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미소
沈 昌 燮
- 10여명에 불과한 우리사무실 과원의 행보는 늘 뻔했다.
집집마다 가족의 취향은 물론 젓가락 숫자까지 서로를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솥밥을 먹기 시작한지가 벌써 10여년이 넘었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아무리 헌옷을 입고와도 못보던 옷을 입고 오면 착복식을 거행하여야 하고 껀수(?)가 없는 춘궁기엔 벌채식(머리이발식)까지 해야 하는 사무실의 풍습으로 툭탁하면 억지잔치를 벌리는 아기자기한 사무실이다. 그러니 그 사람의 아침 표정만 봐도 속심을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뻔할 수밖에.......
그만큼 특별한 변화가 없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가족적인 분위기요, 나쁘게 표현하자면 마주하는게 웬수라는 애교있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요즈음 별안간 무섭게 변해가는 직원 한사람의 모습에 모두 놀라워 숨죽이며 그 모습을 훔쳐보느라고 사무실에는 묘한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진급과는 인연이 별로없는 만년계장으로『만년필』이라는 별명이 매우 어울리는 사십대 종반의『민영필』계장이 장본인이다. 만년필과 민영필은 발음이 비슷하기도 했지만 15년 동안이나 계장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재 싸인 만큼은 사장님의 해외여행 하사품이라며 꼭 구닥다리 파카만년필을 사용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가 없을 때는 늘 만년필계장이라 불렀다. 가끔은 일부 거래처의 도급자가 그 별칭이 본명인줄 알고 공개적으로 불러대는 바람에 가끔씩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웃음을 선사하기도 하는 별명의 주인공이었다.
그외에도 자린고비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절약정신은 우리사무실 아니 회사 전체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다. 계절별로 한 벌뿐인 단벌신사이고 부서의 특별한 공식모임이 아니면 가능한 사시사철 구내식당만을 애용하는 단골손님이었다. 그러한 구두쇠가 웬일인지 요즈음 사무실로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직원경조사 알림 란을 뒤척이며 그때마다 기분 좋은 얼굴로 부조금 봉투를 채우고 있었다. 아니 남발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결혼식이 많은 이 달의 경우는 약간의 과대포장을 한다면 월급의 절반정도가 나간 것 같은데도 그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조금은 직속상사가 아니면 모른척했으며, 같은 부서 동료들의 부조금도 직계존비속이라는 대원칙만을 고수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번 주말에도 예외 없이 3~5건 정도의 고지서가(?) 날아들었지만 예전의 그 대원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참석여부와 시간점검을 해가며 휘파람을 불어댄다. 어떠한 사건이 그를 그렇게도 변하게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과원들은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수군거리며 만년필의 행동에 호기심과 의아심, 아니 궁금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 혹시 로또 복권이라도 당첨된 게 아닐까? "
" 시골에 팔리지도 않고 쓸모도 없는 땅을 물러 받아 재산세만 내고 있다며 투덜
대더니 혹시 그 땅이 비싸게 팔린 게 아닐까? "
" 아니야 ! 그 자린고비가 땅뙈기 조금 팔았다고 부조금을 펑펑 던질 위인이 아니잖아"
" 사람이 별안간 변하면 죽는다는데 영- 느낌이 좋지 않아 "
우리들은 휴식시간에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만년필계장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평소 그의 돈 씀씀이는 누구보다도 절제가 있었다. 절약을 위해서라면 다소 속이 드려다 보여도 미련한 척, 바보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마치 구렁이 담 넘어 가듯 위기를 넘겨온 그였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시간이 되면 그는 언제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거나 구두끈을 천천히 옭매고 있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오죽하면 민계장님이 사주시는 술 한잔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여직원의 직접적인 비아냥거림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와 뻔뻔함도 가지고 있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그의 행동이 답답해 견디지 못한 김 군이 “ 요즈음 이렇게 건수가 없어서야 근무할 기분이 나질 않는데 오늘은 민 계장님이 한번 쏘시죠.” 지나가는 말로 한번 던진다. 예전 같으면 쳐다보지도 않고
“야! 이 사람아, 근무는 안하고 툭하면 먹는 타령인가, “ 하던 민 계장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 이사람 꽤 꿉꿉한 모양이군, 그래 오늘 저녁은 내가 한잔 살테니 자리를 만들어 봐“ 김 군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우리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눈을 마주치며 예상외에 상황에 입을 벌렸다. 퇴근 후 우리부서 직원들은 술자리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만년필 계장에게 술잔을 권하며 서로 한번씩 그 의중을 떠 보았지만 뭐 특별한 낌새도 발견하지 못한채 술잔을 비워 댔다. 쌓이는 빈술병의 숫자로 보아 꽤 마신 것 같았는데도 뭔가 찝찝한 마음에 분위기가 살아나지는 않았다. 좌우간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카운터에서 스스럼없이 지갑을 열고 배춧잎 지폐를 침 묻혀 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가 사는 술을 얻어먹었다는 현실감이 있었다. 술이 별안간 무섭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가 무섭게 변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후 우리는 일상적으로 매주 축의금 봉투를 자연스럽게 채우고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가끔씩 술좌석도 마련하는 민 계장의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면서 연말을 맞게 될 무렵이었다.
아침 출근을 하고 보니 하얀 청첩장이 책상마다 하나씩 놓여 있었다. 겨울의 문턱에 웬 청첩장이람? 하면서 뜯어보니 봉투 속에 또 하나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의아해 하면서 종이를 펼쳐보았다.
“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주말에 결혼을 하게 된 민영필씨의 장남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청첩장을 만들지 말고 가족끼리 조촐하게 결혼식을 치르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륜지대사를 혼자 치르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이렇게 선생님께 초청장을 보내드립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봄과 가을만 되면 우리 집은 정말이지 예전의 보릿고개같은 계절이었습니다. 결혼시즌만 되면 가계는 생각지도 않으시고 월급의 많은 부분을 경조사비로 지출하시는 아버님 때문에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가던 어머님의 찌들은 모습이 오늘따라 생각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미풍양속인 십시일반(十匙一飯)의 나눔 정신으로 살아오신 당신의 뜻과도 거슬리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어 이렇게 별도의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여러 선생님들의 가계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가능한 결혼시즌이 아닌 계절을 택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참석여부에 따라 저희가 생활할 보금자리(分家)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꼭 참석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2006년 11월 일
민 대 신 배상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띵한 울림이 왔다. 이건 초청장이 아니라 진짜 고지서였다. 내용을 읽어본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 동안 그렇게도 의아하던 궁금증은 이렇게 풀리고 말았다. 모두들 멍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부조금 봉투를 채우고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모두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만년필 우리가 졌다, 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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