봉우리지만 춘천시민이 거울처럼 마주하며 살아가는 산으로 관내에 소재하는 학교 교가에 빠지지 않고 봉의산 이름이 들어간 갈 정도로 상징성이 큰 산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산의 외형적인 모습만 볼 것이 아니라 봉의산이 간직하고 있는 충효의忠孝義의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 춘천은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수많은 외침과 전란이 있었던 지역이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족과 몽고군이 침입하여 봉의산성에서 관민이 목숨을 걸고 싸웠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맞아 일전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을 맞아 대치했던 수난과 항쟁의 중심지였다,
이렇듯 봉의산은 자연미학이나 인문학적으로도 의미가 각별하지만 우리가 되새겨야할 교훈적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중 봉의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순의비를 살펴본다.
때는 1253년(고려 고종40년) 몽고군이 침입하였다. 춘천(당시春州)의 관민들은 봉의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하였다. 봉의산 8부 능선을 따라 마치 머리띠 모양으로 축조된 요새라 숫자가 많은 몽고군이었지만 함락陷落할 수가 없자 산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을 펼친다. 봉의산성이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성안에는 식량과 식수가 부족했다. 결국은 소와 말까지 잡아 식량과 피로 식수로 대신했지만 한계점에 이른다. 안찰사按察使(지방장관) 박천기朴天器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끝까지 항전抗戰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다. 결국 봉의산성은 1253년 9월 20일에 적에게 함락되고 대부분이 순절殉節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서울에서 벼슬살이 하고 있던 춘천출신 박항朴恒(춘천박씨의 시조)은 수많은 관민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모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르고자 했으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자 부모와 비슷한 시신 300여구를 수습하여 장례를 지낸 효孝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의산 순의비는 바로 이들의 숭고한 피가 스며있는 이곳 봉의산기슭에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호국영령의 고혼을 위무慰撫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해 춘천시에서 세운 기념물이다.
본래 이곳은 어린이헌장비가 있던 공원이었다. 1965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공원을 조성하고 대구,서울,광주,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5번째로 어린이헌장비를 세웠고 매년 어린이날이면 사생대회와 글짓기행사가 개최되곤 하였다. 그러나 언젠가 어린이헌장비가 사라지고 1983년도에 봉의산순의비가 건립되었다. 1980년 삼천동에 어린이회관이 건립되면서 모양을 달리하여 옮겨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지는 않다. 봉의산순의비의 비문은 최승순 강원대교수가 짓고 서예가인 황재국 강원대교수가 썼으며 춘천교대 이길종교수가 제작하고 춘천시가 건립하였다
1983년 6월 2일 제1회 소양제개막에 맞추어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제막식 후 봉의산제라는 명칭으로 이 순의비 앞에서 산제를 올린 제문을 소개한다.
‘봉의산순의비 앞에 춘천시민이 한데 모여 고려고종 때 몽고군의 침입으로 이 고장의 관 민들이 이곳 봉의산성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줄기찬 항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선열들의 영 령 앞에 삼가 제향을 올립니다. 선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외적과 피 흘려 싸우던 산성은 허물어진 채 아직 그 잔영을 남기고 있으며 봉의산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대전에 순절한 선열들의 거룩한 행적은 세월 속에 잊혀져만가 구천을 떠도는 이 름모를 외로운 넋은 후인들의 위무조차 받지 못하였기 우리 여기 징침徵忱을 다하여 가 신이의 절의를 되새기고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향화香火를 올리오니 선열들은 음향하소서’
이 산제는 초헌관에 춘천시장 이진호, 아헌관에 춘청군수 김승규, 종현관에 춘천향교 전교인 반창균이 제향하였다.
잠시 순의비 앞에서 목례目禮를 한 뒤 조형물을 살펴본다. 직사각형의 화강암을 성돌처럼 7단 쌓아 올린 기단위에 자연석을 세운 모습이다. 상단 자연석 한가운데 동판으로 돋을새김한봉의산 순의비鳳儀山殉義碑 명패를 부착하였고, 하단 기단석 중앙에는 춘천부민들이 전투하는 장면을 부조浮彫로 제작하여 부착하였다. 조형물의 뒤쪽에 역시 동판으로 만든 건립기가 있어 이를 그대로 옮겨본다.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은 이 고장과 영고榮枯를 함께한 우리들의 표상으로 그 갈피
마다에는 역사의 자취가 서려 있다. 고려 고종高宗 40년(1253)에 몽고군이 춘천에 침입
하였을 때에는 이 고장의 관민이 봉의산성에서 몽고군과 대치對峙하여 줄기찬 항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세勢가 적에게 미치지 못한데다가 식수食水마저 끊겨 우마牛馬의
피로 해갈解渴을 하면서 나라를 지키려는 굳은 의기로 굽힐 줄 모르는 항거抗拒를 하였
으나 힘이 다하여 산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참전하였던 관민이 함께 이 산성에 피를 뿌
리고 전사하였다. 끝까지 생존하였던 관민은 적에게 굴하여 욕되게 사느니보다 깨끗이 대의大義에 순殉하겠다고 가족과 함께 자결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봉의산성이다.
나라를 지키려다 뿌린 선열의 숭고한 피가 스며 있는 산성은 허물어진 채 오늘까지 그 잔영殘影이 전하고 있으나 대의大義에 순殉한 이름 모를 수많은 선열의 절의節義는 세월 속에 잊혀져가고 있기에 여기 이 분들의 고혼孤魂을 달래고 그 충절을 길이 후세에 기리 려고 이 비를 세운다.”
1983년 6월 2일
춘천시 건립
봉의산 전투에서 희생犧牲한 선조들의 숭고한 넋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의로운 역사의 자취가 서려 있는 항쟁의 일번지인 이곳에서 이들을 위한 진혼제가 소양강문화제 행사의 전야제로 치러지고 있음이 그나마 다행스러울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이곳에서 산을 오르고자 한다면 먼저 이 비석 앞에서 옷매무새를 여미고 잠시 묵념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춘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름답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을 지키고자 항전했던 그날의 함성이 나뭇잎을 흔들며 들려오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춘천이여 영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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