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수필- 작은 텃밭의 노래

심봉사(심창섭) 2016. 2. 5. 21:49

 

     작은 텃밭의 노래

                                                                                                                                                                           樂涯 심 창 섭

 

* 나는 사이비 농사꾼이다. 아니 인터넷 농사꾼이다.

 

10여 년 전 직장에서 마련해 주었던 작은 텃밭을 가꾸는 것으로 나의 농사이력이 시작 되었다. 어린 시절 화단에 분꽃, 채송화, 국화 등을 가꾼 적은 있었지만 농사는 처음이었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상추, 쑥갓, 고추, 방울토마토, 배추, 열무로 텃밭을 색칠했다. 씨 뿌리는 법, 모종 심는 방법을 주변의 텃밭지기들에게 귀찮을 정도로 묻고 따라 했다. 보고 듣는 것도 모자랄 때는 인터넷의 도움이 필수였다. 힘은 들었지만 재미도 있고 신이 났다.

 

몸이 나른해지는 봄날, 땀내가 잔뜩 배어있는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텃밭으로 나섰다. 아직은 이름 봄임에도 햇살이 따스하다. 지난 겨울 내내 숨죽여 있던 대지가 계절이 바뀌는 걸 어찌 알았는지 얼어있던 단단한 지면이 부슬부슬한 모습으로 변신하고 있다. 여기저기 새싹들이 보인다. 매년 봄이면 맞는 같은 풍경이지만 언제나 봄 풍경은 경이롭다. 아무것도 뿌리지 않는 텃밭임에도 냉이, 씀바귀, 달래, 쑥 등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고 이름 모를 잡초들도 아우성치며 봄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 지난 가을 들깨 타작을 한 곳에서 여기저기 들깨 새순들이 벌써 고개를 내밀고 있다. 미안했지만 그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올라온 연초록의 여리고 아름다운 새순을 마구 뽑아댄다. 내가 너무 잔인한 걸까. 분명 그건 잡초가 아닌 들깨였음에도 다른 작물을 심어야 했기에 그는 오늘 잡초라는 이름으로 생을 마감한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스멀스멀 녹아지는 이른 봄날 삽으로 흙을 뒤엎는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과 함께 자연의 흙 냄새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작은 씨앗들이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그 모습이 너무 경이롭고 궁금해서 봄부터 가을까지 주말이면 어김없이 텃밭에서 시간을 보냈다. 퇴비도 주고 비료도 잊지 않고 적기에 주었다. 정성이 갸륵했는지 초록이 넘실대는 텃밭의 채소는 여름 내내 우리식탁을 즐겁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농약도 사용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채소에 구멍이 뚫리고 벌레들도 보였다. 징그럽기는 했지만 벌레도 손으로 일일이 잡아 주고 식초, 목초액 등의 친환경제로 가꾸어 나갔다.

 

퇴직 후 남아도는 시간소비를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비록 남의 땅이기는 해도 텃밭농사를 계속하고 있다. 처음 20여 평으로 시작한 소꿉장난 같던 텃밭농사가 욕심이 생겨 올해는 200여평으로 늘어났다. 예전과 달리 면적이 커지다 보니 심는 작목도 농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욕심과 달리 힘이 부치다 보니 가급적 일손이 적게 가는 작목을 선택하는 요령도 생겼다. 8년차 농부로 경험이 축적되기는 했지만 기계화가 아닌 노동력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손쉬운 작목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러운 건 텃밭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수시로 오갈 수 있었지만 농사는 절반이상이 하늘이 도와주어야 했다. 따사로운 햇살은 물론이지만, 적당한 비와 바람도 있어야만 했다.

 

올해는 예년에 없던 가뭄과 폭염으로 대지가 갈증을 느끼며 목마름을 호소한다. 텃밭의 푸성귀들도 폭염에 지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축 처져 있다. 충분하게 물을 줄 여건이 아니기에 갈증을 면할 정도로 물을 주자 시들했던 작물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수고로운 노동과 땀을 쏟는 정성만큼 텃밭의 푸성귀들이 하루가 다르게 몸피를 불린다. 지난해보다 욕심을 부려 면적을 넓힌 탓에 허리가 휜다며 엄살을 떨지만 솔직히 텃밭의 DNA는 즐거움이다. 농사일이 자식 키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옛말에 따라 정성을 다하는데 아내는 무슨 농사일을 화초 가꾸듯 하냐며 핀잔을 준다. 덥지 않은 시간을 이용하고자 여명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이면 밭으로 달려 나간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던 어른들의 말씀처럼 작물들이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정성과 관심이었다. 땅은 주인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노력만큼의 수확할 수 있었다.

 

이웃한 텃밭은 서울에서 낙향한 은퇴 부부이다. 70대 중반이라 했지만 그들의 표정과 모습은 나이보다 한결 건강하고 젊게만 보인다. 텃밭은 세월을 가꾸는 놀이터라며 정말 정원의 화초처럼 작물을 가꾸어 나가시는 모습에 건강한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텃밭이란 화폭에서 햇볕은, 바람은, 빗줄기는 그렇게 초록, 노랑, 빨강, 주황으로 물들며 조급하지 않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힘들어 죽겠다며 엄살을 피우지만 밖에서는 나는 농장주였고, 낭만주의자이며, 로멘스트가 되어 자랑 질로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다.

 

경제적 논리로 따지면 텃밭농사는 분명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이다. 아마 텃밭을 오가는 왕복 자동차 유류 값만 계산해도 그보다 훨씬 많은 채소를 사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텃밭농사는 화폐가치로만 따질 수 없는 소득이 있었다. 그 기름 값으로 이만큼의 보람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지도 못했을 시간에 스스로 눈을 뜨고 집을 나서게 하는 부지런함과 첫새벽을 헤치는 쾌감, 웃옷을 촉촉하게 적시는 운동량. 이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은 셈이다. 밭에서 밤새 자란 농작물을 만나 돌보는 기쁨, 주변 텃밭지기들과 커피를 나누며 도토리 키 재기 같은 고만고만한 농사정보를 화제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즐거움, 깨끗한 공기와 햇볕을 받으며 땅을 딛는 상쾌함, 땀 흘려 한나절을 보내고 양손 가득 수확한 푸성귀 찬거리는 그야말로 덤으로 얻는 수익이다. 그런데도 이 농사를 손해 보는 농사라 할 것인가? 아니다 분명 수지맞는 농사다. 그것도 무지무지하게…….

 

손톱 밑에 새까맣게 때가 끼고 살갗이 그을렸지만 농사를 지으니 자연스레 인심이 후해진다. 이것저것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랄 만큼 여러 가지 채소를 재배하다 보니 이웃과 나누는 기쁨 또한 크다. 모양과 때깔은 조금 떨어져 보잘것없고, 아주 적은 양이지만 나누는 인정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풋고추나 가지 몇 개, 상추 한 움큼, 애호박 한 덩이가 굳게 닫혔던 이웃의 현관문을 열게 했고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주는 기쁨이 어찌 작은 것이라 할 것인가!

 

또 가까이 사는 친지에게 비닐봉투로 봉송封送하여 유대와 친밀감을 더한다. 아내는 타국에 사는 동생을 위해 여름 내내 말린 건호박과 고구마 줄기 등을 포장하며 뿌듯해 하는 표정이 예쁘기만 하다.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클 탁송료를 물면서도 고국의 토속음식에 목말라 할 동생가족을 생각하는 혈육의 정은 참으로 끈끈해 보였다.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 고국의 바람과 햇살이 키워준 작물에 정성까지 더했으니 이 얼마나 귀한 선물이냐며 즐거워할 처제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이유로 이렇게 수지맞는(?) 농사를 여건만 허락된다면 계속할 생각이다. 도시근교에 위치한 텃밭. 머지않아 도시가 되어버리고 말 이 자리에서 땅을 파며 자연과 함께 한다. 이후 이곳에 건물이 들어섰을 때 예전 이곳에서 도시민 한 사람이 열과 성을 다해 텃밭을 가꾸며 행복해 했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