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섭의 글 111

십이월의 지청구*

* 또 하나 동그라미를 보탠다. 해마다 하나씩만 그렸을 뿐인데 어느덧 겹겹의 세월로 그려진 나이테를 마주한다. 육갑六甲을 지나 또 강산이 변한다는 산을 넘고 있다. 돌아보니 아득하다. 언제 이렇게 많은 날들이 지나쳤는지는 모르겠다. ‘열심’이라는 신조 하나로 달려왔을 뿐인데 그 많은 날들이 바람처럼 지나쳤다. 언제나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것이 시간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월은 기다림 아닌 돌아봄이었고 회상이었다. 태어난 햇수가 꽤나 멀어졌다. 돋보기를 허리춤에 차고 다녀야 마음이 놓인다. 지난 봄날 화사한 꽃을 마주하면서도 몸이 근질근질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라는 걸 실감한다. 도원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떠오른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마음대로 되겠냐마..

심창섭의 글 2021.12.26

모모한 일상

* 코로나19로 지구촌이 비틀거리고 있다. 인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답답한 세상의 한가운데 내가 서있게 될 줄이야! 아마 역사는 코로나가 21세기를 흔든 재앙으로 기록할 것이다. 1·2차 세계대전보다도 더 인류를 두려움에 떨게 한 실체 없는 상대였다. 국경도, 무기도, 이념이나 종교도 아닌 보이지도 않는 한방(onepunch)으로 지구촌이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인류를 한 번에 가장 많이 죽인 것은 전쟁이 아닌 질병이라고 한다. 14세기에도 2억여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흑사병이 있었다. 이후에도 스페인 독감, 홍콩독감, 신종플루, 사스와 메르스 등 몇 차례 독감바이러스와 에이즈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동안 당연시 여겨졌던 평범한 일상들이 지워지고 통제되고 있다. ..

심창섭의 글 2021.12.26

독수리 검법

* 톡, 톡, 토옥~ 타 닥! 낙숫물 소리가 그치지 않고 이어진다. 느리기는 하지만 나름의 박자감이 있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모니터 화면에 모음과 자음이 결합되며 글자가 한자씩 완성된다. 마치 석수장이가 글자를 새기는 듯 지극한 노력과 정성이다. 독수리 타법보다도 더 느리다는 낙숫물 타법이다. 양손의 검지와 중지가 나름 바쁘게 움직이지만 더듬거리는 거북이걸음이다. 게다가 병아리 물먹고 하늘 보듯 쉴 새 없이 자판과 화면을 보며 까닥이는 고갯짓까지 동반한다. 그런 모습으로 27여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참 둔하고 딱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변명할 사연이 꽤나 길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서류는 펜으로 작성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후 사무실마다 타자기가 놓였지만 그건 여직원의 몫이었다. 직원들..

심창섭의 글 2021.12.26

김유정 추모시(2021)

김유정 문인비 樂涯 심창섭 호수 변 에움길 아직도 잉크냄새 폴폴 풍기는 펜촉하나 외롭다. 코발트색 잉크로 펜 끝을 적시는 너른 의암호 각혈로 물든 원고지를 채우며 동백꽃 피고 지는 사이 허리가 꽤나 굵어졌다. 설워마라 한 번의 오르가즘orgasm도 체험하지 못한 채 올봄도 속절없이 떠났지만 계절은 또 다시 돌아오는 것 저 넘실거리는 잉크물이 마르지 않는 한 빈 원고지에 채워야할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참 허허롭다.

심창섭의 글 2021.12.17

춘천의 기념비 - prologue

-봄내골에 남겨진 무채색 유물과의 조우- * 얼마만큼을 이곳에서 살아야 진정한 춘천사람이 되는 것일까. 태어난 곳이 아니어도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정이 든 곳을 제2의 고향이라 했는데 붙박이인 내게 춘천은 어떤 곳이며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 고민했다. 한곳에 터 잡고 오랫동안 살아간다고, 도시 지리를 꿰뚫거나 후미진 곳에 남겨진 문화유적을 알고 있다고 춘천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그 하나만으로 춘천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2000년대 중반 디지털 시대에 편승하고자 불로거가 되었다. 내 고장의 모습을 내 시선으로 담아보고 싶었다. 몇 가지 주제 중 관심의 뒤안길에 있는 비지정 문화유적을 스케치하듯 찾아 나섰다. 사진을 찍고 그곳에서 느낀 단상을 적어나갔다...

심창섭의 글 2020.12.21

수필 '모모한 일상'

모모한 일상 * 코로나19로 지구촌이 마구 흔들리고 있다. 인종과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답답한 세상의 한가운데 내가 서있게 될 줄이야! 아마 역사는 코로나가 21세기를 흔든 재앙으로 기록할 것이다. 1·2차 세계대전보다도 더 인류를 두려움에 떨게 한 실체 없는 상대였다. 국경도, 무기도, 이념이나 종교도 아닌 보이지도 않는 한방(onepunch)으로 지구촌이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인류를 한 번에 가장 많이 죽인 것은 전쟁이 아닌 질병이라고 한다. 14세기에도 2억여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흑사병이 있었다. 이후에도 스페인 독감, 홍콩독감, 신종플루, 사스와 메르스 등 몇 차례 독감바이러스와 에이즈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동안 당연시 여겨졌던 평범한 일상들이 지워지고 ..

심창섭의 글 2020.12.21