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하나 동그라미를 보탠다.
해마다 하나씩만 그렸을 뿐인데 어느덧 겹겹의 세월로 그려진 나이테를 마주한다.
육갑六甲을 지나 또 강산이 변한다는 산을 넘고 있다. 돌아보니 아득하다.
언제 이렇게 많은 날들이 지나쳤는지는 모르겠다.
‘열심’이라는 신조 하나로 달려왔을 뿐인데 그 많은 날들이 바람처럼 지나쳤다.
언제나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것이 시간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월은 기다림 아닌 돌아봄이었고 회상이었다.
태어난 햇수가 꽤나 멀어졌다.
돋보기를 허리춤에 차고 다녀야 마음이 놓인다.
지난 봄날 화사한 꽃을 마주하면서도 몸이 근질근질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라는 걸 실감한다.
도원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떠오른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마음대로 되겠냐마는 은퇴 후 이렇게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도 행복이라 자위自慰해 본다.
비록 은자隱者의 생활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도 일흔의 나이가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관례였다.
치사致仕라 했다.
임금께서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정년이란 용어가 없던 시기의 명예퇴직이다.
그 당시에는 일흔 이상을 산다는 것은 천수天壽를 누리는 것과 같았다.
이미 그 시기조차 넘어가고 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할 시기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고령화 사회에 환갑나이는 젊은이에 불과하다.
떠들썩하게 치르던 회갑잔치는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나이를 몇 학년 몇 반이냐며 묻는다.
외모로 나이를 알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염색으로 새치 한 올 없는 흑발로 단단해 보이는 과자를 우적우적 씹는 인플랜트 노인들이 넘쳐난다.
아니 이제는 염색조차 사양한 채 은발을 나부끼며 경로석에 앉기도 꺼려하는 건강한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희미하나마 흔적을 남기며 달려온 길에서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당혹스럽다.
중후한 멋과 여유롭고 아름답게 노후를 즐기는 꽃 할배[romance grey]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한 줄도 따라 부를 수 없는 대중가요가 낯설고,
줄임말을 일상어로 쓰는 아이들과의 대화조차 어렵기만 하다.
아직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이의 무게로 어깨가 움츠려진다.
분명 거울이 일그러진 것은 아닌데 거울 속엔 주름 골 깊고 왜소한 노인의 모습이 서 있다.
춘천의 동편을 가로막고 길게 누운 대룡산 허리를 뚫고 솟아오르는 아침 해가 싱그럽지만,
삼악산머리에서 의암호를 물들이는 석양도 아름답지 않은가.
청춘이야 당연히 아름답지만 성성해진 하얀 머리와 연륜이 쌓인 주름에서도 향기가 담겨야 한다.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갈 즈음이면 사는 게 뭐 별거겠나 하면서도 회한悔恨이 든다.
스스로 박수를 쳐야할 시간도 있었지만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판단으로 때 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남자라는 이유로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삼켜 버린 애환哀歡들이 단단한 사리舍利가 되어 쌓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두 달에 한 번씩 소위 부랄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다.
여전히 동안童顔인 친구도 있지만, 버거운 삶으로 반말을 쓰기 미안할 정도로 외모가 변해버린 친구도 있다.
또래임에도 외모는 제각각이다.
얼굴만 마주하면 육두문자肉頭文字를 달고 술잔을 비우는 친구는 아직도 마흔 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몇 가지 약을 끼니때마다 털어 넣으면서도 술잔의 힘을 빌려 큰소리를 치던 녀석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세월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뿐이다.
연륜이 숙성된 미학으로 승화되기를 기도한다.
저물어 가는 한해를 보내면서 가슴속에 담은 것을 하나씩 비우자.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니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라고 했다.
눈이 침침해 지는 것도 필요한 것만 보라는 것이며,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도 필요한 말만 들으라는 것이라고 했다.
또 이가 부실해 지는 것은 연한 음식을 취해 소화불량을 막게 하려는 뜻이며,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것은 매사에 조심하고 멀리 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은 멀리 있어도 나이든 사람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살아온 세월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라는 조물주의 배려라고 한다.
세월의 찌든 때로 얼굴에 검은 반점이 늘어났다.
하얀 머리와 깊어가는 주름살이 아직 부자연스럽지만 삶의 훈장이라고 자위自慰해본다.
오래된 목조건축의 갈라지고 풍화된 기둥에 연륜의 아름다움이 담겨있듯
우리의 얼굴에도 어떤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지 않을까.
오늘 밝은 햇살을 향해 씩씩하게 외출하는 내게
썬 크림을 바르라는 아내의 잔소리마져 정겹게 들려온다. *
[2020 춘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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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청구 : 까닭 없이 남을 탓하고 원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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