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 하얀낙조

심봉사(심창섭) 2010. 4. 21. 10:55

 

 

하얀 낙조

沈昌燮

 

  울을 대할 때마다 눈가의 골이 깊어 감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세월이 지나치고 있다. 하루를 여는 아침면도를 위해 잠깐씩 대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울을 대하는 숫자가 현저히 줄고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구체화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리라.

여자는 30대 중반을 넘으면 거울을 마주하기가 싫어진다는데 남자의 그 시기는 과연 언제쯤일까?. 나이에 걸 맞는 외모와 품위를 갖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상투적이고 뻔한 거짓말에 한껏 부풀어 지는 속물들이 되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의 허물을 벌써 다섯 번째 벗어 던지며 의식적으로 거울 앞에 마주 서 본다. 낯설지 않은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난다. 별로 맘에 들지는 않지만 분명한 나의 모습이다. 함 뼘의 여유도 없어 보이는 삭막함 그리고 건조한 피부를 가진 모습에서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만다. 어디선가 한 줄기 찬 바람이 가슴속으로 밀려온다. 눈가의 밭이랑 같은 주름사이로 언뜻보이는건 분명 외로움이다. 거울 속에 저 모습이 과연 나이에 걸 맞는 모습과 사회적 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없다. 거울에서 등을 돌리고 만다. 거울 속의 나도 부리나케 등을 돌리고 있다.

봄바람이 창문을 흔들어 댄다. 잔뜩 움츠리고 새초롬을 떨던 나뭇잎 새순들이 자지러진다. 겨우내 알몸으로 떨던 백목련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흰 꽃을 마구 피워대는 초사월........................

20여년전의 일들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조카녀석들에게 한 올에 10원이라는 보상금을 걸고 뽑던 새치. 손바닥에 수북히 쌓이던 하얀 머리카락들. 때론 눈물이 핑-도는 아픔을 감수하며 백원짜리 동전 몇 개면 나는 늘 산뜻한 청년으로 태어나고는 했다. 뽑고 또 뽑아도 하얀 새치는 채소밭의 잡초처럼 그 영역을 넓혀 나가기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장소에서나 솟구치던 젊은 날의 욕망처럼 끈질기게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며칠 전 뒷모습만 봐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말 속된말로 만져보기 전에는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대 여섯 명의 청년들이 건들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뒤쪽으로 마치 작은 말 꼬랑지 모양으로 한 웅큼씩을 고무줄로 붙잡아 매었고 또 빨강, 노랑, 초록색으로 부분염색을 한 머리에 무스를 잔뜩 발라 꼭 물에 빠진 생쥐모습을 한 괴이한 모습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힐긋 힐긋거려도 오히려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지 행인들의 시선에는 아랑 곳 없이 자신만만한 모습들이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과 국적을 알 수 없는 머리스타일에서 세대차이의 골을 깊게 느껴본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애의 표현대로 신세대보다도 한 수위인 X세대 인가보다. 머리색깔을 제멋대로 변화시키는 모습과 엉덩이 끝에 겨우 걸치고 길다못해 질질 끌리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골목길을 청소하는 세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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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올 한 올씩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흰 실타래의 끝은 진정 어디인가. 하얀 새치는 애증의 산실로서, 때론 나의 삶을 확인시키는 생명의 탯줄 같은 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세월을 되돌아 달려가고 싶은 욕망으로 거울 앞에 머리 조아리면 보름 전쯤 위장한 부분과 새롭게 솟아난 흑백의 경계가 38선 보다도 처연하게 드러난다. 나이를 먹으면 흰머리가 생기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인체의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늘 감추고만 싶은 약점이 되고 있다. 나이에 비해 검은머리가 귀한 덕에 내게 숙명처럼 주어진 염색약과의 악연. 내면적인 성숙보다도 외형적인 형식이 우선 일 수도 있는 현실에서 오늘도 번거롭고 귀찮기는 하지만 지나간 신문지를 깔고 염색약을 늘어놓는다. 펼쳐진 신문에는 아주 지체 높은 분들의 사진과 이름이 큼직하게 보였지만 모른 체 하고 걸터앉는다.

이미 오래 전 유명을 달리하신 내 고모부께서는 40대부터 검은머리가 귀해 “백대가리”라는 별호를 갖고 계셨다. 당신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젊은 놈들까지 마구 불러대던 별호로 사실 함자보다도 더 알려진 대중적 호칭이었다.

별호란 그 사람의 특징을 가장 함축시켜 대변하는 핵심적인 표현이다. 본래의 이름보다도 듣기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의 약점을 들추어내며 비하시키는 것도 있다. 오히려 지금은 이러한 것을 이용한 상혼이 빛을 발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당신께서, 아니 온 가족 모두가 질색을 하던 경망스런 호칭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당신께서는 흑발에 누구보다도 강함 집념을 갖고 계셨다. 특이체질임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차례 염색을 시도해보셨지만 그때마다 약품에 의한 부작용으로 고생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백발노인네 행세를 하시며 평생을 사신 아픈 기억과 창밖에 활짝 핀 백목련화가 오버랩 되어 지워지지를 않는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모자라도 잘 어울려 외출 시는 멋진 중절모로 위장과 치장을 하셨지만 이상스레 모자만 쓰면 영락없는 건달이 되고 마는 나는 모자와도 인연이 닿지 않아 그만한 행복도 누릴 수가 없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가볍게 염색약에 의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는 해도 한 달에 한 두 번씩은 파뿌리 같은 머리카락을 위장된 젊음으로 도색하는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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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모처럼 낮잠을 즐기고 일어나 소파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TV를 켠다. 농구시합이 한창이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여학생들의 환호가 낯설고 시끄럽게 느껴진다. 같이 잠들었던 아이들은 아직도 꿈나라에 있다. 주방에 있던 아내가 커피 잔을 들고 조용히 다가와 앉는다. TV를 끄고 음악을 틀자 감미로운 선율이 거실을 감싼다. 비발디의 사계(四季)중 ‘봄“이다. 커피를 소화제로 애용하는 아내에게서 커피 향이 피어난다. 새삼스럽게 차를 마신 아내가 내 다리를 베개삼아 눕는다. 아이 둘 낳고 화장을 하지 않아 그런지 이제 사십 줄인 아내가 무척 이나 헬쓱해 보인다. 파마 끼가 풀려 가는 머리사이로 새치가 고개를 내민다.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호들갑을 떨자 아내는 잘 되었다는 듯이 흰 머리카락이나 뽑으라며 머리를 맡긴다. 숱은 많지 않지만 유난히 까맣고 윤기가 나는 머리를 헤친다.

비누냄새가 향긋하게 피어오른다.

하나, 둘, 셋......

몇 개뿐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에 숨어 있던 새치가 자꾸 고개를 내민다.

아내의 색 바랜 머리카락에선 가슴 시린 세월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새치라는 이름의 세월이 부숙히 쌓인다. 머리카락 끝 부분에선 아내가 참고 인내했던 삶의 아픔이 묻어 난다. 나의 조그만 노력으로 아내가 젊어질 수만 있다면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꽃샘 바람은 창문을 계속 흔들어 대고 있지만 비발디의 사계는 벌써 한 여름 속을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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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가까운 친지들도 하나, 둘씩 이별을 고하고, 이제 10여년 후면 이 귀찮고 짜증나는 작업도 그만 두어야 하는 세월이 다가오고 있다. 그때는 하얀 백발을 자연스럽게 휘날리며 오랜 염색약의 가려움증과 벼개잎을 검게하고 뒷골이 당기는 듯한 공포에서 해방이 되겠지. 그러나 그것은 해뜨는 동쪽의 기쁨이 아니라 해지는 방향이기에 씁쓸해지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다. 한 올에 십원씩 받고 새치를 뽑아 주던 조카녀석들의 머리에서도 어느덧 새치가 눈에 띠는 세월 속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 올린다.

차창밖에 조용히 어둠이 내린다. 어슴한 거리를 달리는 차들도 하나, 둘, 불을 밝히는 시간. 오늘은 오래간만에 아내와 단 둘이 교외의 분위기 있는 곳에서 외식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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