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 차 한잔 하시지요.

심봉사(심창섭) 2012. 12. 8. 08:19

 

 

수필

 

                                         차 한 잔 하시지요.

 

심 창 섭

 

- 경건한 자세로 찻상 앞에 앉는다. 조용히 수도승의 자세와 마음으로 찻물을 따라본다.

사기 주전자 꼭지에서 촐! 촐! 촐! 경쾌한 소리가 마치 소주병을 따고 첫잔을 따를 때처럼 소리를 내며 잔이 채워진다.

찻잔 속에 찻물이 노란색을 띠우는 듯싶더니 서서히 연녹색으로 농도를 더해 간다. 그 빛이 참으로 곱고도 아름답다.

맛을 느끼기도 전인데 괜스레 마음이 설레며 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보는 차맛.

이런 분위기에 선비들은 한겨울에도 방문을 열어 제치고 소나무 가지에 얹힌 눈을 바라보며 혼자서도 차를 즐겼던 것일까.

 

내가 차를 처음 접한 건 언제였을까. 전통차를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돌연 커피가 제일먼저 떠오른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다가왔던 커피. 어린 시절 미간을 찌푸리면서 어른들은 왜 이런 쓴맛을 마시는지 의아해 하며 맛을 보던 커피였는데 이제는 커피가 없는 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어느 집이나 사무실을 방문해도 으레 접대용으로 커피가 나온다. 소위 국산차라 불리는 생강차, 녹차, 인삼차, 율무차, 둥글레차는

물론 대잎차, 메밀차, 옥수수차, 감잎차 등 듣도 보도 못한 차 등 그 종류도 수없이 많지만 이런 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할 뿐이다.

 

  직장에서도 아침이면 여직원이 타준 한 잔의 커피로 업무를 시작했었다.

뜨거운 김과 향기가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잡으면 따뜻하게 전해오던 그 잔잔한 행복감에 빠지곤 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또 업무가 짜증나거나 잘 풀리지 않은 시간이면 내손에는 으레 종이컵을 채운 커피가 들려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동료들과 복도에 놓인 자판기 앞에 삼삼오오 모여 습관처럼 커피를 마시곤 했다.

 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거나, 촉촉한 비가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는 창밖의 풍경을 마주할 때도 내 손에는 항상 커피 잔이 들려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조용히 음악이 흐르고 한권의 책에 빠져 있을 때에도 책상 한편에는 커피 잔이 붙박이처럼 놓여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서서히 커피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커피 하나, 프림 둘, 설탕 두 스푼인 소위 다방커피에서 인스턴트커피로, 다시 원두커피로 세상의 흐름에 맞게 내 취향도 방향을 틀어왔다.

또 다방에서 다실로, 찻집에서 커피숍으로, 카페에서 커피전문점으로 이름 또한 변신을 거듭해 왔다.

더구나 요즈음에는 커피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가 좋은 집을 찾아 멀리까지 커피투어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강렬한 커피 향과는 달리 산사에서 묵직한 통나무 찻상을 놓고 스님과 마주하며 녹차를 음미하는 순간은 정말로 마음이 그윽해진다. 그 적막을 깨우며 가끔씩 울리는 풍경소리와 곱게 우러나는 찻물의 분위기에 괜스레 두손으로 찻잔을 받지 않으면 큰 무례를 범하는 듯 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요즈음은 가정에도 별도의 찻방까지 만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운치가 있어 보이는 수제품 다구茶具에 귀한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중국산 고급차를 내놓기도 한다.

자신의 여유와 교양을 한껏 들어내는 의도성에 고깝지 않은 시선을 감추곤 했으나 내심 그런 조건이 부럽기만 한 걸보면

나는 아직도 속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커피문화와는 달리 무거운 격조가 느껴지는 다도茶道가 멋져 보이기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쩐 일일까.

나름대로의 깊은 맛이 있다지만 커피에 익숙해진 내 입맛에는 한두 번씩 맛보는 경험에 만족할 뿐이다.

 

 

  지난해 어느 날이었던가.

소양호 안쪽의 오지마을인 산막 골에서 은거하는 우안 화백이 손수 만들었다는 차를 가지고 나와 시음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차나무가 자라기에는 환경이 맞지 않는 춘천에서 웬차? 하면서도 호기심에 모두들 시선이 집중된다.

장소가 식당인지라 주인에게 부탁하여 뜨거운 물과 적당한 그릇으로 차를 다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아온 녹차와는 달리 그 품세가 아주 큰 찻잎이 우러나며 본래의 모습으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은은한 연록 색을 띠우며 때깔 좋은 녹차가 만들어 졌다.

격식이나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이 그저 새로운 맛을 본다는 신선함과 우리고장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차라는 점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투박하고 운치도 없는 식당의 엽차 잔에 따른 차였지만 아름다운 색으로 변신한 차를 조금씩 음미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구애됨이 없이 편안한 자세로 회원들과 더불어 마시는 차라 그런지 평소보다도 향기롭고 그윽하게 입안을 촉촉이 채운다.

일행 모두가 깊은 관심을 보이며 질문공세가 이어진다. 분위기에 끌려 몇 잔을 거푸 마셔댔다.

사실 어쩌다 한 번씩 마신 차는 늘 중후한 무게감에 눌려 그 분위기에 도취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차맛을 잘 알 수가 없었다.

전통 차의 참 맛을 알기 위해서는 찻물이 우러나듯 천천히 다가서야 차의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떫은 듯 쓴 듯 하면서도 단맛이 느껴지는 전통차 맛은 굳이 향을 음미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느껴진다는데 속물인 내게 차맛은 풀냄새

같은 씁쓰레한 맛만 오랫동안 잠상으로 남아 있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하지만 오늘은 호기심이 유발되어선지 지기가 손수 만든 차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차를 받는다.

처음 한 잔은 궁금증과 목마름으로 맛을 음미했다 보다는 털어 넣는 자세였지만 다시 또 한 잔의 차에 맛과 향을 느껴보며

아주 천천히 마신다. 궁금증이 표정에 묻어나는 일행을 둘러보며 우안 최영식 화백이 운을 띠운다.

 

“이 차는 동백차입니다. 김유정의 소설에 나오는 생강나무 잎이기에 동백차라고 이름으로 불러 보았습니다.

이미 동백꽃으로 만든 동백꽃차는 소수의 고수 다인들이 즐겨 마시는 것으로 알고 있고 거래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동백잎 녹차 또한 아름아름 알려져 있으나 그리 대중화 되지 않은 차입니다.

봄이면 화실주변에 지천으로 봄을 피우던 동백꽃이 지고나면 뒤를 이어 마치 붓꼭지 같은 모습의 잎을 밀어내는데 그 여린 잎을 채취하여 만든 차입니다. 이 동백잎 녹차는 어린잎을 따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그늘에서 건조한 것입니다.

본래 찻잎은 덖는 방법에서 차맛이 좌우되기도 하지만 이 차는 덖지를 않았어도 그 맛과 향 그리고 색이 일품이기에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그랬다. 처음대하는 맛 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하고 깔끔한 맛에 취해 몇 잔을 거푸 마시며 스스로 차를 즐길 수 있었다.

 

나무의 겉모습만 봐서는 그리 탐탁한 편은 아닌데 알고 보니 생강나무는 오래전부터 아주 쓰임새가 많은 나무였다.

노란 꽃과 잎은 차로 변신하고, 오래전 우리네 여인들은 그 열매기름으로 머리를 치장했으며, 등잔불을 밝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넓적한 새잎으로 튀각을 만들어 먹던 정말이지 생활과 밀접한 고마운 나무였다.

 

 

   올해 어느 봄날 아내와 용화산 등산길에서 붓꼭지 같은 동백 잎이 눈에 들어왔다.

욕심이 남보다 많아선지 호기심이 많아선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투덜대는 아내를 잠시 쉬게 하고 동백 잎을 채취하였다.

 

아직은 좋은 차맛을 위해 석간수를 긷거나, 눈 녹은 물로 한 번도 차를 다려본 경험도 없지만 어쩌다 수돗물 차를 마시면서도 마음만은

늘 도인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아내가 외출한 고요한 한낮.

혼자서 찻물을 올린다. 차를 마시고자 하는 욕심보다는 찻물이 끓어오르며 적막을 깨우는 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창밖에서 찬바람이 가끔씩 유리문을 흔들어 대고 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물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늘에서 정성으로 만든 동백 잎을 다기에 넣고 우린다. 진하지 않은 향기가 은은하게 거실로 번진다.

차맛을 훌쩍 뛰어 넘는 이런 분위기에 빠져보지만 혀끝은 아직도 감미로움과 밋밋함의 사이에서 표현을 하지를 못하고 있다.

지기들과 어울려 마실 때는 그리도 향기롭던 그 세계에 다시 도달 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더했지만 가끔은 홀로 차 한 잔에 명상을 즐겨본다.

 

 

   진정한 다인茶人은 아니지만 제가 달인 차입니다.  차  한 잔 함께 나누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